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ct 21, 2014

어제 오늘 내일의 실제 이야기

1.
나는 닉네임 ‘안함’으로 불리는 흔한 미대 졸업생이다. 20대 대부분을 예술학도의 신분으로 살면서 고귀한 예술제도 안전망에서 아름답게 헤엄치며 노닌 장본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안함’을 닉네임으로 정한건 내가 학부 졸업반이었을 때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학점 미달의 이유로 예술학도 신분을 연장하고 있을 때다. 당시는 예술 학도라는 신분이 슬슬 끝나 감에 따라 여느 수천 명의 학도들과 마찬가지로 불안했던 시기였고, 그에 따라 다음 내가 갖게 될 신분이 무엇일지 알아보려고 여기저기 두리번거리고 있던 시기였다. 바로 그때 내 앞에서 명동의 네온사인처럼 현란하게 불빛을 뿜어내고 있었던 것들은 문화예술 지원금, 예술가 레지던시, 청년작가지원금, 예술창작지원금, 문예진흥기금, 차세대 예술인력육성사업, 유망예술지원사업, 시각예술창작 및 전시공간지원 등등 몇 개 안 되는 단어의 조합으로 무한히 뽑아낼 수 있는 마법의 이름들이었다.

예술가 지원금(앞에서 말한 수많은 마법의 이름들을 감히 통칭해서 부르겠다.)은 어느덧 소위 부잣집 자식이 아니라면 어떻게 해서든 받아야 이 땅에서 그나마 굶어 죽지 않고 예술을 할 수 있는, 그리고 더불어서 예술가라는 직위를 수여받을 수 있는 하나의 필수조건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모두가 알다시피 한정된 자원이 있으면 그 다음은 불 보듯 뻔한 스토리가 이어진다. 설상가상으로 그마저 제 역할을 다 하는 자원도 아니지만, 무한 경쟁에 내몰린 이들은 그것을 가릴 때가 아니었다. 금싸라기 땅이 되어버린 예술가 지원금은 학부시절 ‘순수한 예술’만 공부해오던 나에겐 그 시작 절차부터 진입 장벽이 높았다. 처음 담배를 잡았던 학창시절 그 떨리는 마음으로 인터넷에서 지원서를 다운로드 받고 파일을 열던 그 순간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대문짝만 하게 쓰여 있던 ‘사업 계획서’. 사업 계획서라니?! 난 고귀한 예술을 하는 사람이오! 사업 계획서라니?! 하지만 이런 해프닝 아닌 해프닝도 시간이 지나면 무뎌지기 마련. 반복 학습의 결과로 나는 얼추 복잡한 서류들을 읽어내는 능력이 생겼고, 어떤 단어들을 써야 하는지 감을 잡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전히 내 마음 한편에는 여러 가지 질문들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질문들은 다시금 내게 물었다. ‘왜 지원을 받아야 하는 거지?’ 물론 당시에 나는 혁명가가 아닌 이상 큰 틀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지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스스로 내고 싶어 했고, 그 답을 찾는 과정이 결코 쉽지 않으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려면 스스로 결단이 필요했다. 그래서 나 자신에게 붙인 이름이 바로 ‘안함’이었다.

처음에 섣불리 선언된 나의 거부들은 역설적으로 거부된 대상을 좀 더 가까이 들여다보게끔 만들었다. 예술가 지원금은 내 생각보다 훨씬 더 큰 맥락을 갖고 있었다. 단순히 돈의 문제를 떠나 인식의 문제, 그리고 더 나아가 사회적 존재에 대한 문제로 다가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하지만 내가 여기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심사 기준, 사전/사후 지원 방식, 공공기금의 공공화, 국가 주도의 예술 지원 사업, 무한 경쟁의 논리 등과 같은 예술가 지원금으로 파생된 단편적인 현상들이 아니다. 조폭 영화에서 가장 멋있는 배우는 말한다. ‘난 한 놈만 패.’ 그 한 놈을 설령 잘못 잡았더라도 일단 잡았으면 되돌릴 수 없다. 그래서 내가 지금 잡은 그 운도 지지리도 없는 한 놈은, 바로 ‘예술가 지원이 결과로 도출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다.


