Dec 28, 2015

사람마음


내 말로 인해 상대방이 통증을 느낀다는 것을 알때
엷은 희열과 함께 이내 내가 더 아파진다

Dec 26, 2015

꼭지


... 미국에서 세계로 퍼져나간 자기계발 이데올로기는 사회적으로 인프라가 잘 갖추어지지 않은 “미국이라는 특정한 환경”에서 탄생했으며, 자기계발을 권하는 사회는 “구조에서 개인으로 초점을 돌리게 만들고, 개인에게 무한 책임을 지운다는 점”에서 명백한 사회적 세뇌요, 책임 회피다. 지은이는 한국에서 자기계발서가 불티나게 팔리는 이유를 현재의 신자유주의 상황이 미국의 미개척 상황과 같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사회안전망과 연대가 강화되지 않는 한, 불안 대신에 확신을 찾으려는 개별적인 노력이 ‘닥치고, 자기계발!’에 몰두하게 한다.
자기계발은 일개 사원에게 사장의 마인드를 갖게 하고, 무한경쟁을 내면화시키는 것으로 신자유주의에 알맞은 주체를 주조한다. 자기계발에 빠져들면 들수록 국가의 역할을 부정하게 되는데, 이 역시 신자유주의 이론과 정책이 선호하는 사고다. 자기계발 이데올로기의 또 다른 효과는 “새로운 유형의 지배계급이 자신을 드러내는 동시에 감추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즉 신흥 엘리트(금수저)들은 날 때부터 3루에 가 있는데도, 자기 노력으로 거기에 갔다고 대중을 우롱한다. ‘자기계발’의 가장 흔한 미국식 표현이 ‘self-help’라는 것을 사족으로 덧붙인다.

_장정일 칼럼, 자기계발이라는 환상, 한국일보

Dec 21, 2015

내 안에


누군가를 미워하고

누군가를 고맙게 생각하고

누군가를 사랑하고

누군가를 질투하고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방식은

이것이다.

Dec 17, 2015

코끝

이틀 만에 나간 바깥 바람이 아주 차가웠다.

커피콩 한 봉지를 새로 갈아 아파트 단지를 괜히 더 구불구불하게 통과해
우리 동 앞 마당에 다달아 고개를 젖히고 위를 보았을때
갑자기 내가 서있는 이 곳, 이 동네가 너무나 작게 느껴졌다.

한 두 달 전에 내가 살고 있는 곳을 주제으로 작업을 했다지만
이미 다 풀고 답을 맞추고 할 수 있는 만큼 밑줄 긋고 달달 외운 시험지처럼
더이상 나에게 아무런 무게를 갖지 못하는 좁은 장소로 느껴졌다.
그리고 나는 여기 이상하게 갇혀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어디에 갈 수 있을까
내가 그들의 입맛에 맞춰진 사람일까
이런 수고와 비용을 들일 이유가 있을까 하는
나라는 사람이 어떻게 보일까 및 내 위치에서 좁은 입구를 더듬는
수많은 의문들이 갑자기 가시고

그냥 다른 곳에 위치하고 싶고 그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모든 사람들이 나를 좋아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이야기할 준비가 된 사람들,
새로운 것 작은 것 위험한 것 연약한 것들을 그게 가져다 줄 유익은 차치한채
관찰할 용의가 있는 사람들과 함께이고 싶다.

내 작업들은 변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함께 기대하고 함께 저지르고 함께 보고
또 더 깊이 생각할 친구들이 나는 필요하다. 깊이. 깊이.

Dec 16, 2015

daily praise


Praise the Lord, my soul,
and forget not all his benefits,

who forgives all your sins
and heals all your diseases,

who redeems your life from the pit
and crowns you with love and compassion,

who satisfies your desires with good things
so that your youth is renewed like the eagle's.

Psalm 103:2-5



The Lord is compassionate and gracious,
slow to anger, abounding in love.

he does not treat us as our sins deserve
or repay us according to our iniquities.

For as high as the heavens are above the earth,
so great is his love for those who fear him.

as a father has compassion on his children,
so the Lord has compassion on those who fear him.

for he knows how we are formed,
he remembers that we are dust.

Psalm 103:8,10,11,13,14

Dec 14, 2015

밑줄




 그렇기 때문에 나는 교실에서 정답이 아니라 낯선 질문, 이질적인 대답을 환영한다. 왜냐하면 이런 낯선 질문이야말로 들어보지 못한 새로운 말을 전해주고 새로운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점 때문에 몇몇 학생들은 어리둥절해하거나 불만을 터트리기도 한다. 뭔가를 정리해주지 않으면, '객관적'으로 요약 정리된 '보편타당한' 정답이 나타나지 않으면 불안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방인을 환대하지 않는 공동체는 성장할 수 없다. 정답만을 추구하는 공동체에서는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없다. 낯선 것들에 대한 환대를 통해 교실이라는 공동체는 쇄신된다. _243p

 누군가와 공감한다는 것은 그를 나의 장소에서 환대하는 행위이다. 그에게 나의 장소에서 살 수 있도록 허락하고 나의 장소를 그와 공유하며 '우리의 장소'로 만드는 것이 환대의 행위이다. 이 환대를 통하여 나는 그와 함께 '세계'를 만든다. 세계는 객관적으로 주어진 외부 환경이 아니다. 오히려 세계는 소통하고 경쟁하고 공감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만들어진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공감 능력이 활기에 차 있을 때 세계-내-존재로서 인간이 된다고 할 수 있다. ... 사람 사이에 있는 존재, 그리고 그 사이에서 스스로 인지상정이 있는 '인간'으로 되어가는(being) 존재, 그것이 인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라고 한다면 자신의 공감 능력이 활기를 띠고 살아 움직이게 해야 한다. 이렇게 본다면 인간의 공감능력은 완전체로 미리 주어지는 것이라기보다는 하나의 가능성으로서 확장되는 힘, 능력이라는 역동적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그렇게 모두를 환대하며 살아갈 수 있는가? 연쇄살인범이 공감 능력이 없다고 비난하는 우리의 공감 능력은 어디서 활성화되고 어디서 멈추는가? 우리는 공감 능력이라는 힘을 얼마나 역동적으로 작동시키고 있는가? 혹 우리의 공감 능력은 주어진 곳에서만 자동적으로 작동하고 멈추는 수동적인 것이지는 않은가? ... 인간 됨의 핵심이라고 하는 우리의 공감 능력은 어떤 분류표에서 멈추었다. 한 학생은 이것을 발견하고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이 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군요!"
 나는 이것이 수업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인간 됨이 쉽지 않음을 발견하는 것, 이보다 더 인문학적인 발견이 어디에 있겠는가. 내가 맞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리 맞지 않으며, 내가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리 쉽게 이야기할 수 없다는 발견(깨달음) 말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판단과 심판의 언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찰의 언어이다. _262, 263p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 엄기호 지음, 푸른숲

Dec 10, 2015

언니의 글

자격 인정 경력 작가
뭔가 그럴듯한 말들. 힘주어 말하면 마치 그 단어를 가지게된 듯 우쭐해지는 말들에 다치지 말자.
평가받으려고 그림을 처음 그렸던가
어떤 건 검사받던 일기장에도 잘 써지던 날이 있었는데
그때부터 우리는 각자의 노트를 만들지 않았을까?
어쩌다보니 칭찬에 취하고 저기로 가면 칭찬을 더 받고
저기에 들어가면 돈도 더 준다는 말들에 목이 돌아가
목이 메는지 마르는건지 매야하는지 헛갈려 술
이나 같이 마시던 친구들이
매일매일의 구조조정에 괜히 마음이 서늘해지고
자신이 누릴 행복을 덮어 따가운 방석에 앉아있는걸 볼 때
기어들어가는 말이며 생각들.
.
가끔은 내일 죽을 것처럼이 아니라 마치 너무도 오래 살것처럼 살아보고 싶은 생각이 들어.
번개처럼 만나는 건 우리가 삼시세끼 챙겨먹는 것만큼이나 어려울테지만
종종 서로를 만나 등짝을 때려가며 등짝을 맞아가며 살았음 좋겠다.
왜 때리냐고? 어떤날의 외로움은 좀 정확히 맞아보고 싶었던 욕구였던것도 같아서.
물론 간지럽지도 않은 곳을 긁어주던 어른들에게도 감사해. 살다보면 그곳에서 못견디게 간지러워 질 거라는 걸 미리 배웠던거니까.
.
당신은 지금 하고있고 해 온것들을 껴안은 채 여전히 빛나는데
어디서 검댕에 묻어와 닦을 생각도 못하는 당신 얼굴보면서
우리가 통장잔고 얘기나 하다 돌아선게 너무 미안하다.
.
좋은 어른이 되기엔 아직도 멀고 새주소 사기가 쉽진 않아서,
집이생기면 주소남길게.
손에 쥐고있던 희망을 펴서
서로에게 답장하도록 노력하자

Dec 7, 2015

comfort

The Lord is gracious and righteous;

our God is full of compassion.


