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ct 5, 2014

언니가 쓰는 글은 한 번 읽고 다 이해했다고 말하기엔 너무 감동적일때가 많아서

안녕하세요.
곧있을 10/8일 (수) 전체회의에 앞서 졸업전시제목에관한 얘기를 덧붙이려고 합니다. 이준용의 말에 공감하며 이런 의견이 나오게 된 맥락과 제목에관한 논의가 좀 더 있었으면하는 마음의 몇가지 근거들을 말씀드리려고합니다. 

어느 금요일 점심시간 임민욱선생님의 졸전제목에 관한 간결한 피드백이 있었습니다. 대강의 내용은 이러합니다.

 작가양성학교의 교육을 받은 우리는 우리가 의도하지 않더라도 학교 바깥의 관심과 주목을 받는다. 그러한 우리들이 뭔가 더 힘있는 메세지를 던져야하지 않겠는가. 
대략 선생님은 한국의 미술입시의 판도를 바꾼 학교의 졸업생들로서 우리가 할 수있고 해야만하는 일들이 있다는 믿음과 기대를 동시에 비치셨던 것 같습니다. 더이상 우리들만의 예술을 한다는 소수자적 태도나,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할 뿐이다 식의 마음자세로는 한예종 조형과에 대한 다른이들의 기대를 져버릴 수 밖에 없다는 우려도 느껴집니다.
 
이러한 기대와 믿음을 저를 비롯하여 몇몇 졸업동기들이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파국이라불리는  국내 상황과 마냥 미술하는것이 평화롭지만은 않은 세상에서 그래도 미술을 하는이유, 더 나아가 미술로 무얼 더 할 수있느냐는 질문에 대한 공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타쿠 혹은 잉여의 존재론에 기대는 담론과 관심들은 유행을 지나 스러졌고, 우리들 또한 단지 각자의 심오한 자아를 심사에 통과시키기 위해 수많은 크리틱을 견디거나 긁어 부스럼만 내는 크리틱들에대해 반감을 가졌던건 아닐 것입니다.

선생님이 주신 몇가지 메시지 덕택에 몇몇 친구들과 저는 졸전 제목이 가지는 의미와 그 힘에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졸업전시가 2개월 가량 남은 시기, 제목이 가질만한 힘을 다시 재고하자는 것은 아직은 몇몇사람의 욕심일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공식적으로 제목에 관한 문제를 다시 꺼내는 것은 동일한 커리큘럼을 거쳤고, 4년이라는 동일한 기회로 얻어 누린 우리가 같은 순간에 문밖을 나서는 이 '사건'을 즐겁고도 힘있는 에너지로 발산해보고싶은 열망입니다. 우리의 졸전은 개인작업의 단순한 합이 아니라, 회화와 조각 비디오 드로잉 설치 움직임 그 온갖 노동의 형식이 다 섞여 폭발하는 단 한번뿐일 졸전이니까요. 

최초 자극이 된 선생님의 이야기를 조금은 다르게 풀어보자면 이렇습니다.

한예종 조형예술과 입시시험을 치던 그 언젠가의 막연한 열망과 호기심을 떠올려 봅니다. 뭐, 저뿐만은 아니겠지만 현대미술의 뭣도 모르고 입시를 치렀으며 제가 1학년으로 들어온 2011년도에는 맘편히 미술을 그만 둘 수 있는가를 질문하던 선배들이 막 학교를 떠나려던 참이었지요. 그리고 2-3학년때 는 동시대가 어떻고 컨템포러리가 어떻고 서도호가 그러했고 양혜규가 그랬더라는 현대미술의 쟁점들에대해 듣고 검색하고 11시 59분에 완성된 리포트를 선생님들의 메일주소에 첨부하던 날들의 연속이었습니다.
 