2.
예술가 지원이 결과로 도출될 수 있을까. 이 질문 속에는 중요한 단서가 하나 숨어 있다. 예술이 어떠한 결과를 만들어내는지 혹은 만들어내지 못할지는 차후의 문제이다. 여기서 찾을 수 있는 것은 ‘결과가 도출되는 예술을 지원하겠다.’라는 예술가 지원금의 주체 의도이다. 이때 결과는 미학적 의미에서 말하는 과정-결과의 의미가 아니라, 사회-문화적인 결과의 의미로써 제도화된다. 그 결과가 어떻게 의미화되며 제도화되는지를 한 번 파헤쳐보자.

예술 지원금의 가장 첫 번째 기준은 지원받는 대상이 예술가인가를 증명하는 것이다. 아니 적어도 대상자가 예술로써 사회-문화적인 기여를 할 수 있는지를 증명하는 것이다. 그리고 연이어 파생되는 두 번째 기준, 바로 지원받는 대상의 예술행위에 대한 예측 가능한 미래를 담보한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기준으로 예술가 지원금의 주체는 예술가를 규정하는 프레임과 예술행위의 범위를 예측하는 가이드라인을 갖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지원받는 혹은 받으려는 자칭 예술가들을 포함한 여타 사회 전반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술가를 규정하는 데에 각기 다른 대답을 하고 있다. 이는 곧 우리 사회가 아직 예술에 대한 규정을 합의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술가 지원금의 주체들은 배타적인 입장을 고수하고 있고 또 그럴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흔히 생각할 수 있는 관료적인 실무 때문이라는 이유를 넘어서 오랫동안 우리가 가져온 커다란 인식이 이러한 괴리를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을 ‘생산의 환영’이라고 생각한다.

‘생산의 환영’은 예술행위뿐만 아니라 인간이 행동하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지배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체제에선 모든 행위는 잠재적으로 생산 가능한 그리고 동시에 소비 가능한 경제적 활동으로 규정된다. 반대로 말하면 어떤 행위가 경제적 활동으로 귀결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비전문적인 행위, 잉여 활동, 아마추어리즘, 취미, 혹은 더 나아가 실패한 행위 내지는 비생산적인 행위가 되어버린다. 그리고 이렇게 수면 아래로 침식한 행위들은 보호받지 못할뿐더러 존재 자체에 위협을 받는다. 위에서 언급한 예술가 지원금의 주체로부터 나오는 예술가와 예술행위에 대한 규정은 바로 여기서 ‘생산의 환영’과 맞물리게 되는 것이다. 다만 경제적 생산에서 문화적 생산으로 이름만 바뀌었을 뿐, 이 두 개념 사이에는 어떠한 차이도 있지 않다. 예술가를 규정하는 것에서부터 예술행위의 결과를 담보하는 것까지, 이 모든 것이 예술을 단순히 사회-문화적인 기여 역할을 하는 생산-소비 형태의 개념으로만 이해하기 때문이다.

예술가 지원은 단어의 뜻과는 다르게 결국 예술가를 제도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오늘날의 예술가는 생산의 환영을 꿈꾸며 무한 경쟁에 내몰려 끊임없이 스스로 증명하고 자신의 행위가 가져올 경제(문화)적 효과를 홍보해야 한다. 나는 묻고 싶다. 이것이 정말 나와 그대가 그토록 원하고 꿈꿔왔던 것이었던가.


3.
예술행위의 결과란 무엇일까. 그것은 작품도 아니고, 전시(상영, 공연, 출판 등)도 아니고, 예술가의 직업의식 표출도 아니고, 노동의 성취도 아니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그 시작이 어디인가를 생각해봐야 한다. 예술행위는 그 행위를 만드는 동기나 목적의식, 다시 말해 의도가 선행된다. 그러나 의도가 곧 예술행위의 시작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의도는 어느 불특정한 순간에 나올 수 있으며 자신의 삶 외부에서도, 심지어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의 외부에서도 나올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대정신을 만드는 것은 지배계급의 권력 유지용 서류들이 아니다. 반대로 서류에 기재할 수 없는 것들, 존재를 규정 받지 못한 것들, 경제적 생산을 하지 못하는 것들, 예측 가능한 미래를 담보하지 못하는 것들이다. 이렇게 수면 아래에 침식된 생각과 행동들이 불현듯 불특정한 이의 몸 안에서 터져 나오는 것이 바로 의도이다. 그리고 예술가는 그 불특정한 이들 중에서 예술이라는 표현 방법을 가진 이에 불과할 것이다. 예술행위는 결코 한 예술가 개인의 의지나 역량으로 시작되지 않는다. 그것의 시작은 ‘공동체적 공명현상’이다.