The Lord protects the simplehearted;

when I was in great need, he saved me.


Be at rest once more, O my soul,

for the Lord has been good to you.


For you, O LORD, have delivered

my soul from death, my eyes from tears, my feet from stumbling,

that I may walk before the LORD in the land of the living.


Psalm 116:5-9






Remain in me,

and I will remain in you.

No branch can bear fruit by itself;

it must remain in the vine.

Neither can you bear fruit unless you remain in me.


If you remain in me and my words remain in you,

ask whatever you wish,

and it will be given you.

This is to my Father's glory,

that you bear much fruit,

showing yourselves to be my disciples.

As the Father has loved me, so have I loved you.

Now remain in my love.

If you obey my commands,

you will remain in love,

just as I have obeyed my father's commands and remain in his love.

I have told you this so that

my joy may be in you and that your joy may be complete.

My command is this:

Love each other as I have loved you.


John 15:4, 7-12







Dec 2, 2015

my best way to comfort myself is just to be with you






ONE THING

I tasted the world seen more than enough
Its promises fleeting
Of water and wine I emptied the cup
And found myself wanting

But there is a well that never runs dry
The water of life the blood of the vine

Cause all I know is
Everything I have means nothing
Jesus if You're not my one thing
Everything I need right now
All I need is You right now

Just one thing I ask and this I will seek
If only to know You
To be where You are and go where You lead
My God I will follow

The things of this world I've counted as loss
I lay it all down to take up this cross

Cause all I know is
Everything I have means nothing
Jesus if You're not my one thing
Everything I need right now

Cause all I know is
Everything You are and nothing
Jesus if You're not my one thing
Everything to me right now

And I'll sing
Whoa whoa
I want nothing but to know You
And to be with You my God

And I'll sing
Whoa whoa
And with everything within me
I will worship You my God

Nov 27, 2015

제 몸 담긴 물을 마시고 또 뱉으며 사는 물고기처럼
그렁저렁 숨 쉬며 오늘 주어진 흐름에 맞춰 잘 사는 것만 같다가도
기준을 잃어버린 이 세상이 나는 너무 힘들다. 너무너무 괴로울 때가 있다.

내 페이스북 타임라인은 이제는 정말로 온갖 아프고 홧병나고 불의로 눈물진 일들이 가득해
(동시에 여전히 그것과 함께 게시되는, 마치 모르면 천치처럼 여겨질 세련되디 세련된 예쁨과 멋짐으로 넘쳐서)
잠시만 들어갔다 나와도 눈도 맘도 죄다 뻑적지근해진다 이러다 고장나겠음.
주소창에 닿은 손가락도 페이스북에 대해선 습관적인 입력을 거절할 줄 안다.
인스타그램도 다르지 않아서 깊이를 잃어버린 강박적 업로드 혹은 변태들이 천지다.

이젠 너무 흔해서 누구도 별 감흥 없이 지나칠 수많은 포르노 사진들
나름대로 구체적인 삶이 있는 그 속의 배우들 모델들
한 벌 더 사입도록 부추기려 점점더 질 떨어지는 원단으로 지어지는 옷들
길고 마르고 하얗고 뽀얗고 갸름한 데에 페티시 추가하면 만점으로 쳐주는 눈알들
그리고 그래서 그러니까 여성혐오, 물론 그래서 남성혐오, 혐오, 혐오 혐오, 혐오 혐오 혐오
니가 굶어 죽든지 맞아 죽든지 젖어 죽든 얼어 죽든 그건 내 알 바 아님, 딱 그 태도


사람이라는 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 인지 한 번이라도 절실하게 느껴본 적 있다면
누구든지간에 그런 사람도 정말 이럴 수 있을까

SPA브랜드 세일코너에 80%이상 세일해도 절대 팔리지 못하는
이미 올 나가고 여러 번 밟혀 버린 옷 옷걸이에서 떨어져 바닥에 있어도 직원들도 못 본 체하는 그런 옷
우리가 숨 쉬며 살아가는 문화는 사람을 그만큼 싸구려 취급해준다
어쩌면 길을 걷다 가만 울어도  아무 이상할 이유 없는
그런 세계일지도 모른다.


태어나 본 적 없는
그런 고로 기대할 줄 모르는
그런 대의, 그런 의로움, 그런 소망
가려져 있는 것이 하지만 여기에 있다고, 없는 게 아니라고
그 어느때보다 확실히 말해야할 때 보여줘야 할 때다.

Nov 23, 2015

새로운 너

시인지 뭔지 하여튼 나를
기분이 좋아서 
글쓰게 하는 사람이 나타났어

Nov 17, 2015

때로는

때로는 사랑해 보고싶었어
정해진 몇 글자로 무궁무진한 마음을 발음해 내기보다

눈으로 손끝으로 
말해지는 것이
훨씬 많을 때가 있다.
그렇게
너는
나는
할말이
많았구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너를 얼마나 생각했었는지는
너를 만난 첫 순간 이미 다 녹아서 사라졌다.

<잃어버린 대의를 찾아서>

출처:  http://www.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51175

미디어뉴스비평
잃어버린 대의를 찾아서[도화동에서] 파리에서의 테러와 민중총궐기를 보며
김민하 기자  |  acidkis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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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5.11.16  12:3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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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동안 우리를 아프게 한 두 개의 뉴스가 있다. 첫 번째는 프랑스 파리에서 일어난 테러다. 수많은 사람들이 제각기 다른 전망과 분석, 해설을 내놓고 있는 상황에서 더 말을 얹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분명히 다시 돌아올 어떤 물음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도 중요하다.
예를 들자면 1999년 미국에서 일어난 컬럼바인 고교 총기난사 사건에 대한 담론이다. 당시 미국의 언론은 고교생들이 게임과 과격한 메탈음악, 이를테면 ‘마릴린 맨슨’에 빠져 그러한 범죄를 저지른 것처럼 묘사했다. 2003년 개봉한 마이클 무어의 <볼링 포 컬럼바인>은 이런 분석의 비겁함을 따져 물은 다큐멘터리의 명작이다. 특정한 문화적 코드가 아니라 총기소유를 합법화 하고 있는 미국의 특이한 문화적 제도적 배경이 이 참사를 불러온 핵심이라는 게 이 작품의 주제의식이다.
이 사건을 다룬 것으로 유명한 또 하나의 작품은 구스 반 산트의 <엘리펀트>이다. <볼링 포 컬럼바인>이 사건의 원인과 결과를 논리적으로 추적하는데 방점을 두고 있다면 <엘리펀트>는 사건의 과정을 단지 관조하는데 집중하고 있다. 헐리우드에 익숙한 가벼운 사람의 시선으로 보기에 이 영화는 약간 ‘어렵다’. 그러나 이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게 무엇인지는 알 수 있었다. 사람들은 그 사건이 벌어진 것이 누구의 책임인지, 어떤 잘못에 의한 것인지를 찾는데 혈안이 되어 있지만 정작 사건을 일으킨 주체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엘리펀트>가 추구하는 것은 그런 세태에 대한 소박한 반항으로 보인다.
파리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 우리는 여전히 많은 말을 할 수 있다. IS에 대한 군사작전을 어떻게 수행할 것인가, 그것은 정당한가 부당한가, 같은 잘못을 어떻게 되풀이 하지 않을 수 있는가, 중동의 질서를 누가 어떻게 바로잡을 것인가, 유럽의 난민 정책은 어떻게 변화되어야 하는가, 유럽 내 극우세력의 준동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등등의 수많은 쟁점이 남아있다. 그러나 그러한 쟁점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도 이 사건을 일으킨 주체들에 대한 관조적 접근을 시도해보는 게 필요할 수 있다.
  
