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ct 1, 2014

장소와 장소상실 Place and Placelessness, 에드워드 렐프, 논형

인간답다는 것은 의미있는 장소로 가득한 세상에서 산다는 것이다. 인간답다는 말은 곧 자신의 장소를 가지고 있으며 잘 알고 있다는 뜻이다.



 장소는 의미를 가진다. 장소는 인간의 믿음에 따라 규정된다. "지리학자들은 왜 장소가 인간 의식 속에서 하나의 사실적 사건이 되는가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장소에 대해 어떤 믿음을 가지는지를 이해하고자 한다...인간행위의 바탕에는 장소가 있으며, 인간 행위는 다시 장소에 특성을 부여하게 된다. _루커만,1964
그래서 루커만은 장소를 특정 위치에서 발달해 왔으며 현재도 발달하고 있는 자연과 문화의 복합적인 통합체로 보고, 이 장소들이 사람과 물자의 흐름을 통해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 장소란 단지 사물이 위치한 '어디'가 아니다. 장소는 위치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통합되어 있고 의미있는 현상으로 보이는, 위치를 점하는 모든 것이다.



그리고 알프레드 슈츠Alfred schultz는 "내가 살고 있는 장소는 지리적 개념으로서가 아니라 나의 집으로서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1967



 장소가 정말로 인간이 세계에 존재하는 데 근본적인 속성이라면, 또 개인이나 집단에게 있어 안정과 정체성의 원천이라면, 의미 있는 장소를 경험하고 창조하고 유지하는 방법을 잃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바로 이런 방법들이 사라지고 있고, 장소의 독특하고 다양한 경험과 정체성이 약화되는 현상, 즉 무장소성이 지금 지배적으로 되어가고 있는 징후들이 많다. 이런 경향은 실존의 지리적 토대에 상당한 변화가 발생했음을 보여준다. 변화란 장소에 깊이 뿌리내린 삶으로부터 뿌리뽑힌 삶으로의 변화이다.





...수잔 랑거는 건축에서의 장소 개념을 설명하면서 장소란 문화적으로 정의되는 것으로 지도학적 의미에서의 위치란 단지 장소의 부수적인 특성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 바 있다. "...자꾸 위치를 바꾸는 배라고 할지라도 그 배는 그 자체로 독립적인 장소이다. 집시나 인디언의 야영지, 서커스단의 야영지 역시 아무리 이 장소들이 측지학적인 특성을 자주 바꾼다할지라도, 그 자체로 독립적인 장소이다. 글자 그대로 보면, 야영지는 어떤 장소 안에 있다고 말하지만, 문화적인 의미에서 볼 때 야영지는 그 자체로 하나의 장소이다. 집시의 야영지가 비록 지리적으로는 인디언 야영지가 있었던 곳에 자리를 잡았다 할지라도 인디언의 야영지와는 다른 장소인 것이다."
 물론 이것은 어느 정도 예외적인 사례이다. 사실 대부분의 장소는 어딘가에 위치하고 있다. 하지만 위의 사례는 위치라는 것이 장소의 조건에 있어서 공통적인 것이긴 하지만, 필수 조건도 충분 조건도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이것은 상당히 중요하다. 이동성이나 유목이 장소에 대한 애착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브라질의 보로로Bororo족은 3년마다 자기 마을을 부수고 다른 곳에 다시 세우지만, 그들은 여전히 자기들이 살고 있는 장소에 강한 애착을 느낀다.Choay,1969. 마찬가지로 현대 사회에서 가장 자주 이동하는 단지 체류자들이 저절로 집도 없고, 장소도 갖지 못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매우 빨리 새로운 장소에 애착을 느끼게 될 수도 있다.



수잔 랑거는 다음과 같이 건축적 장소에 대한 논의를 이어간다.
"... 인간 생활의 흔적에 의하여 명확해진 '장소'는 생명체처럼 유기체로 보일 것이 틀림없다 ... 한 가옥이 지표면에 차지하는 장소, 말하자면 실제 공간상에서의 가옥의 위치는 그것이 불타거나, 파손되거나, 철거되어도 똑같은 장소로 남아있다 그러나 건축가가 창조해낸 장소는 일종의 환상이고 느낌이 가시적으로 표현되어 낳은 것으로, 때로는 '분위기atmosphere'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런 종류의 장소는 그 가옥이 파괴되면 사라져버린다..."