그렇다면 예술행위의 과정은 어떠한가. 한 미술작가의 전시가 열렸다고 생각해보자. 한 작가가 미술 작업을 어떠한 의도를 갖고 했고 그 결과로 여러 기관 및 개인들이 관계되고 전시가 열렸으며 또 여러 사람들이 그 전시장에 모였다. 간단한 하나의 문장으로 열거한 이 일련의 과정들은 보기와는 다르게 결코 단순하지도, 필연적이지도 않을뿐더러 어느 과정 하나가 그다음 과정을 보장하지도 않는다. 바로 여기에 예술행위가 갖는 또 다른 특성, ‘임기응변의 상태 참조’가 있다. 행위가 일어나는 그 시간과 공간 그리고 그것들에 매개된 관계 주체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임기응변의 상태 참조’는 행위로 하여금 어떠한 목적에도 얽매이지 않게 만든다. 매 순간 환경과 끊임없이 호흡하기 위해 주체를 해방시켜야 한다. 상품화된 주체성, 즉 스스로 규정하고 스스로 독점하는 배타적인 자기인식은 공동체적 공간인 여기서 이제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그래서 예술 행위자의 의도와 예술행위가 만들어지는 과정 그리고 예술행위가 일어나는 현장은 서류에서부터의 일탈을 꿈 꿀 수밖에 없다.


4.
예술가 지원금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술과 일상이 분리되면서 우리는 전자가 후자를 보완해줄 것이라는 착각 속에 갇혀 버렸다. 그것이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공공예술이고 공동체 예술이며 지역 예술이다. 하지만 그것은 보완이 아니라 오히려 예술과 일상의 분리를 촉진하는 ‘상호 착취-참여’의 관계이다. 예술과 일상 사이에는 예술가 지원금의 주체와 같은 매개자가 존재한다. 그리고 매개자는 필연적으로 권력자일 수밖에 없다. 결국 예술과 일상이 서로를 착취하고 그 착취에 서로 참여하면서 매개자를 강화시키는 꼴을 만드는 것이다.

예술 활동을 공동체적 활동으로 본다면 상황이 많이 달라진다. 예술의 영역이 예술을 쫓는 이들로 하여금 그곳에 들어가야 할 조건으로 만들었다면, 공동체의 영역은 그 획득해야만 했던 예술을 예술의 영역에서 일상의 영역으로 재배치시킨다. 고유한 예술의 영역에서 예술이 개인(혹은 사회-문화적으로 상품화된 개인)의 성취와 경제(문화)의 기여를 위한 활동이라면, 공동체의 영역에서는 그것이 생활의 일환으로 탈바꿈된다. 전자가 생존을 위한 노동이자 매개된 삶이라면, 후자는 공존을 위한 해방이자 직접적인 삶이다. 요컨대 공동체의 영역에서 예술은 매개된 삶으로부터 지배당하지 않는 방식을 끊임없이 도모하게 만들고, 고립된 주체를 해방시키는 역할을 하고, 낡은 가치관을 바꾸려는 시도이며, 그 형식에 있어서 상품화됨을 거부하는, 보다 더 현실적이고 일상적인 활동이다.