▲ 16일 오전 서울 서대문 주한 프랑스대사관 앞에 촛불을 밝혀 프랑스 파리 테러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어떤 측면에서 보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기는 명분이 사라진 시대다. 명분이 아니라 ‘대의’라고 불러도 좋겠다. 자본주의적 질서에 의해 정초된 세상만사에 대한 소비자적 태도와 이것이 조장하는 열등감, 다시 이로 인해 촉발된 정치적 냉소주의의 세계에서 우리의 대의는 체제적 파탄이라는 현실로 드러난 지 오래다. 그러나 우리는 대의가 없는 세상에서 대의를 찾아 방황한다.
예를 들면, 북한이 DMZ에서 ‘지뢰 도발’을 일으켰을 때, 우리의 젊은이들이 군복을 다시 꺼내 국가에 대한 충성을 결의한 것은 대의를 향한 움직임이었다. 일각에서는 국가주의에 물든 젊은이의 정신을 우려하기도 했지만, 그보다 앞서 보아야 하는 것은 젊은이들 사이에 무언가의 대의, 그러니까 어떤 종류의 ‘공공선’에 자신의 운명을 바쳐야 한다는 충동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당시의 ‘예비군 열풍’은 그 충동에 우리 사회가 고작 체제 수호를 위한 국가주의로 응답할 수밖에 없었다는 걸 드러낸다.
지금은 생사가 불분명한 ‘김군’처럼 전 세계에서 모여들고 있는 ‘이슬람 전사’들도 어떤 측면에선 마찬가지의 충동에 휩싸이고 있을지 모른다. 지금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가 어떤 여성들, 외국인 노동자들, 오염된 종교적 신념들 때문에 잘못되었으므로 그것을 바로잡는 운동에 자신을 바쳐야 하겠다는 그런 충동들 말이다. IS에 합류하면 한 명 이상의 부인을 가질 수 있다거나 평생 걱정 없이 먹고 살 수 있다는 식의 허황된 선전의 영향력은 덤이다.
결국 북한의 도발에 군복으로 맞서겠다는 사람들이나, 어떤 이유로든 IS에 합류하겠다는 사람들이나, 유럽에서 준동하는 극우주의에 몸을 내맡기는 사람들이나 어떤 ‘대의’에 목숨을 걸기로 다짐한다는 점에서, 또 그런 충동에 적극적으로 몸을 내맡긴다는 점에서 유사한 측면이 있다. 이보다 중요한 또 하나의 공통점은 이들이 목숨을 걸기로 한 그 ‘대의’가 실제로는 자기 자신의 처지에 해를 끼치는, 굳이 표현하자면 ‘가짜 대의’에 가까운 것들이라는 점이다.
물론 진짜와 가짜를 나누는 것은 늘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가 ‘진짜 대의’라는 게 실종된 사회에 살고 있다는 것은 주말을 장식한 두 번째 뉴스와 관련한 사실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방송뉴스는 주말에 있었던 ‘민중총궐기’라는 이름의 집회를 ‘폭력시위’라는 틀을 통해서만 보도하고 있다. 시위에 참여했던 많은 사람들은 오히려 경찰이 과잉진압을 해 폭력의 양상을 확대시켰다고 반론하고 있다. 이건 아주 익숙한 광경이다. 매년 벌어지는 거의 모든 종류의 대형집회에서 이런 논쟁은 거의 같은 방식으로 제기되고 있다.
주목해봐야 할 것은 폭력의 원인을 제공한 주체가 경찰이냐 시위대냐의 논쟁에서 약간 비껴서있는 어떤 불평들이다. 이런 불평들은 집회의 전술과 관련한 부분에서 제기되고 있다. ‘사람이 이렇게 많이 모였는데 사실상 아무것도 한 게 없지 않느냐’, ‘자꾸 청와대로 가자고 하는데, 거기 가서 뭘 하자는 거냐’, ‘재미도 감동도 없는 이런 집회가 지겹다’는 등의 푸념이 나오는 것이다.
  
▲ 14일 서울 광화문 사거리 인근에서 민주노총 등 노동·농민·시민사회단체로 이뤄진 '민중총궐기 투쟁본부'가 개최한 정부 규탄 '민중총궐기 투쟁대회'에서 참가자들이 행진하던 중 경찰과 대치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사실 이런 푸념조차도 이제는 일상이다. 여기에 대해 새롭고 다양한 집회 전술을 개발하겠다고 대답하는 건 ‘오답’이다. 어떤 집단적 불평은 대개 그 이면에 그 불평들의 표면적 논리와는 별개의 어떤 대중적 무의식을 포괄하고 있기 마련이다. 이들의 이런 불평은 결국 이 집회를 왜 했는지 모르겠다는 의문으로 귀결된다. 분명히 사람들은 분노하고 있고, 이 분노를 개인적 차원이 아니라 공적 차원으로 풀고 싶어 하며, 그렇기 때문에 사회운동세력은 집회를 조직할 수밖에 없는데, 정작 모아놓고 보니 어떤 대의에 호소해야 할지 알 수 없는 딜레마에 빠진지 오래인 것이다. 실제 청와대로 진격(?)하지 못하더라도, 집회가 별다른 프로그램 없이 다소 혼란스럽게 진행되더라도, 분노한 사람들이 거기에 모여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의미를 가진다는 사실이 확인이 돼야 하는데 그럴 수 없는 허무함만 남기고 만다.
결국 이 모든 것을 관통하는 하나의 결론은 이것이 정치적 담론의 문제라는 것이다. 우리 정치에는 오로지 누구를 단죄하기 위한 과장된 수사들이 아니라, 사람들의 의식을 제대로 읽고 그들의 분노와 공적 충동을 공동의 선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담론이 필요하다. 우리는 거짓된 대의에 맞서 ‘진짜 대의’를 세우는 일에 집중하거나, 아니면 그런 대의 없이도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충분히 공적 역할을 자임하며 살 수 있는 조건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것은 물론 정치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언론의 문제이기도 하다. 사실 양자의 문제는 따로 떼서 생각할 수도 없다. 지금 우리는 과연 제대로 잘하고 있는가? 도저히 거둘 수 없는 스스로를 향한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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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 15, 2015

가로등


너를 만나고 나서야

밤에 낙엽 떨어지는 소리가 

얼마나 큰 지 알게 되었다.


Nov 13, 2015

창문에 빗물 스티치

그때는 몰랐었는데 이제는 알 것 같다

얼마나 마음이 조였을지 조금더 시간이 필요했을거라고

나를 조금 기다려줄 수 없겠느냐고 묻고 싶었을 것

하지만 기다리게 하는 것마저 포기하고 싶었을 것




Nov 12, 2015

예쁜이

우리가 처음만났던 날 너는 기억할까

너를 데려왔는데, 내 방에

분명 너무 반가웠는데, 나는 어색해서

작디 작은 너를 몇 걸음 떨어진 자리에서 내려다보았었어

옆으로는 무시무시한 청소기 소리가 지나다녔고

그때 너는 아직 한참 꼬마여서

넌 목소릴 낼 줄도 몰라서 까맣게 낑낑 울었어

내 머리방울을 입에 한껏 물고 자랑하며 걸었어

쇼파 뒤로 아래로 숨바꼭질 실컷 했었어



몰랐는데 시간이 많이 흘렀던가봐

내 옆구리에 바싹 붙어 잠든 채

깊이 끙끙 우는 너를 본다

왜 너한테만 시간이 더 빨리 갔던 걸까

너는 이제 걷고 싶지 않대

그냥 이렇게 아무것도 안해도 괜찮대

아무리 바빠도 바깥 볕 더 쪼여 줬어야했는데

밖은, 피는 꽃으로 지는 낙엽으로 코끝 애린 바람으로

그렇게 가득 차 있다고 보여줬어야 했는데

하루종일 싸돌아다닌 차가운 내 겉옷 한겹

그 스치는 냄새로만 그리고 문 닫는 소리로만

네 하루 네 기다림에 대답해온 것 같다



매일 나보다 다섯배는 빠르게 늙는 너가

단추구멍 같았던 눈으로 똑같이 나를 보고 있다

너는 매일봤는데 매일 예쁘구나

언제나처럼 잠들었다가 내가 모르는 새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곳으로 멀리 떠날까봐

그렇게 너를 물끄러미 보고 있으니 알아서 눈물이 달린다

나는 그렇지 않았는데

너는 나만 있으면 행복해한다


첫날부터 지금까지

Nov 9, 2015

그나저나

오늘 아주 00한 편지를 한 통 받았다.

00한이라고 말하는 건 난 이에 걸맞는 말을 정확하게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아 생각했던 것보다 더 멋진 사람이구나.

나는 어떻게 그렇게 정확한 말을 골라 말할 수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편지에

너와 너의 뭔가도 아니고 너와 나의 뭔가도 아니고 너의 뭔가와 나의 뭔가도 아닌

그냥 말하는 너와 듣는 나 단 둘이 있더라

다 읽고 나니 이런 사람을 앞으로 어떻게 대하여야 할는지 마음이 떨렸다.

나의 덤덤함으로 너가 다치면 어쩌지

나의 무심함으로 너가 뭉개지면 어쩌지 뭐 그런

그래서 난 기도를 멈출 수가 없다.

Nov 8, 2015

덜고 덜고


한때 잘라내기와 덜어내기가 주특기였던 사람과 한참이나 시간을 보냈었는데도
나는 오히려 담기와 안기만을 배워나갔던 것같다.

덜어내기와 잘라내기는 모두 '-내다'가 들어간다.
내보내 내쳐 내버려 끄집어내 내쫓아
분명 그때도 알았을텐데
나는 그냥 그 느낌을 싫어하기만 했다.

담기와 안기를 반복하는 나를 후회하지 않는다.
하지만 때로는, 정말 어떤 것들은, 아주 버려야한다는 걸 이제는 받아들이게 되었다.
소중한 것들을 위하여
잘 배웠다.

