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ct 1, 2014

장소와 장소상실 Place and Placelessness, 에드워드 렐프, 논형



인간실존의 근원적 중심으로서의 집

빈센트 비시나스는 하이데거의 말을 알기 쉽게 풀어서, 집이라는 현상은 "우리가 복종할 수밖에 없는 압도적이고 교환 불가능한 무엇이며, 우리가 여러 해 동안 집을 떠나 있었다 해도 우리 삶의 방향을 정하고 길잡이가 되는 어떤 것"이라고 설명했다. 집은 개인으로서 그리고 한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의 우리 정체성의 토대, 즉 존재의 거주장소dwelling-place of being이다. 집은 단순히 당신이 어쩌다 우연히 살게 된 가옥이 아니다. 그것은 어디에든 있는 것이거나 교환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의미의 중심인 것이다. 이것은 매우 철학적이며 모호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사실집은 공통적이고 일상적인 경험을 이루는 요소이다.  .. 가장 근원적인 모습을 한 집이란 특정한 상황이나 특별한 환경에 대한 애착이며, 그것에 비하면, 장소에 대한 다른 모든 관계는 한정된 의미를 가질 뿐이다. 우리가 자신의 진로를 정하고 외부 세계로 나아갈 출발점이 바로 집이다.
 집이라는 장소에 대한 이런 종류의 애착이 현대사회의 특징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어려운 일이다. .. 하이데거는 집을 과거 시제로 기록하고, 이렇게 선언했다. "오늘날의 집은 왜곡되고, 비뚤어진 현상이다. 집이 주택과 동일해졌다. 다시 말해서 집은 어디에든 있을 수 있다. 집이 우리의 손아귀에서 금전적 가치로 쉽게 측정되고 표현될 수 있게 된 것이다". 수많은 실존 철학자들과 사회 과학자들이 주장한 대로, 현대인은 집 잃은 존재homeless being이며, 집이라는 장소에 대한 애착을 상실했다는 것은 맞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하이데거처럼 아예 집의 의미를 기각시켜버리는 것은 너무 지나치다. 사실 집이라는 장소와의 연계는 극도의 애착에서부터 전혀 애착없는 상태 사이의 수많은 단계로 존재한다. 더구나 사람들과 그들의 집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와 관심은 대개 물질주의적 태도에 가려져 있다가 상실과 고난의 시대를 겪으면서 비로소 드러난다. 정신과 의사인 마크 프라이드Mark Freid는 보스턴의 웨스트 엔드에서 거주하다가 집을 몰수 당하여 보스턴 시내의 다른 곳으로 이주한 주민 집단의 반응을 연구했다.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고통스러운 상실감 ...계속되는 갈망...절망감...그리고 잃어버린 장소를 이상화하려는 경향과 슬픔"같은 감정적인 반응을 나타냈다.

 ...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물리적 외관, 즉 어떤 장소의 경관일 수 있다.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장소의 지속성을 인식하는 것, 혹은 우리가 알고 있고 우리의 존재가 알려져 있는 곳, 우리의 인생에서 가장 의미 있는 경험이 바랭하는 곳이 바로 여기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로 한 장소에 뿌리를 내리고 그 곳에 애착을 가지고 있다면, 이 장소가 진정으로 우리의 집이라면, 이 모든 측면들이 의미심장하면서 분리될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런 집이라는 장소는 사실 인간 존재의 토대이며 모든 인간활동에 대한 맥락뿐 아니라 개인과 집단에 대한 안전과 정체성을 제공한다. 에릭 다델은 다음과 같이 썼다.
 "어떠한 선택을 하기도 전에, 우리가 성택하지 않은 이 장소는 존재한다. 이 장소에서 지구상의 실존과 인간조건의 토대가 확립된다. 우리가 장소를 변화시킬 수 있고 장소를 이동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 또한 어떤 장소를 찾는 것이다. 우리 존재를 정착시키고, 우리의 가능성을 실현시키기 위한 근거로 장소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여기는 세계가 모습을 드러내는 곳이며, 거기는 우리가 갈 수 있는 곳이다."
 장소와의 깊은 관계는 사람들과의 긴밀한 관계만큼이나 필수적이며 불가피한 것이다. 그런 관계가 없다면 인간 존재는 가능성 있는 그 의미의 대부분을 잃고 말 것이다.