 장소가 경관으로 이해되고 경험되는 이유가, 시각적 특딩이 인간 활동의 모습을 가시적으로 보여 준다는 직접적이고도 분명한 의미에서이든, 아니면 인간의 가치와 의도를 반영한다는 다소 미묘한 의미에서이든 간에, 외관은 모든 장소들의 중요한 특성이다. 그러나 모든 장소 경험을 경관 경험으로 이해하기는 어렵다. 몇년 동안 떠나 있다가 돌아온 장소에 대해 예전의 친밀감을 다시 회복하는 것과, 외관상 중요한 변화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변했다고 느끼는 것에는 공통적인 느낌이 있다. 전에는 우리가 그 경관 안의 일부였지만, 지금은 아웃사이더이고 관찰자이다. 하지만 기억을 조금만 끄집어내어도 우리는 옛 장소의 의미를 다시 포착할 수 있다.




개인이나 문화에 의해 정의되는 장소들은 그 위치 활동 건물들이 의미를 가지고 또 잃어버리면서 성장 번영하고 쇠퇴하게 된다. 현재의 장소는 이전의 장소에서 성장하거나 과거의 장소를 대체하면서 그런 의미들의 진전이 있을 것이다. 마치 여리고가 이전 도시의 폐허 바로 위에 또 세워지고 또 세워지는 것처럼, 새로운 도시는 똑같은 장소이지만 동시에 이전의 장소와는 다르다. 몇몇 장소들은 죽었다. 그러므로 세계는 죽은 장소들의 유골로 가득하다. 스톤헨지나 카르낙, 아즈텍과 잉카의 폐허 도시, 유령도시, 버려진 농장 같은 곳들은 원래의 의미를 박탈 당하고, 관광객이나 행인들, 다른 외부인들에게 대수롭지 않은 구경거리가 되었다. 이처럼 사라져버리고 변화하는 것을 막아주는 것은, 장소가 영구적이라는 감성을 강화시키는 의식과 전통이다. 그런 의식은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잉글랜드의 몇몇지역에서는 해마다 교구 주위를 행진하며 '구역땅 두드리기'라는 행사를 열기도 하고, 로마의 루스라시오는 연례적인 구역 행진을 통해 농장이나 도시의 경계를 신성하게 했다. 이런 의식은 장소를 상징적으로 또 법적으로 재확인 하며, 동시에 장차 그 장소의 상속자가 될 어린 아이들에게도 그 경계를 알려주는데 기여한다. 이처럼 반복적인 전통행사를 통해 장소를 재확립하고 급격한 변화 속에서도 장소가 안정성과 계속성을 지니도록 한다.




특히 장소와 공동체의 관계는 경관에 표출되는데, 이런 의미에서 경관은 커뮤니케이션 매체로서 모든 경관 요소들이 메시지를 가질 수 있다. 즉, 건물, 거리, 퍼레이드, 마을축구팀 이 모든것은 공동체를 단결시킬 뿐만 아니라 공동체를 드러낸다. 따라서 공통적으로 경험하는 경관의 상징이나 메시지는 알도 반 에이크가 적절하게 이름붙인 "집단적으로 규정된 장소 의식"을 유지하는 데 기여한다. 그리고 이 장소 의식은 같은 장소 출신의 사람들에게 그 장소 자체가 지닌 본질적으로 동일한 정체성을 부여하며, 그 역도 성립한다. 로날드 블리드Ronald Blythe는 이스트 앵글리아의 아켄필드 마을에 대한 감수성있는 연구를 통해 이점을 지적하고 있다.
"자신이 태어난 장소에서 한번도 이주한 적이 없는 마을 주민은...자기 마을의 독특한 표시를 지니고 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다른 마을 사람에게 자신이 아켄필드 출신이라고 말한다면, 이 말속에는 그보다 훨씬 많은 의미를 단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는 당사자도 알고 있다. 즉, 그 말 속에는 자기의 외모에서부터 정치적 태도에 이르는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다."
간단히 말해, 사람은 곧 자신이 살고 있는 장소이고, 장소는 곧 그 곳에 살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개념적으로는 쉽게 분리될 수 있지만, 경험적으로는 쉽게 분리될 수 없다. 이런 맥락에서 장소는 '공적'이다. 장소는 상징과 의미를 공유하면서 경험을 함께하고 관련을 맺음으로써 창조되고 알려지기 때문이다.