Nov 3, 2015

사랑이 주목하는 곳

"
The older brother became angry and refused to go in. So his father went out and pleaded with him. But he answered his father,

 -Look! All these years I've been slaving for you and never disobeyed your orders. Yet you never gave me even a young goat so I could celebrate with my friends. But when this son of yours who has squandered your property with prostitutes comes home, you kill the fattened calf for him!

 -My son,

the father said,

 -You are always with me, and everything I have is yours.
But we had to celebrate and be glad, because this brother of yours was dead and is alive again; he was lost and is found.

"


Luke 15:28-32



Oct 25, 2015

DEEP MEMO

1.
오늘 설교 듣다가:
art,
ars,
techne

탁월함으로 드리는
전시라는 예배.

1-2.
"그 무엇이 나를 향한 주의 사랑 빼앗으리요
그 무엇이 주를 향한 나의 사랑 빼앗으리요"

2.
몸이랑 / 정신이랑 / 마음을
쓰는 방법을 새롭게 배우고 있는 요즘
생각보다 에너지 사용을 줄일 수 있는 것이 여전히 많이 있고
나에게 필요한 것은 몇 가지 안된다.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방법이 따로 있었고 -SNS는 정말 도움 1도 안됨-
서두르는 호흡으로 마음 졸일 필요 없다.
가져서 힘들 불필요한 감정들은 굳이 깊이, 오래 묵상하지 않아도 되더라.
안녕

3.
정말 좋은 것은 일말의 불안도 주지 않는다.

Oct 19, 2015

Jesus said


But to you who are listening I say: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Love your enemies,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do good to those who hate you,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bless those who curse you,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pray for those who mistreat you.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눅Luke 6:27-28

Oct 15, 2015

맨날 벌써 시간이 타령

분명 2시 전에 자라고 했는데.

게으름을 부리다가 3분전인 이제서야 침대에서 몸을 세워 포토샵을 켠다.

내가 2시에 자든 4시에 자든 사실 너에게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나의 잘먹고 잘자는 삶에 대해 너가 관심을 가진다는 건 그래서 이토록 신기한 것이다.

이불을 덮은 후 눈을 감았을 때 보이는 가아만 화면에도 나를 등장시킬 사람.

생각하면 기분이 끝내준다. 아 그래서 나도 잠이 안왔던 것이라고 내일 조금 핑계대야겠다.

Oct 13, 2015

옆사람의 요즘 소감





전부여도 좋겠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떠나자

나는 한동안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었는데

어떤 사람이 다가와

이전에는 받아본 적 없는, 향기나는 마음을 나에게 선물한다.

나는 이게 너무 곱고 신기해서 가만 들고 있는게 어색했는데

또 이런 내가 받아도 되는 것인가 생각했는데

오랫동안 기다렸다며 빙그레 웃는다.

시간으로도 크기로도 견고함으로도

나는 이게 너무 곱고 신기해서 가만 들고 있는다

너무 고운 너는 나를 살살 가지런히 빗어준다.

Sep 26, 2015

Gal 1:10-11

Am I now trying to win the approval of human beings, or God?

Or am I trying to please people?

If I were still trying to please people, I would not be a servant of Christ.

I want you to know, brothers and sisters, that the gospel I preached is not of human origin.


Gal 21:19-21


For through the law I died to the law
so that I might live for God.

I have been crucified with Christ
and I no longer live,

But Christ lives in me.

The life I now live in the body,
I live by faith in the Son of God,
who loved me and gave himself for me.

I do not set aside the grace of God,
for if righteousness could be gained through the law,
Christ died for nothing!

Sep 23, 2015

거룩하고 아름답게 살자.



제정신으로 살아갈 수 없는 이 세상을 모르고 하는 말이 아니야

뭔가 더 가진게 많아서 떠드는 허풍진 소리가 아니야

앞에 괄호를 그리고 그 안에

그렇기에 너와 나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같은걸 떠올려보는거지

타임라인을 흐르는 이야기들

영화로 문학으로 전시로 빚어지는 이야기들을 눈으로 만지는 일이

퍽 우울하고 슬프다. 참 아무것도 하기 싫게 한다. 그러다가 생각했다.

거룩하고 아름답게 살자.

Sep 20, 2015

아무리 쫓기고 피곤하고 힘겨워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면 다시 즐거워진다.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까지 든다.

내가 이걸 얼마나 사랑하는가 생각해보면 그렇게 다시 어디선가 힘이 또 난다.

엄청난 스케줄을 앞두고 오늘 아주 멀리 다녀와야했는데

기차에서 뜬금없이 "아빠 그래도 미술 하는 거 진짜좋다.

내가 하는 것도 재밌고 다른사람 하는 거 보는 것도 재밌어. 진짜 좋아.

이걸 공부하고 있다니 진짜 감사해" 라고 말했다.

그렇게 말할 수 있었다.

Sep 17, 2015

떨지 않고 마른 혀로 정확하게 말할 것.


장식들을 다 떼어버릴 것.


일을 시작하고 마치기까지 다른 것을 입 속에 가져오지 않을 것.

Sep 15, 2015

2 COR 6:16-18


What agreement is there between the temple of God and idols?
For we are the temple the living God. As God has said:

" I will live with them
and walk among them,
and I will be their God,
and they will be my people."

Therefore,
 "come out from them and be separate, says the Lord.
 Touch no unclean thing, and I will receive you."

And,
 " I will be a Father to you,
 and you will be my sons and daughters,
 says the Lord Almighty."

Therefore, since we have these promises, dear friends,
let us purify ourselves from everything that contaminates body and spirit, perfecting holiness out of reverence for God.


2 COR 6:10



...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Sorrowful, yet always rejoicing;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poor, yet making many rich;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having nothing, and yet possessing everything.



Aug 31, 2015

단기선교 마지막날 밤 쓰는 감격

이렇게 지나간 순간들을 하나하나 그리고 있자니 눈물이 난다.

태국에 와서 나는 행복이 무엇인지 느끼고 있다.

이건 정말 심장이 뛰는 일이다. 흥분되어 가만히 얌전하게 앉아있기 힘든 기분이다.

와 정말 대단하다 그렇게 힘든 일을 하다니, 왜 그런 걸 하러 가는거냐

라는 말을 출발하기 전에 아주 여러 번 들었었지만

사실 나는 이곳에 와서 모든 것이 훨씬 순탄하고, 큰 그림안에 놓여 있음을 확실하게 느낀다.

인생에서 뭔가가 확실하다는 느낌을 갖는 게 과연 얼마나 될까?

사람들 속에서 나의 위치와 정체성에 대해서 정확하고 분명한 안정감을 갖는 게 얼마나 될까?

분명 나는 수많은 사람들의 기도로 안전 속에 이런 것을 경험하고 있을 것이다.

이곳에서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

더 사랑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 사이에 있다.

선교지에서 선교사로서 사랑을 실천한다는 것이 사실 떠나기 전에는

아무리 상상해도 그리스도를 전한다는 목적성을 띈 종교적이고 교조적인 행위로만 그려졌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깨닫는 것은 정말이지 요일 5:12, 16 말씀과 같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No one has ever seen God;

but if we love one another, God lives in us

and his love is made complete in us."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And so we know and rely on the love God has for us.

God is love.

Whoever lives in love lives in God, and God in them."



서로를 사랑하는 삶 그 자체로

우리가 한번도 보지 못한 하나님을

우리는 누리고 경험하고 표현할 수 있다.

맞물린 순환구조라기보다 통합된 커다란 세계인 것 같다.

세상에서 말하는 사랑, 우리 생각과 힘으로 할 수 있는 사랑과는 다르게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은 섬김이라서, 나를 내려놓고 너를 먼저로 세워주는 것이라서

사실 이곳에서의 생활 역시 한국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제법 반가울 만큼

돌아보기조차 싫게 느껴지는 피로와 답답함으로 가득찬 순간들도 있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 일들을 나혼자 하는게 아니라

내가 상상할 수 없었던 사랑으로 하나님께서 매순간 이끌어주시고 할 수 있도록 하신다.

그리고 내가 주는 사랑보다 더한 사랑을 받게끔까지 하신다.

내가 맘먹고 모든 걸 다 내다버리려고 하면 하나님은 거꾸로 엄청나게 채워주신다.


사랑이라는 두글자로 적기에

정말이지 내가 여기서 보고 듣고 경험한 것들은 너무 깊고 넓다.

한국에선 고층 아파트들로 가려졌던 하늘이 얼마나 커다란지 이곳에서 처음 느꼈던 것처럼

한국에서의 일상, 그 치밀하게 바쁜 스케줄들 사이로 보이지 않았던 선한 길 선한 마음밭

그 경계없는 사랑

그런 걸 여기서 깨닫는다.


우리가 이미 가진 것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한 사람 한 사람이 얼마나 빛나게 예쁘고 귀한지

각 사람의 인생이 뭘 가졌고 어떤 경험으로 빚어졌는지와는 상관없이 얼마나 중한지

특별히 나에게는 눈으로 들어오는 각 장면 각 이미지들을 통해

그냥 애쓰지않아도 눈물이 날 만큼 많이 보여주셨다.