장소가 주는 고역

'노스탤지어'라는 말은 1678년에 스위스의 의학도 요한네스 호퍼가 불면증, 식욕 감퇴, 가슴이 뜀, 마비, 발열 그리고 특히 계속해서 집을 생각하는 등의 증후를 가진 병을 설명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지금은 노스탤지어의 유사어로 '향수병'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하지만, 향수병은 노스탤지어보다 의미가 약한 유사어이다. 호퍼와 그 뒤를 이은 17세기, 18세기의 의사들은 노스탤지어가 집에 돌아갈 수 없으면 죽음에 이를 수 있는 병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노스탤지어는 장소에 대한 애착의 중요성이 예전에는 잘 인식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16세기 로버트 버튼이 <우울의 해부>란 책에서 "..죽음 자체, 또 하니의 지옥... 한 장소에 속박되는 것"이라 쓴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처럼 한 장소에 갇히는 것은 버튼이 지적한 우울증의 수많은 원인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의 진술은 장소에의 애착이 전적으로 즐거운 경험만은 아니라는 것을 시사한다. 우리가 가장 관심을 갖는 장소는 바로 우리 삶의 중심일 것이다. 그러나 장소는 또한 억압적이고 감옥 같은 것일 수도 있다.
 장소에는 끔찍한 고역, 즉 이 장소에 꼼짝없이 묶여 있다는 느낌, 이미 만들어져 있는 환경과 상징 그리고 틀에 박힌 일상에 속박되어 있다는 느낌이 있다. 일상 생활의 기반으로서의 장소는 앙리 르페브르가 "일상생활의 끔찍함"이라고 부른 특성을 필연적으로 가지고 있다. 즉, 일상 속에는 지루한 일들, 굴욕, 또 끊임없이 충족시켜 주어야 하는 기본적인 필요들, 고난, 보잘것없음, 탐욕이 점철되어 있다. 개인과 장소간에는 융합뿐만 아니라 긴장도 존재한다. 로날드 블리드는 이스트 앵글리아의 한 마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썼다.
 " 겨우 한 세대 정도 전에, '일자리'를 찾아 떠나야만' 했던 마을 사람은 어쩔 수 없이 그가 중요한 구성원이었던, 긴밀한 유대 관계와 의미로 가득했던 마을을 포기해야만 했다 .... 또한 반대로 마을을 떠날 방법이 없어서 마을 생활을 질식 할 것 같고 억압적으로 느끼는 젊은이들은 군에 입대하거나, 감옥같은 고향 마을을 떠나 오랜 방랑 여행에라도 합류하고 싶어할 것이다 "
 고역은 언제나 장소에 대한 깊은 개입의 일부이며, 이 모든 개입은 또한 장소가 부과하는 제약과 그로 인한 고통을 수용할 수 밖에 없다. 우리의 장소 경험, 특히 집에 대한 경험은 변등법적인 것이다. 즉, 벗어나고 싶은 욕망과 정착하고 싶은 욕구가 균형을 이룬다. 이러한 욕구 가운데 한쪽이 너무나 쉽게 충족 되면, 우리는 노스탤 지어나 뿌리뽑힘의 느낌으로 고통받기도 하고, 반대로 억압감이나 한 장소에 갇혀있다는 느낌을 수반하는 우울증으로 고통받는다.





장소의 본질

장소는 행위와 의도의 중심이며 "우리가 실존의 의미있는 사건들을 경험하게 되는 초점이다".
장소는 의도적으로 정의된 사물 또는 사물이나 사건들의 집합에 대한 맥락이나 배경이다. 혹은 장소 그 자체로도 의도의 대상이 될 수 있다.

.. 요약하면, 우리가 장소로 인식하는 생활 세계의 특성들은 다른 것들과 구별된다. 왜냐하면 장소에는 우리의 의도, 탣, 목적과 경험이 모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모든 것의 초점이 되는 장소의 특성 때문에, 장소는 주위 공간의 일부이면서도 그 공간과는 별개이다. 그러므로 장소는 세계 경험에 질서를 부여하는 기본적인 요소가 된다.
.. 그러므로 장소의 기본적인 의미, 즉 장소의 본질은 위치에서 오는 것도, 장소가 수행하는 사소한 기능들에서 오는 것도, 장소를 점유하고 있는 공동체에서 오는 것도, 피상적이고 세속적인 경험에서 오는 것도아니다. 이들 모두가 장소의 일반적이고 필수적인 특성이긴 하지만, 장소를 인간 존재의 심원한 중심으로 정의하는 대체로 무의식적인 의도성에 장소의 본질이 있다. 결국 모든 사람은 태어나고, 자라고, 지금도 살고 있는, 또는 트히 감동적인 경험을 가졌던 장소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으며 그 장소를 의식하고 있다. 이러한 관계가 개인의 정체성과 문화적 정체성, 그리고 안정감의 근원이자, 우리가 세계 속에서 우리자신을 외부로 지향시키는 출발저믈 구성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프랑스의 철학자인 가브리엘 마르셀은 "개인은 자신의 장소와 별개가 아니다. 그가 바로 장소이다"라고 간단하게 요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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