(3-5 사적인 장소들)
공식적인 공공 장소와, 공동으로 경험하는 장소들은 장소 현상의 특별한 형태일 뿐이다. 공동 경험이 장소 이해에 중요한 요소임은 틀림없지만, 장소의 본질을 정의하기에는 충분치 못하다. 모든 장소와 경관은 개인적으로 경험된다. 우리의 태도, 경험, 의도하는 렌즈를 통해서, 그리고 우리만의 고유한 환경으로부터 장소와 경관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바로 이점에서 라이트는 "지구전체는 미지의 땅terra incognitae이라는 조각들을 모아놓은 거대한 잡동사니"라고 했다. 여기서 미지의 땅이란 사적인 개인들의 지리를 말한다. 이처럼 모든 경관에는 개인적인 색깔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경관이란 개별적인 동시에 공동의 맥락을 통해 경험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모두 개인이면서 동시에 사회의 일원이기 때문에 그렇다.
 확실히 이렇게 물리적으로 경계지어지고, 다른 사람들이 그 경계를 존중해주는 장소들은 우리 모두에게 중요하다. 이런 장소들은 우리의 개별성을 표현해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적인 장소들이 이처럼 직접적이고 분명할 필필요는 없다. 사실은 사적인 장소들에 대해 공통된 지식은 없을지도 모른다. 오히려 그런 장소들은 우리들에게 구체적이고 특별한 의미로 정의되고, 구체적으로 존재한다기 보다는 기억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특히, 유년기의 장소들은 많은 개인들에게 있어 아주 중요한 준거점이 된다. 실제로 그런 경험이 발생한 곳이 아니라 할지라도 특별한 개인적인 경험을 상기시키는 특정 위치나 환경도 그런 장소가 될 수 있다. 그래서 르네 듀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장소들이 불러 일으키는 것은 지리적 위치가 아니라 그 당시 나의 삶의 모습이기 때문에, 나는 장소의 정확한 특징보다 그 장소들의 분위기를 더 잘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격정적인 경험이든, 천천히 그리고 차분한 관계로 진전된 경험이든, 중요한 것은 이 장소가 당신만의 고유하고 사적인 곳이라는 느낌이다. 당신이 그 장소를 경험하는 것은 분명히 개인적이기 때문이다. 알베르 카뮈는 피렌테 보볼리 가든에서 바라본 전망 경험을 다음과 같이 썼다. "수 백만 개의 눈이 이 경관을 전망해 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내겐 그 경관이 하늘이 보여준 최초의 미소였다. 그것은 내 마음을 경관의 가장 심오한 의미속으로 데려갔다." 이는 문자 그대로 장소애topophilia', 즉 강렬하게 개인적이고 심오하게 의미있는 장소와의 만남이다.




(3-6 뿌리 뽑힘과 장소에 대한 관심)