실제로 매일 나는 여러가지 일들을 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고 나는 고백하게 된다.

하나님이 보여주시고 계획하신대로 그냥 그렇게 따르는 매일에

편안함과 만족함이 있었다.

진짜 좋았다. 좋다.

미리 기도했던 모든 것을 빠짐없이 이루어주시는 하나님이시다.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사랑이신 하나님

그리고 사랑하는 하나님

이곳에서 경험한 풍성한 사랑을 한국에가서 잃어버리지 않도록 나를 붙들어 주세요

나를 위한 계획들과 열심으로 여기서 받은 새로운 큰 그림들을 흩어버리지 않도록 도와주세요

나는 내 멋대로 하나님으로부터 도망가기 일쑤란걸 내가 알고 하나님이 아십니다

계속 기도하고 행할 수 있도록, run to win 할 수 있게 해주세요.

사랑합니다! 태국을 축복해주세요.

Aug 3, 2015

태국가기전, d-7

1.

Do you not know that your bodies are temples of the Holy Spirit,
who is in you, whom you have received from God?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You are not your own.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you were bought at a price.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Therefore honor God with your bodies.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전 6:19-20



수십년을 다니던 '교회 생활' 중에
2012년 어느 날 성경을 읽다가
드디어 처음으로 인격적이신 하나님을 만났던 날
나는 이 부분을 읽고 있었다.

눈과 귀를 스치는 문자와 소리로서만 내 주변에 떠다니시던 하나님이
이 말씀으로 마음과 생각 중앙을 강타하고 꿰뚫으셨다.
아기 때부터 교회를 다녔으니 나는 여러가지 성경 말씀을 숱하게 들으며 자랐다.
그런데 내 인생에서 가장 인상적인(나는 무엇이든 가장the most을 꼽는 일을 매우 어려워하는 편이다) 말씀이 있다면 이것이라 할 수 있겠다. '내가 처음 하나님을 만났던 순간'에 대한 기억이 이곳에 있는 것은 제법 분명한 것같다.

어떤 신기한 일들을 통해 하나님을 만났다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는 그냥 앉아서 성경을 읽고 있었고,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났다'. 확신했다.







2.

말씀 앞 부분에는 음행Sexual immorality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Flee from sexual immorality.

음행을 피하라


 All other sins a person commits are outside the body, but whoever sins sexually, sins against their own body.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 죄를 범하느니라"


'젊으니까, 청년이라서, 이 시기에는 그럴수도있는, 다들 그렇게 하니까'
라며 사람들은 다양한 정도로 자기 몸을 함부로 쓴다. 그렇게 하는게 맞다고 해준다. (갈수록 그런 동의와 긍정이 격렬해지는 것 같다.) 관계를 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뭔가 모자란 사람들처럼 여겨지고, 기회를 쓰지 못하는 한심이들로 말해질 때가 있다. 아니면 이런 게 사랑받지 못한 기분을 느끼게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나는 당시에 이 문제로 심하게 아팠다. 어쩔 줄 몰랐다.

이 때 위 말씀을 잘 읽어보면
창조주-그러니까 인간을, 나 그리고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얼마나 자기가 지으신 사람들 한 명 한 명을 소중히 여기시는지가 느껴진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위해 사람들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 자체가 인간이 하나님께 영광돌릴 수 있는 방식인데,
놀라운 건 그렇게 할 때에 인간이 가장 큰 기쁨, 세상에선 알 수 없는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지으셨단 거다.
받은 자유의지를 스스로 하나님께 나를 맡기기로 선택하는 데 쓰는 일은
결국 하나님과 개인 모두에게 기쁨을 준다.

거꾸로 하나님의 선한 의도와는 상관없는 방식으로 살때
사람들은 여러가지 다양한 차원의 고통을 받는다. 그게 죄고, 그게 죄인의 삶, 죄인인 우리가 일상에서 겪는 대부분의 일들의 모습일 것이다. 충만하기보단 뭔가 결여되어 있는 기분이 익숙한.


"나는 너를 그런 일들을 위해 짓지 않았어.

너는 그런 일들에 연연할 필요가 없는, 훨씬 가치있고 귀한 존재야.


너의 잘못된 선택들과 고통을 해결하려

너를 대신해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았었단다. 그 피 값으로 너를 샀어.


기억해. 너는 나의 것이다."







3.

내 인생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는 말씀은

그분이 얼마나 선하고 믿음직한 분이시라는 걸 알기에

매일 정해야하는 여러가지 선택지들과 그에 따른 예측불허의 결과들로부터

매일 나를 자유롭게 해준다.

말씀으로 처음 하나님을 만났던 그 날처럼!


Aug 1, 2015

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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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l 31, 2015

변방연극제 십오원오십전 중


살아있기 그리고 생각하기로서의 현대미술
유병서
보통 예술이라고 하면 일상생활에 영향을 주거나, 일상생활에서 영감을 받거나 하는 식으로 일상과는 약간 빗겨나 있는 것처럼 느껴지고, 따라서 일상 자체에서 발생하는 예술은 예술이 아니거나, 예술계 안에서의 발생하는 일상생활은 중요하지 않게 취급받거나 혹은 무시당하게 된다.
예를 들어 예술인 복지가 그러한데 현실과 동떨어진 예술과 이러한 배경에서 탄생한 예술가의 인상은 복지라는 일상적인 이슈와 만나 다소 초현실적이며 기이한 모습으로 다가 오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많은 예술가들이 정확히 노동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노동에 준하는 무언가를 행하고 있고, 때론 이런 행위를 통해 무언가를 바라기도 한다. 하지만 예술가의 창작은 그 가치를 매길 수 없는 어떤 미궁의 지점이 있고 바로 이러한 지점 때문에 예술가는 역설적으로 자신의 행위를 통해 피해를 받는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인, 역시도 기이한 모습으로 존재하게 된다.
과거 예술은 현실과 동떨어진 것으로 별개의 시공간에서 존재하는 독립적인 어떤 것으로 인지되었고 작가들도 으레 그러한 존재인 것으로 대접받거나 또는 희생되어 왔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지금/여기의 시간 속에서 예술, 특히 현대미술은 일상 속으로 훨씬 더 깊숙이 침투해 들어오게 된 듯 하다. 소위 ‘관계적미학’이라 불리는 수행적인 작업들 중 일부는 일상행위와의 변별점을 도저히 식별할 수 없는 것들도 있다. 갤러리에서 요리를 한다거나(티라바니자) , 거리에서 청소를 한다거나(하이레드 센터) , 쥐를 잡아 다시 풀어준다거나(침폼) 하는 일상적인 행위들은 현대미술의 역사에서 기념비적인,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는 것이다.
한편 현대미술의 맥락에서 일상적인 예술이 좋은 것이며, 예술적으로 훌륭한 작품은 일상적인 것은 분명하나, 모든 일상이 예술이되고, 모든 예술이 예술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현실적으로 의미있는 작품들이 있지만 이 작품들이 전시장을 떠나 일상으로 들어오는 순간 그러한 오브제/작품들은 대부분은 가장 중요한 기능을 잃는다. 또한 일상적인 행위, 예를들어 요리를 하거나 독서를 하거나 하는 행위들도 의미있는 일상행위이지만 이러한 일상이 모두 예술작업이나 작품이 되는 것은 아니다. 즉 일상과 예술은 전에 유례없이 가까워 졌지만 예술과 일상을 분별해 가치판단을 하는 일은 훨씬 더 어려워 졌다. 이른바 혼란은 더 가중된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현대미술이 가지는 특유히 어려움과 이해불가의 속성의 원인은 바로 예술-일상간의 거리가 유래없이 가까워져 마침내 그 간극을 잃어 버렸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결국 예술은 일상과 분리되어 있지 않은, 마치 색이 다른 두 개의 고무찰흙이 다소 엉성하고 기계적으로 한데 뭉쳐 있는 모습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데, 여기서 작가들, 특히 현대미술가들의 작가가 소임은 이 두 개의 색이 다른 찰흙을 어떻게 창의적으로 해결할 것인지에 관한 문제와 비슷하다. 예를 들어 예술인과 복지라는 프레임은 예술인을 수혜자로 또 현실이라는 가해자에 의해 엉망진창이 된 피해자라는 수동적인 입장보다, 좀 더 현실적 여건을 냉청하게 분석해 여기에 임하는, 적극적 의미의 집행자로 설정해야 한다는 것이 작가로서, 내 본인의 생각이다.
즉 현대미술가로서 좋은 작품을 만들고, 좋은 작업을 전개하는 등의, 내 작가로서의 관심과 소명은 결국, 어떻게 잘 놀고, 어떻게 잘 먹을 것인지에 대한 관심과 일맥상통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좋은 현대미술이란 즉, 잘 놀고 잘 먹는 것이다. 잘 놀고 잘 먹으면 그것은 좋은 현대미술이 된다.
물론 잘 놀고 잘 먹는 것을 현대미술화 하는데에는 어려움이 따른다. 하지만 여기에는 아주 위태로운 상태로, 의미의 우주, 예술계 와 이어진 가늘고 좁은 길이 존재한다. 이 길을 따라 위태롭지만 흥미로운 여정을, 당분간 전개해 볼 생각이다. (유병서)



http://mtfestival.org/2015/portfolio/program09/


REF--------------------------------------------------------------




티라바니자





하이레드센터, «수도권청소정리촉진운동(깨끗이!)»

