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c 14,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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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기 때문에 나는 교실에서 정답이 아니라 낯선 질문, 이질적인 대답을 환영한다. 왜냐하면 이런 낯선 질문이야말로 들어보지 못한 새로운 말을 전해주고 새로운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점 때문에 몇몇 학생들은 어리둥절해하거나 불만을 터트리기도 한다. 뭔가를 정리해주지 않으면, '객관적'으로 요약 정리된 '보편타당한' 정답이 나타나지 않으면 불안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방인을 환대하지 않는 공동체는 성장할 수 없다. 정답만을 추구하는 공동체에서는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없다. 낯선 것들에 대한 환대를 통해 교실이라는 공동체는 쇄신된다. _243p

 누군가와 공감한다는 것은 그를 나의 장소에서 환대하는 행위이다. 그에게 나의 장소에서 살 수 있도록 허락하고 나의 장소를 그와 공유하며 '우리의 장소'로 만드는 것이 환대의 행위이다. 이 환대를 통하여 나는 그와 함께 '세계'를 만든다. 세계는 객관적으로 주어진 외부 환경이 아니다. 오히려 세계는 소통하고 경쟁하고 공감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만들어진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공감 능력이 활기에 차 있을 때 세계-내-존재로서 인간이 된다고 할 수 있다. ... 사람 사이에 있는 존재, 그리고 그 사이에서 스스로 인지상정이 있는 '인간'으로 되어가는(being) 존재, 그것이 인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라고 한다면 자신의 공감 능력이 활기를 띠고 살아 움직이게 해야 한다. 이렇게 본다면 인간의 공감능력은 완전체로 미리 주어지는 것이라기보다는 하나의 가능성으로서 확장되는 힘, 능력이라는 역동적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그렇게 모두를 환대하며 살아갈 수 있는가? 연쇄살인범이 공감 능력이 없다고 비난하는 우리의 공감 능력은 어디서 활성화되고 어디서 멈추는가? 우리는 공감 능력이라는 힘을 얼마나 역동적으로 작동시키고 있는가? 혹 우리의 공감 능력은 주어진 곳에서만 자동적으로 작동하고 멈추는 수동적인 것이지는 않은가? ... 인간 됨의 핵심이라고 하는 우리의 공감 능력은 어떤 분류표에서 멈추었다. 한 학생은 이것을 발견하고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이 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군요!"
 나는 이것이 수업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인간 됨이 쉽지 않음을 발견하는 것, 이보다 더 인문학적인 발견이 어디에 있겠는가. 내가 맞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리 맞지 않으며, 내가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리 쉽게 이야기할 수 없다는 발견(깨달음) 말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판단과 심판의 언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찰의 언어이다. _262, 263p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 엄기호 지음, 푸른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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