장소를 공동체의 한사람으로 경험하든 개인적으로 경험하든 거기에는 보통 긴밀한 애착, 즉 친밀감이 생기는데, 친밀감은 특정 장소에서 여기를 알게 되고 알려지게 되는 과정의 일부이다. 우리가 장소에 내린 뿌리는 바로 이 애착으로 구성된 것이며, 이 애착이 포괄하고 있는 친밀감은 단지 장소에 대해 세부적인 것까지 알고 있는 것만이 아니라 그 장소에 대한 깊은 배려와 관심이다.
 장소에 애착을 갖게 되고 그 장소와 깊은 유대를 가진다는 것은 인간의 중요한 욕구이다. 시몬느 베이유Simone Weil는 <뿌리에의 욕망 the Need for Roots>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뿌리를 내린다는 것은 아마도 인간의 영혼에서 가장 중요하지만 가장 적게 인식되는 욕망이다. 그것은 가장 정의하기 어려운 것 중의 하나이다. 인간은 공동체 생활에 적극적이고 자연스럽게 참여함으로써 뿌리를 갖게 된다. 이를 통해 공동체의 특정한 생활 형태가 미래에도 계속 고수될 수 있다. 이러한 공동체에의 참여가 장소나 출생 조건, 직업, 사회적 환경에 의해 자동적으로 유발된다는 점에서, 그 참여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다양한 뿌리를 가질 필요가 있다. 인간은 자신이 일부를 이루는 환경을 통해서 도덕적, 지적, 정신적 삶 전체를 ㄹ영위해야만 한다."
...다음은 로버트 콜즈 Robert Coles가 뿌리를 상실한 미국 어린이들에 대한 연구에서 결론적으로 말하는 내용이다. "뿌리를 원하고, 뿌리를 필요로 하고, 뿌리-소속감-내것-네것-우리것으로 인식되는 어떤 장소를 쟁취하려는 것은 확실히 우리 본성의 일부분이다. 국가, 지역, 주, 군, 도시, 타운, 이모두는 정치, 지리, 역사와 관련이 있지만, 그 이상의 것이다. 그것들은 어떻든지 인간성, 곧 어딘가에 머물고자 하고 다른 사람들, 그리고 특정 환경이나 공간, 또는 근린, 일련의 상황이라도 불리는 것들을 알고자 하는 욕망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한 장소에 뿌리를 내린다는 것은 세상을 내다보는 안전지대를 가지는 것이며, 사물의 질서 속에서 자신의 입장을 확고하게 파악하는 것이며, 그리고 특정한 어딘가에 의미있는 정신적이고 심리적 애착을 가지는 것이다.
 우리가 가장 애착을 가진ㄴ 장소들은 글자 그대로 관심의 영역으로, 그 속에 우리의 복잡다단한 경험이 있으며 또 아주 복잡한 애정과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환경이다. 그러나 장소를 소중히 여긴다는 것은 과거의 어떤 경험과 미래에 대한 기대 떄문에 가지는 관심 이상이다. 즉, 장소는 자체의 특성과 그것이 당신괴 다른 사람들에게 주는 의미떄문에 장소에 대한 진정한 책임과 존경이 존재한다. 실제로 어떤 장소에 대한 전적인 관심, 사람이 할 수 있는 어느 것 못지 않은 심오한 관심이 거기에 있다. 소중히 한다는 것care-taing은 실제로 "인간이 세계와 맺는 관계의 기초"이기 떄문이다.
 그런 헌신과 책임에는 하이데거가 "아낌caring"이라고 부른 것도 포함된다. 즉, 아낌이란 사물 여기서는 장소를, 그것이 존재하는 방식그대로 두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장소의 본질 자체에 대한 관용이다. ...
 "사람이 자기 집을 샘 가까이, 바람을 막아주는 언덕 기슭에 남향으로 지을 때, 건축 방향을 가리켜 주는 것이 바로 땅이었다. 그리고 인간은 땅의 요구에 마음을 연 수용자였을 뿐이다. 지붕을 벽보다 훨씬 더 밖으로 내어서 매우 경사지게 얹은 것은, 눈보라 치는 겨울에 지붕위에 쌓일 눈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여기서도 기후라기보다는 하늘이 건축물의 구조를결정했다. 집 한구석을 차지한 기도처는 신에 대한 응답이며, 요람이나 관이 놓인 장소는 언젠가는 죽어야만 하는 인간의 운명을 나타냈다."
 '집'이 제대로 실현될 수 있는 것은 오직 이런 유형의 아낌과 배려를 통해서이며, 집을 갖는다는 것은 '거주한다'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이를 인간 실존의 본질이자 존재의 기본적인 특성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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