http://chungwoo.egloos.com/m/4001854




일상의집, 일현미술관

인간에게 있어 집은 외부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고 지켜낼 수 있는 공간이자 삶의 안식처로, 집이 거주공간의 개념을 넘어 삶의 일부분으로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인지하고 있는 사실일 것이다. 집의 개념은 사회적 변화와 요구에 따라 그 구성원과 거주 형태가 변화되어갈 뿐 우리는 언제나 "집"에서 따뜻함, 안정감 그리고 꿈을 찾고자 한다. ● 오늘날 우리에게 집이란 어떤 의미일까? 최근 많은 사람들은 거주 장소인 집을 소유하고자 많은 노력과 돈을 투자하며 개인의 상당시간을 이에 소비하고 있다. 이러한 사회 현상에 따라 몇몇은 집의 근본적 의미와 존재가치가 퇴색되어가고 있다며 비판하고 있지만, 이 또한 인간이 꿈꾸는 집의 안정감을 소유하려는 욕망이 다른 방식으로 표출된 사례일 뿐 그들이 "집"에서 얻고자 하는 근본적인 것은 이전과 다름없다. 집의 의미가 부정적으로 변모했다고 단정 짓기보다는 집의 의미가 왜 이렇게 변했는지를 생각해보고, 이러한 현상 또한 집의 또 다른 이면이자 본질임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 일상과 집은 익숙하다는 단어조차 무색할 만큼 우리 주변에 언제나 존재해왔다. 이번 전시에서는 우리에게 자리 잡은 '의식적인 집의 이미지'와 일상생활 속에 마주했던 '무의식 속 집'의 이미지를 살펴보고, 미래에 우리 머릿속에 기억될 지금의 집과 이를 받아들이는 우리의 모습, 그리고 이를 통해 새로운 집의 의미를 유추해보고자 한다. ■ 일현미술관



곽이브_평면상태 연구_'배산임수-곧게'에 우드락_가변설치_2014
나는 사람들이 만든 건축, 환경에 반응하는 사람들, 건축 환경이 대변하는 것에 관심을 갖는다. 주로 내가 경험하고 속한 도시의 공간, 건물이 소재가 된다. 이들은 나를 둘러싼 일상적인-일상적이지 않은, 당연한-당연하지 않은 환경이다. ● 모든 것에는 양면성이 있듯이 빽빽한 건물의 강압적 규칙과 비자연적 물질에 지치곤 하지만, 시멘트벽으로 만들어진 텅 빈 공간에서 더할 나위 없는 고요의 기쁨을 느끼기도 한다. 주거를 위해 '사는 곳'이 경제적 금전 가치로 '사는 것'이 된 현상을 비판하다가, 풍족하게 살아내기 위한 그러한 갈망이 생을 위한 열망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기도 한다. 이렇게 양가성과 모순의 생리를, 그리고 희망에 대한 부지런한 갈망을 건축 환경에서 보게 된다. 이러한 현실의 모습을 형태와 무게 등 촉각 할 수 있는 물리적 요소들과 관련 지어 작업하는데, 여기에서 행해지는 건축적 조형방식은 삶의 방식을 은유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 곽이브



이민경_붉은집_아카이벌 잉크젯 프린트_72×100cm_2012
나의 장소들은 대부분이 비워져 있거나 혹은 불필요한 것들이 자리하지 않은 상태로 보여진다. 영어로 장소 place란 단어는 '장소, 공간'이라는 명사와 '위치하다'라는 동사의 의미 둘 다를 내포하고 있다. 장소라는 단어자체가 이미 움직이며 장소에 위치하기 위한 동작도 포함하는 것은 상황에 의해 장소가 정해지거나, 혹은 그 반대의 상황이 자주 연출되는 이 시대의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의 현실을 아이러니하게 반영하고 있다. 스쳐 지나갔음직한 낯익고도 현실적인 장소들은 작업 과정 가운데 재생되면서 낯설고도 비현실적인 장소로 전이된다. 장소는 그것이 담고 있는 현대인의 모습을 반영하며, 장소와 장소를 옮겨 다니면서 살고 있는 '그'는 이방인(alien, foreigner)이다. ● 공간이 미니어처로 재현되는 과정에서 인식을 거친 공간은 재창조를 통해 좀 더 단순하고 간단해진다. 공간의 소유주가 남긴 구체적인 삶의 흔적은 지워지고 공간이 가진 가장 본연의 단순한 형태, 그러나 구조적으로는 가장 가깝게 재현된다. 공간은 특정한 문화나 정치적인 메시지의 전달 없이 인간 삶을 담는 뼈대로서의 역할만 감당하게 되는 것이다. ■ 이민경

최성임_세계 앞의 집-예술가의 방_나무합판, 각설탕, 핫글루_가변설치_2015
내가 만든 집은 축적된 세월의 의미와 형태의 견고함을 걷어내고 위태로움과 연약함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내부와 외부의 경계에 서 있다. 삶과 죽음, 작품과 태도, 일상이라는 두꺼운 표피와 그 안에 숨은 예술이라는 경계에서 집으로 은유되는 연결고리를 만들고자 했다. 하얀 각설탕은 환희, 욕망, 에너지를 가진 삶의 내재된 덩어리로, 지금은 숨겨져 있지만 나중에 드러나며 또 남겨질 하얀 접착제는 삶의 다층적인 표면으로 비유하였다. 그 두 가지 재료는 삶과 죽음, 사라지는 것과 남아있는 것으로 서로 대비되면서 또 그 의미를 전환시키기도 한다. ● 작품 '집' 시리즈는 각설탕으로 만들어진 조형물이다. 에너지원 물질, 순백색의 달콤한 유혹의 감각적인 느낌, 흩어지고 바스러지기 쉬운 가루를 뭉쳐놓은 각설탕이라는 재료적 특성을 집 이미지와 연결시켰다. 그리고 작은 덩어리를 하나하나 쌓아 올리는 과정 자체에 의미가 있다. 무언가를 기원하며 쌓아 올린 작은 소원 탑 같기도 하다. 한편으로 바스러지기 쉬운 설탕의 느낌으로 인해 금방 사라질 것 같은 느낌이다. 우리의 삶과 같이 쌓으면서 채우지만 결국은 비워지는 것과 닿아 있다. ■ 최성임



 _https://neolook.com/archives/20150728c

Jul 29, 2015

5



1
험하게 헤어졌던 S를 몇년만에 만났다. 그동안 미안했던 마음 그래서 연락 먼저 해보고픈 마음이 있었는데 그러질 못했다. 두 다리 건너서 아주 미미한 소식만 듣곤 했다. 그런데 예상치못하게 밥먹던 식탁에서 만나고 말았다. 나는 우리가 좀더 준비된 상태에서 제대로 만나고 싶었는데, 내 경우 숟가락을 빨다가 재회한 것이다.
어쨌든 S는 눈빛이 그대로였다. 
아 지금 생각하니 그건 참 퍽 고마운 일이다.
많은 친구들이 변하고 있다.


2
몰랐다. Y가 나에게 해주는 말들은 이정도로 누구에게나 들려주는 것들이 아니었다. Y의 가까운 친구 N은 내가 알고 있는 Y의 최근 이야기들을 모르고 있다고 Y가 작게 일러줬다.
Y는 특히 허공을 보며 운전할때, 그렇게 Y하고 나하고 두 목소리들만 공간에 있게 될 때 (뭐 그러지 않아도 Y는 항상 진솔하지만) 마음 끝자락에 모셔뒀던 쓸쓸한 말들을 꺼내는 것 같다:
외롭다
아직도 생각하며 혼자 운다
그 사람과 나를 비교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고 나는 자꾸만 작아진다
"네 맘 너무 알것같아"


3
내가 변하는 걸까
H가 하는 이야기들은 항상 재미있었는데 요즘은 영 듣기가 귀찮다. 의식하지 못한 새에 나는 이미 듣고 있다는 듯한 리액션을 헐렁하게 해보이고 아무것도 듣지 않게 된다. 미안하다.


4
K를 기다리는 듯한 기분을 자꾸 느낀다.
맘같아선 찾아가 만나고 싶다.
사실 만나도 K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아니 할 수 있는 건지 전혀 모른다. 모르겠다. 암만 생각해봐도 아무것도 생각이 안난다. 실은 안하고 싶은 걸지도 모른다.
오히려 가만히 끌어안아보고싶다.


