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ct 7, 2014

<피로사회>, 한병철, 문학과지성사 1


 지난 세기는 면역학적 시대였다. 즉 안과 밖, 친구와 적, 나와 남 사이에 뚜렷한 경계선이 그어진 시대였던 것이다. 냉전 역시 이러한 면역학적 도식을 따른다. 지난 세기의 면역학적 패러다임 자체가 철저하게 냉전의 어휘와 본질적으로 군사적인 장치의 영향 아래 놓여 있었다. 면역학적 행동의 본질은 공격과 방어이다. 생물학적 차원을 넘어서 사회적 차원에 이르기까지 전 사회를 장악한 이러한 면역학적 장치의 본질 속에는 어떤 맹목성이 있다. 낯선 것은 무조건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면역 방어의 대상은 타자성 자체이다. 아무런 적대적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은 타자도, 아무런 위험을 초래하지 않는 타자도 이질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제거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면역의 근본 특징은 부정성의 변증법이다. 면역학적 타자는 자아 속으로 침투하여 자아를 부정하려고 하는 부정 분자이다. 자아는 타자의 이러한 부정성으로 인해 파멸하는데, 이를 피하려면 자아 편에서 타자를 부정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자아의 면역학적 자기주장은 부정의 부정을 통해 관철되는 것이다. 자아는 타자의 부정성을 부정함으로써 타자 속에서 자기 자신을 확인한다. 면역학적 예방법, 즉 예방접종 역시 부정성의 변증법을 따른다. 이 경우 면역 반응을 촉발하기 위해 다만 타자의 파편만이 자아 속으로 투입된다. 그리하여 부정의 부정은 치명적 위험 없이 이루어진다. 면역 저항체계가 타자와 직접 대결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치명적일 수 있는 훨씬 더 큰 폭력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자발적으로 약간의 폭력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질성의 실종은 우리가 부정성이 많지 않은 시대를 살고 있음을 의미한다. 21세기의 신경성 질환들 역시 그 나름의 변증법을 따르고 있지만, 그것은 부정성의 변증법이 아니라 긍정성의 변증법이다. 그러한 질환은 긍정성의 과잉에서 비롯된 병리적 상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세계의 긍정화는 새로운 형태의 폭력을 낳는다. 새로운 폭력은 면역학적 타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 자체에 내재하는 것이며, 바로 그러한 내재적 성격으로 인해 면역 저항을 유발하지 않는 것이다.



 병원, 정신병자 수용소, 감옥, 병영, 공장으로 이루어진 푸코의 규율사회는 더 이상 오늘의 사회가 아니다. 규율사회는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고 그 자리에 완전히 다른 사회가 들어선 것이다. 그것은 피트니스 클럽, 오피스 빌딩, 은행, 공항, 쇼핑몰, 유전자 실험실로 이루어진 사회이다. 21세기의 사회는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 변모했다. 이 사회의 주민도 더 이상 "복종적주체"가 아니라 "성과주체"라고 불린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경영하는 기업가이다. 정상적인 것과 비정상적인 것을 갈라놓는 규율 기관들의 장벽은 이제 거의 고대의 유물처럼 느껴질 지경이다.

 규율사회는 부정성의 사회이다. 이러한 사회를 규정하는 것은 금지의 부정성이다. '~해서는 안된다'가 여기서는 지배적인 조동사가 된다. '~해야 한다'에도 어떤 부정성, 강제의 부정성이 깃들어 있다. 성과사회는 점점 더 부정성에서 벗어난다. 점증하는 탈규제의 경향이 부정성을 폐기하고 있다. 무한정한 '할 수 있음'이 성과사회의 긍정적 조동사이다. "예스 위 캔"이라는 복수형 긍정은 이러한 사회의 긍정적 성격을 정확하게 드러내준다. 이제 금지, 명령, 법률의 자리를 프로젝트, 이니셔티브, 모티베이션으 대신한다. 규율사회에서는 여전히 '노No'가 지배적이었다. 규율사회의 부정성은 광인과 범죄자를 낳는다. 반면 성과사회는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를 만들어낸다.


 알랭 에렝베르는 우울증을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의 이행기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규정한다. "우울증이라는 병은 권위적 강제와 금지를 통해 인간에게 사회 계급과 성별에 따른 역할을 부여하는 규율적 행위 조종의 모델이 만인에게 자기 주도적으로 될 것, 자기 자신이 될 것을 요구하는 새로운 규범으로 대체되는 순간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 우울한 자는 컨디션이 완전히 정상이 아니다. 그는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요구에 부응하려고 애쓰다가 지쳐버리고 만다."
...그에게 우울증은 자기자신이 되지 못한 후기근대적 인간의 좌절에 대한 병리학적 표현이다. 그러나 우울증을 초래하는 요인 가운데는 사회의 원자화와 파편화로 인한 인간적 유대의 결핍도 있다.


.. 긍정성의 과잉 상태에 아무 대책도 없이 무력하게 내던져져 있는 새로운 인간형은 그 어떤 주권도 지니지 못한다. 우울한 인간은 노동하는 동물로서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물론 타자의 강요없이 자발적으로 그는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이다. 강조적 의미의 자아 개념은 여전히 면역학적 범주다. 그러나 우울증은 모든 면역학적 도식 바깥에 있다. 우울증은 성과주체가 더 이상 할 수 있을 수 없을 때 발발한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일과 능력의 피로이다.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우울한 개인의 한탄은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에서만 가능한것이다. 더 이상 할 수 있을 수 없다는 의식은 파괴적 자책과 자학으로 이어진다. 성과주체는 자기 자신과 전쟁 상태에 있다.

 성과주체는 노동을 강요하거나 심지어 착취하는 외적인 지배기구에서 자유롭다 그는 자신의 주인이자 주권자이다. 그는 자기 외에 그 누구에게도 예속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그 점에서 성과주체는 복종적 주체와 구별된다. 그러나 지배기구의 소멸은 자유로 이어지지 않는다. 소멸의 결과는 자유와 강제가 일치하는 상태이다. 그리하여 성과주체는 성과의 극대화를 위해 강제하는 자유 또는 자유로운 강제에 몸을 맡긴다. 과다한 노동과 성과는 자기 착취로까지 치닫는다. 자기 착취는 자유롭다는 느낌을 동반하기 떄문에 타자의 착취보다 더 효율적이다. 착취자는 동시에 피착취자이다. 가해자와 피해자는 더 이상 분리되지 않는다. 이러한 자기 관계적 상태는 어떤 역설적 자유, 자체 내에 존재하는 강제 구조로 인해 폭력으로 돌변하는 자유를 낳는다. 성과사회의 심리적 질병은 바로 이러한 역설적 자유의 병리적 표출인 것이다.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