저는 제 개인 블로그에서 한예종입시에관한 이런저런 상담을하며 입시문턱을 넘은자의 안도와 자유, 그리고 그 문턱을 넘기 전 우러러보는 누군가 사이의 어떤 불편한 간극을 느끼곤 했습니다. 여기서 든 생각은 우리가 함께 혹은 비슷하게 지나쳐온 4년의 과정을 입시를 거쳐야만 들어갈 수 있는 어떤 미지의 전당, 꿈의 기회가 아니라 어떤 '실체'로 보여야 하지 않을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실체란 것은 미술대학을 경험해 낸 자들의 자신감넘치는 패기이자, 설사 불안하더라도 뭔가를 가지고나가는 다부진 마음, 혹은 범상치 않으면서도 유연한 뒷모습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이런 생각은 굳이 '졸업생'이라는 역할설정보다도, 우리가 '한예종을 다니며 미술을 해온 사람들'이라는 데서 더 명확해집니다. 우리가 다닌 학교와 혹은 우리를 의식하는 시선에 대응할만한 에너지를 우리 스스로 발산해 낼 때, 추운 겨울 졸전을 보러 오는 사람들도 추운 전시공간을 지키는 우리들도 그날그날의 질문을 가지고 귀가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남의 눈치보는 것과는 다른, 우리의 위치를 인지하고 확실히 누리는 형태로 말입니다. 때문에 저는 이준용이 제안한 제목의 형태, 즉 외부로 향한'선언'이자 다소 '반동'적일 수있는 '질문'의 형식을 취하는 것에 동의합니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학년단위로의)4년간의 작업의 '정리' 혹은 4년으로부터의 '밀려남'아니라 '지금''여기''우리''미술(작업)'이라는 시간과- 우리라는 주체를 당당히 드러내는 '독립'적 태도를 취할 수 있을 것이고, '떠나는 우리'이기 보다는 4년전 그때와는 분명히 달라진 우리를 좀더 인식하고 피력하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준용 형/오빠의 '움츠려들지 말고 엿가튼걸 하나 만들어 놓을테니 와서 볼테면봐봐라 하는 똥배짱'이란 말의 급진성이 이와 같은 의미와 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지난번 회의에서 물고기도 바다멀미를 할까 이 제목에 동의를 했고 이 제목의 변용가능성에 찬성했습니다. 일단은 우리의 공통된 '처지'에 관한 것을 이 제목이 우아하게 담기때문이었지요. 그러나 다시 생각해봤을 때 Do fish ever get seasick은 우리 터전에 대한 이야기인듯하나 동시에 미술장르 안의 미술졸업자들이 내부적으로 끌어올린 자조라는 느낌을 완전히 지우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좀 잊고싶은 기억이지만 물고기도 바다멀미를 하는가라는 제목을 들으신 졸업담당교수님은 곧바로 "그래, 배타던 사람이 지상에 내려와도 멀미를 한다지"란 말씀을 하셨지요. 그날은 그 누구에게 진지하게 따져묻고 대답하지 못했던 날로 기억합니다..
 물고기도 바다멀미를 할까라는 제목은 저명한 문학 텍스트의 일부를 차용했기에 나름의 완결성과 함축성을 지닌 좋은 제목입니다. 그러나 이 제목을 그대로 쓰기에는 제목의 긍정적인 면들에서 취득한 보편성이 일반적인 것으로 되어버리는 측면이 있어요. 전 이 지점을 보완하는 단계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제목과 컨셉회의가 있었던 회의에서 이런 문제까지 다루지 못했다는 점. 특히 도록과 인쇄물관련하여 컨셉회의를 수차례 가졌을 디자인/ 홍보팀에게 부담을 주게 된 점에 대하여 졸준위의 일인으로서 반성합니다. 
 이 반성이 접수되기전임에도 불구하고, 졸업이지니는 '끝'이라는 이미지 뿐만아니라 우리의 배움, 작업, 좌절 그리고 동시에 우리의'미술'이라는 맥락이 졸전을 통하여 다시 읽히고 기존제목보다는 조금 다른 이미지와 메시지를 남길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에 장문의 글을 남깁니다.


때문에 상호의견충돌을 충분히 허용하며 나은 결론을 낼 수 있는 별도의 졸전제목회의를 제안합니다.


이 제안과 함께 몇가지 바람들을 요약하는 아주 거친, 제 딴엔 강도를 무작정 높인 문장들을투척합니다. 제목짓는 센스가 부족하여 장황히 떠들기만합니다. 곧 있을 제목회의때 이 거친 내용과 개념들을 부셔주시고 새롭게 갈아엎어주세요.



"우리는 지금 이 순간을 차지한다.
우리는 우리의 노동 뿐만아니라 아니라 우리의 노동이 스쳐 만들어진 물질들과 함께 지금 이곳을 차지할 것이다.
동시에 우리는 알고있다. 이 한정된 시공간의 한계또한 공유하고 있는것이 지금의 우리임을.
우리는 서로가 맞물려있으며 언젠가 맞물린 고리들이 해체될 때 각자가 누리는 공간도 시간도 흩어질 것임을 알고있다.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를 채득하려했던 날들이 있었다. 그 날들의 끝에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하는 자조에 잠긴 날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해야하는가하는 질문을 딛고일어났을 때, 우리는 비로소 미술로 무엇을 더 할 수 있는가를 물을 수 있었다.