5
아 참 Y가 아까 내가 고심하고 있는 부분에 대해서 그건 너의 성향인거 아니냐고, 그냥 인정하면 되는 부분이지 않느냐, 나는 너가 예리하게 헤쳐나가는 것 같아서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라고 말해줬다. 고마웠다. 힘이 났다.


6
그러고 보니 오늘은 W도 만났다. 군대 다녀와서 처음 본 거니 진짜 오랜만에 본 것이다. 머리를 또 엄청나게 길러서 완전히 올빽머리를 하고 묶고 있었다. 얇은 안경테를 쓰고 구부정하게 삐딱한 남자걸음으로 두툼한 샌들을 바닥에서 떼었다. 든든하게 악수를 했다. 몇시까지 여기 있을거냐고 묻고서 할일을 하러 가버렸다.

7
N이 쓰는 필름 카메라가 항상 궁금했는데 오늘 실물을 보았다. 노출계 부분이 엄청 복잡하게 생겼다. 어쩌다 한컷 찍어주기까지함.
N은 오늘 날 만난다고 고3때 나를 따라 샀었던 keep브랜드 신발을 신고 나왔다고 했다. 레드립이 귀여운 N





Jul 28, 2015

4

고린도전서 1장 [NIV]
20  Where is the wise man? Where is the scholar? Where is the philosopher of this age? Has not God made foolish the wisdom of the world? 

21  For since in the wisdom of God the world through its wisdom did not know him, God was pleased through the foolishness of what was preached to save those who believe. 

22  Jews demand miraculous signs and Greeks look for wisdom, 

23  but we preach Christ crucified: a stumbling block to Jews and foolishness to Gentiles, 

24  but to those whom God has called, both Jews and Greeks, Christ the power of God and the wisdom of God. 



27  But God chose the foolish things of the world to shame the wise; God chose the weak things of the world to shame the strong. 

28  He chose the lowly things of this world and the despised things -- and the things that are not -- to nullify the things that are, 

29  so that no one may boast before him




불안의 꼭지점 위에 서있을 때에
나는 가장 우울한 것들을 생각한다
막연하게 그러나 동시에 내딴엔 현실적으로도
불가능할 것만 같다구 진짜

안될 것 같고 못할 것같은,
이미 늦었고 반쪽만 가능해보이는 데
그치만 정말 바라고 있는 일들에 대하여.
나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다르다
이거는 내가 틀렸다고 한다
하나님은 내가 알고 믿는것보다 대단히 풍성하시다고

하나님 저는 못해요 못하겠으니까
하나님이 알아서 책임져주세요

감사는 커녕 오늘도 문제 붙잡고 우는 소리만 낸다

Jul 27, 2015

3

그래 맞다

요즘의 난 힘내서 애쓰기가 싫어졌다.

내가 여기서 좀만 더 참으면 
상대방에게 ~ 도움될거야
상대방이 편안해질거야

라는 내 판단들이 부담스러워졌다.



내가 할 수 없는 일들을 생각해서라기보다
(그래서 포기 내지는 "안해" 라기보다)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들이 무엇인가
사실 내게 편안한 일들은 무엇인가 싶은거다.

똑같이 두 눈 두 팔 두 다리 한 입을 가졌다.

나도 나의 역사가 있다.


Jul 25, 2015

2

축축한 하루

작업 얘기를 하다가

지속성과 헌신도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다.

-왜 나는 지속성을 갖지 못하는가?
헌신도가 너무 낮은 게 문제이다-

친구와 헤어지기 직전에는 거의 풀 죽은 강아지 같은 기분이 되었다

버스정류장 떨어지는 빗방울들을 보면서 잠깐

기도를 했다

해야했다



사실 고민과 질문안에는 이미 답이 있다

지속성을 가지면 되고 헌신도를 높이면 된다.

예술가로서의 나를 증명하려고 무언가를 한다기보다

제대로 플레이어 좌석에 앉는게 필요하다

놀이 놀이

Jul 24, 2015

1

에어컨 앞에 선풍기 소리를 듣고 있다

피곤해서 눈은 침침해져있다

정리하기로한 자료는 아직도 중복되어 넘치고 스테이트먼트는 들여다보고싶지않아서

그런 내모습에 약간 실망중


배워야했을 그리고 써먹고 있어야 했을 언어를 나이가 들어서도 혼자 깨우치지 못한 것같은 기분 조금

고집 센 할아버지가 되어 너무 후대까지 살아남아 있는 기분도 조금

아니 어쩌면 실은 이제 막 태어나서 발가벗겨진 채로 바닥에 누워있는 건가 좀 오래 누워있는듯한데


그렇지만 이 일을 이 곳을 사랑하고 있다

암만 생각해도 다른 길 별로 생각지도 않는 이윤 여기를 사랑하기 때문인 것 같다

이만큼 막연할수도 명쾌할수도 없다


그렇담 있잖아

내 작은 옹알이 이 어물거리는 발화  몹쓸 소리말이야

누군가들에게는 귀기울이게되는 무언가가 될 수 있을까?

잠깐 서서 들어봐야겠다 하는 선택을 하게끔 만드는 뭔가가 될 수 있을까?

그게 뭔진 다 모르겠었는데 그래도 오래토록 마음에 남는 뭔가가 될 수 있을까?

말로 뭐라 해야할진 모르겠는데 먼저 꿍 가닿는 그런

어차피 모든 것 디테일하게 전달하고픈 욕심도 없고 그럴 수도 없다고 생각한다

코어만 틀리지 않는다면 그정도로만이라도 보여줄 수 있다면

생각이 참으로 한결같다.


작은 호흡을 여러번 무리없이 쉬고 싶은데

나는 자꾸만 숨을 굶긴다 굶기게 된다 숨쉬기를 어떻게 배운것일까 누구한테 왜


그러고보니

이제는 옛날이라고 말하는 얼마전까지만해도

내 글쓰기에는 온통 너라고 부르는 대상이 존재했었으나

이제는 그렇지 않다는 걸 새삼 느낀다

두 발을 한줄로 모아서 앞으로 걷는 걸음만큼이나 생소하면서도

떼는 것 붙이는 것 모두 내 발이라는 거 아니까 그건 여전하니까

이렇게도 걸을 줄 아는 사람이었구나 나는 하며

뭐 그렇게 살고 있다


그리고 얼마 뒤 나는 아주 멋진 사람에게서 모양이 없는 고백을 받았다

집 동네를 오가는 광역버스를 탈때마다 진심이 짓는다 라는 그럴싸한 카피라이트를 보곤 하는데

눈물을 흘린다



집전화기가 아주 얇은 바람에 흔들려서 그 접촉단자가 떼었다 붙었다 한다

그에 따라 삐룩 삐룩 소리를 내고

옆에 잠든 오빠의 콧숨 소리가 함께 들린다

늙은 개가 잠꼬대 속에 꾸룩 꾸룩 낑낑댄다


내일은 머리를 바짝 질끈 높이 묶고 서울로 나갈 것이다.

Jul 23, 2015

2013년 1월 캄보디아에 다녀와서 썼던 짧은 글.


Love Cambodia! _채아람

우선 이 캄보디아 단기선교의 모든 것을 주관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수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벽화봉사에 초점을 맞추어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사실 저는 중고등부가 단기선교를 떠난다는 이야기를 들은지 한참 되었을 때에도 그래 너희는 가는구나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작년 선교한국대회를 다녀와 선교에 대한 마음이 막연하게나마 커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저는 중고등부 교사도 아니었고 딱히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곧 장로님을 통해 벽화봉사 총괄자로서 이 일에 함께 하자라는 제안을 받게 되었고 그에 순종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아무것도 준비된 것이 없었습니다. 아버지 허락, 재정, 벽화팀 리더로서의 경험, 현지 정보, 벽화 봉사 참여인원, 할당시간 등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 출국 전날까지 제대로 알거나 확정된 것이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매주 토요일 아이들과 기도회를 가지면서도 내가 정말 갈 수 있기는 한 것인가 의문이 들었고, 특히 마지막 한 주 동안은 ‘하나님 일인데 이런 식으로 대충 준비해서야 되겠느냐’는 생각에서 불거진 막중한 책임감과 걱정으로 며칠 밤 뜬 눈으로 지새우기도 했습니다.