 
우리가 차지하지 못하고, 점거할 수 없는 것들은 늘 우리의 핵심을 비껴간다. 우리의 그물에 잡힌 것, 그것만이 우리의 핵심이다. 스포트라이트는 아주 잠시동안만 이곳을 비출것이다. 적어도 우리가 4년을 매달린 시간과, 가치들, 질문들이 펼쳐진 이곳을 말이다.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아니면 더이상 알 수 없을 '무엇을 더 할 수 있는가의' 영역에 스스로 불을 지펴야한다.

화면에 최초의 선이그어질 때, 재생 단추가 눌러질 때, 작업실의 공구를 손에 쥘 때, 고민하던 입술이 벌어질 때 그 누구의 허락도, 허용도, 압박도 필요하지 않았다. 누구도 지정해준적 없는 순간들로부터 우리의 모든 것들이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음을 우리는 기억한다. 
그 누구도 말하지않고 움직이지 않으며 창작해내지 않는 고요가 우리에게 공포가 될지언정 우리가 우리의 그물을 짜고 불을 지피던 방식을 기억하는 이상 우리의 적은 없다. 때문에 우리를 해칠 누구도 없다는 점. 우리는 그것을 천성적으로 알아 창작이라는 힘에 매달렸다. 이 힘만큼은 무엇에도 기생하지 않는 독립적인 힘이었다. 우리는 이곳에서 우리의 노동을 믿게 되었고, 질문만이 자신의 입구와 출구를 스스로 더듬어가는 길임을 배웠다. 미술로 무엇을 더 할 수 있는가의 물음은 이러한 우리에게 필연적인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미술은 우리에게 '더'라는 공백을 허용하는 공간이었다.
그렇기에 미술은 우리에게 벽임과 동시에 새로운 문이다.
가장 커다란 문을 짓기위해 튼튼한 벽을 찾던 날들도 있었다. 
혹시 무너뜨려야만 열리는 벽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이 판에 던져질 모든 질문에 앞서 숨을 고르는 존재들은 우리이다.

누구나의 시간이 그러하듯이 우리들의 현재는 이미-아직으로 온다. 이곳은 이미 있던 것들이 희미해지는 곳이며 아직이라기엔 너무도 명징한 실체의 우리가 모인 곳이다. 졸업전시는 여러차례 반복될 것이지만 지금 이순간의 우리는 단 한번뿐이다. 우리는 복잡한 행선지가 모여 만든 기나긴 열차이며 올 겨울 세차게 역을 지나칠 것이다.

여기는 지금이라는 가장 짧은 순간, 긴 미래를 겨냥할 수 있는 우리의 맨- 앞이다."
 
 
 
 
 
<졸전제목에관한 건의2>, 신유현, 2014 /10/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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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최종적으로 어떤 문장을 졸업전시의 제목으로 삼게 될런지는 아직 모르겠다. 하지만
과정에서의 소통과 논의들이 참 가치있다. '빨리' '처리'해버릴 일이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같은 학교에 학생이라는 신분으로 같이 몸담고 있는 사람의 목소리로부터
그 목소리가 뱉어지는 과정에서, 그 소리를 함께 보고 들으면서 배운다.
내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지, 내가 느끼는 감정들이 사실 어떤것인지.
 
'씨팔, 이번 학기 끝나면 미술 다 관둬버리겠어, 
내가 하고싶은거 다 지르고 이 판을 끝낼거다!'
요즘 계속해서 느끼던 이런 나의 분노감들이
실은 정말 그만 둬버리겠다는, 더러워서 피하겠다는, 결국 우울함과 무기력함에 버무려진 패배주의적 성격의 결론이 아니라
이렇게 괴롭힘이 끊임없는, 명쾌한 해답없이 서로 잔혹상에 대해 연속적인 책임회피를 해대는 이 세상에 한번 맞서보겠다는, 내가 든것이 초라한 물맷돌일지언정 그러기 위해 나의 오늘을 불사지르겠다는 지독한 결단에 가까운 것이 아니었겠는가 생각해본다.
 
으아 왠지 너무 힘이 솟는다. 너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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