 떠나기 전에 벽화 도안을 완성해놓아야 했지만 마지막 주까지도 아무것도 그릴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극심한 스트레스 속에서 포기하다시피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았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깨달음을 주셨습니다. ‘아람아, 선교를 떠나는 건 너지만 선교를 하는 것은 나란다. 이것은 나의 일들이야. 내가 다 알고 있어. 내가 다 할 거란다!’
 하나님께 회개하고 위로와 지혜를 구하자 비로소 도안을 그릴 수 있었습니다. 복음을 내용으로 하는 도안이 완성되자,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임을 강하게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수없이 조정되던 계획 끝에 결국 함께 떠난 선교팀 중에 벽화팀으로 할당된 인원은 저와 선교사 집사님 둘 뿐이었습니다. 사역을 하는 3일 동안 전원교회 선교팀과 완전히 분리되어 다른 지역에서 숙소까지 옮겨 현지 사람들과 종일 작업을 하게 되었기에 여러 불안과 떨림을 느끼기도 했지만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믿음 하나로 나아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놀랍게도 하나님은 이미 모든 것을 준비해두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약함을 하나님의 전능하심으로 채우시는 것을 크고 작은 순간 속에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팀에서 소외된 느낌을 받으며, 이렇게 된 거 노동자처럼 열심히 일이나 하고 와야겠다 생각하고 있던 저를 현지 사역자, 주민들은 한 명의 예술가로 너무나 귀하게 여겨주셨습니다. 그곳에는 기존에 미술 분야에서 일하셨던 단기선교사분도 계셔서 큰 힘이 되어주셨습니다. 재료비 역시 예산의 절반도 안되는 가격 내에서 해결할 수 있었고, 제 생각과 다른 상황들이 많이 있긴 했지만 시행착오 없이 일을 순탄히 진행시킬 수 있었습니다. 대낮에 햇빛을 피해야만 하는 시간적 제약이 있어 제 때 완성할 수 있을까 싶었지만 정확히 필요한 때에 구름이 드리워지는 등 신기한 자연현상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벽화 작업의 영향력은 제 생각보다 어마어마했습니다. 그저 시골동네에 그려진 벽화로 그칠 줄 알았던 이 그림으로 인하여 사역에 다소 지쳐계셨던 선교사님들은 감격하며 새 힘을 얻으셨고, 동네 현지인들에게는 이 일에 자연스럽고 기쁘게 참여함으로써 교회에 대한 막연한 거부감을 허물고 복음에 대해 쉽게 접할 수 있는 계기가 제공되었습니다. 벽화 작업을 보던 현지 교회 사람들 사이에는 우리도 함께 교회를 단장시키자는 분위기가 조성되어 온통 칠이 벗겨져있던 모든 내벽들을 새로 칠하고 경사로를 만드는 등의 왕성한 활동이 일어났습니다. 사역 마지막 날에는 함께 일해주신 단기선교사 언니가 이 그림에 참여하면서 경험한 하나님과의 긴밀한 교제를 편지에 담아 건네주기도 하였습니다.

 저는 이번 캄보디아 단기선교가 온전히 하나님 자신의 뜻을 위하여 지으신 아름다운 계획이었지만 동시에 저를 위한 매우 특별한 계획이었음을 분명하게 느끼고, 그렇게 믿습니다.

 제 꿈은 세계에서 활동하는 전문예술인인 동시에 선교사적 마인드를 가지고 이러한 활동에도 열심인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꿈인지 확신하기 힘든 부분들이 있었고, 실제적인 전공공부와 하나님 사이에 벌어진 간격을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서도 고민하고 있었죠. 그런 저를 하나님은 강권하여 이번 선교에 참여하게 하셨고, 선교기간동안 팀에서 떨어져서 소수로 활동하게 하게 하심으로 더욱 현지에 밀착된 다양한 체험을 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제가 저의 어떠함을 주장하고자 하는 마음, 제 삶을 직접 경영하고 싶어하는 욕심들을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착하고 선한 마음을 가질 때에, 제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이 주신 재능이 얼마나 귀하고 아름답게 쓰일 수 있는가 보여주셨습니다. 그렇게, 제가 꾸는 꿈에 대해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것을 실제적으로 응답해 주셨다고 믿습니다.

 준비 기간 동안, 선교 기간 동안, 그리고 다녀온 이후에도 하나님은 당신의 완전하심을 경험케 하시고 계속해서 꿈을 주십니다. 제 평생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하신 것, 청년의 때에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을 꿈꾸게 하시는 것, 실생활에서 정말로 당신의 능력을 보이시는 것-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제가 자랑할 것은 오직 복음밖에 없음을 알게 하신 주님!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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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와 선교사. 그 교집합의 정체성으로 살겠다는 마음이 변하지 않았다는 것과
두 개*의 다른 영역을 이렇게도 저렇게도 경험하며 2015년까지 살아오고 있다는 것

계절옷 호주머니에서 구겨진 천원을 발견하는 것 마냥
잊혀진 기억을 들췄을때 깨닫게 되는 감사가 있다.

곧 떠나는 태국에서는 어떤 것을 경험하게 될까.
두려움은 어떻게 감격으로 채워지게 될까. 준비할게 너무 많아서 벅차다는 생각도 들지만
사실 너무 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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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분법적인 사고를 견제하면서도 결국 '두 개'라고 이야기하게 되는 것은 그만큼 너무 다른,
그만큼 서로가 양립하기 힘든 태도를 요구하는 게 현재 사정인것같다.

Jul 22, 2015

7월 밤

강정석

















의미 없는 일, 정말 아무 쓸모 없는 일
처연함 비슷한 것과 웃겨서 웃는 웃음 사이에서
딱히 뭐라고 하기 애매한 감정들이
행위로서 선언 되었다가 그냥 그렇게 나타났다가..무너졌다가 한다.
보는데 어딘가 아프기도 하고
여전히 거창한 생각들을 두르고 살았구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Jul 20, 2015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Peace I leave with you;
my peace I give you.
I do not give to you as the world gives.
do not let your heart be troubled
and do not be afraid.

요한복음 John 14:27

Jul 3, 2015



They said to you,
"In the last times, there will be scoffers who will follow their own ungodly desires."
These are the people who divide you, who follow mere natural instincts and do not have the Spirit.
But you, dear friends, by building yourselves up in the most holy faith and praying in the Holy Spirit, keep yourselves in God's love as you wait for the mercy of our Lord Jesus Christ to bring you to eternal life.
Be merciful to those who doubt;

save others by snatching them from fire;

to others show mercy, mixed with fear
- hating even the clothing stained by corrupted flesh.

Jude 1:18-23











+


타임라인을 휘감은 무지개색 영상과 이미지들을 보면서
어쩐지 슬픔 비슷한 걸 느끼다 몇자 적는다.

요며칠 사이 수많은 페이스북 친구들이 무지개색으로 얼굴을 물들였다.
그 중엔 이성연애자들도 있고 동성연애자들도 있으며 
위 두가지 분류에 들지 않는 여러 성향의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모두 나와 소중한 시간을 보냈던 귀한 친구들이다.

동성애에 대하여 아무런 의견이 없는 것은 무지 혹은 비난을 피한 도망 중에 하나같다.
예전부터 누군가 나에게 이런거 어떻게 생각해?라고 물을때마다 떠올리는 생각은 늘 이런거였다.
요컨대 '하나님께서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 하셨어.'

성경이 동성애를 죄라고 말하고 있는 이상 현실에서 벌어지는 동성애 자체를 내가 옹호해줄 마음은 없다.
성경에서 가장 처음 한 남자와 한 여자 사이의 관계(더 나아가 결혼이라는 것까지)를 성사시킨 분이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서로 지극히, 정말 지극히 다른 존재들로 한 몸을 이루게 하길 기뻐하신 데에는 
우리가 쉽게 간과하는 이유와 질서들이 분명히 있다.


문제는 어쨌든 그것으로 현실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인 것인데.
비난과 냉대, 혐오하는 시선이 아닌
그 사람들을 / 편견 없이 / 진심으로 끌어안아주는 게 그리스도인의 할 일이라 생각한다.
얼싸안고 그냥 같이 울어주어야한다.

예수를 정말 믿고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꼭 동성애가 아니더라도

나 또한 얼마나 극한 죄인인지

'죄로 인해 고통받는 것'이

 얼마나 아프고

더럽게 힘든것인지를

더 잘 아는 사람들일테니까.


동성애를 인권의 문제로서 받아들이고 
그것이 사회 안에서 비난없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하는 데에 일조할 마음은 없는데
 사람들을 '끌어안겠다'라고 이야기하는 게 어쩌면 모순과 위선처럼 들릴 수 있을 것이다. 
삶으로 고통받는 이들에게는 정말 미안한 얘기다.

죄인들의 친구였지만 거룩하신 하나님을 따라 또한 거룩하게 살았던 예수의 삶을 생각해 볼때
하나님을 맘과 뜻과 목숨을 다해 사랑하라는 것,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 이 두가지는
분명히 양립가능한 것이고 삶의 다양한 층위 안에서 실천될 수 있다.

누군가의 언급을 통해 예수님이 이 때에 이 땅에 계셨다면 
퀴어 페스티벌에서 함께 사람들과 춤을 추며 시간을 보내셨을까를 생각해봤다.
하지만 아무래도 아닌것같다. 결코 아니다.
예수님은 즐거움이 떠나고 깊은 그림자가 드리워진 마음들과 함께 하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