공동체라는 것을 일단 통상적인 편견을 버리고 볼 필요가 있다. 공동체를 다른 두 사람 이상이 모여서 생활이나 행동 또는 목적을 같이 하는 집단이라고 쉽게 생각할 수 있는데, 공동체를 인간의 소유물에 한정 지어서 보기보다는 그 의미를 확장시켜야 한다. 나를 담고 있는 공간, 그 공간에서 공존하고 있는 모든 생명, 시간을 뛰어넘어 의식을 공유하고 있는 모든 개체들, 심지어 이 모든 것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조차도 공동체라고 말할 수 있다. 나는 혼자서 존재할 수 없으며, 모든 것과의 관계 속에서 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나는 일상생활 속에서 수많은 공동체를 발견하지만 그것들이 파괴되는 것도 수없이 본다. 혹자는 진정한 공동체는 지속 가능한 조건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그 의견에 전적으로 반대한다. 공동체는 우리의 삶 속에서 그 누구도 모르는 사이에 생성되며 끊임없이 해체되는 것을 스스로 반복한다. 다시 말해 공동체는 생성의 단계, 즉 관계가 이루어지는 그 순간이 곧 절정이며 쇠퇴이다. 그 짧은 찰나가 모든 것을 지배하며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된다. 예측 가능한 미래를 보장하지 못함은 역으로 새로운 가능성의 길을 만들어낸다. 이 만남의 기쁨과 이별의 슬픔이 공존하는 공동체는 교환가치를 뛰어넘으며 자본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난다. 모든 것이 교환가치를 갖게 된 지금 여기서, 공동체를 꿈꾼다는 것은 어떤 이상향으로의 진보가 아니다. 그것은 본래 우리가 갖고 있었던, 잊고 있었던, 그리고 묵살되었던 본능을 되찾는 것인 동시에 공존하는 주체들의 직접적인 삶을 위한 투쟁이다.


5.
예술가 지원금은 아이러니하게도 나로 하여금 다른 방식의 삶을 찾도록 유도한 여러 가지 지표들 중의 하나이다. 미답의 지대를 찾아가는 활동에서 올바른 길을 걷는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지점에서 다른 삶의 방식, 다른 삶의 공간 그리고 다른 삶의 관계들을 만들어내는 과정이야말로 예술 활동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생존을 기관에 맡기는 방법보다는 공존을 위해 스스로 조직화하는 일 또한 예술 활동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생활의 기점으로부터 무엇을 먹고사는지, 누구와 먹고사는지, 무엇을 하며 먹고사는지를 직접적인 삶의 에너지로 바꾸는 일 또한 예술 활동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누군가는 이렇게 질문할 수도 있겠다. 사실 예술가 지원금을 받을 능력이 안 돼서 그렇게 하는 거냐고. 이에 대한 대답으로 나는 마지막으로 이 말을 하고 싶다.

“예술가 지원금, 저도 참 좋아하는데요, 제가 한 번…”


 안함


얼룩진 5호 , [예술과 제도] 예술가 지원금, 저도 참 좋아하는데요. 제가 한 번…, http://alllookzine.net/index.php/archives/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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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졸업심사와 졸업전시 준비로 혼이 나갈정도로 바쁜 와중에 나는 돈을 벌 필요를 강렬히 느끼게 되었다. 최근까지 신사동 모 미술학원에서 S대를 지망하는 친구들을 실컷 가르치는 동안엔 아무 걱정이 없었는데, 수시 철이 지나고 수많은 아이들이 떨어져 나가자 학원에서는 '새끼선생님'들은 필요치 않게 되었던 것이다. 웃긴 건 아직도 내가 가르치던 친구들 중에 누가 1차에 합격했는지 알지 못한다는 것과, 더이상 나오실 필요 없어요 라는 통보 없이도 나는 아주 자연스럽게, 잘렸다는 것이다.
 네오룩을 몇주간 들락날락했다. 위시캣을 잠시 들여다보다가 알바몬을 뒤지기 시작한다. 결국 그 사이 어딘가이다.
 학원강사일을 하다보니 절대적인 수로는 사실 그것조차 많은 양은 아닐지 몰라도, 도저히 최저시급을 조금 웃도는 수준의 일을 하기로 다시금 마음먹는 일이 참 쉽지가 않고 서럽다. 그러니 네오룩에 다시 매달린다. 전문 미술 인력을 원하는 일들. 이것도 가난하기는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날짜나 기간때문에 또 마구마구 부딪친다. 다시 알바몬을 향한다. 다시 네오룩을 향한다. 다시 알바몬. 다시 네오룩. 절망스럽게 노트북을 접고 밖에 나와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거리를 걷는데, 오늘 요망한 꽃무늬가 박힌 긴 치마를 입고 백팩을 맨 나를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상상해보았다.

 경제적인 가치로 환산된 나는 이 세상에서 몹시도 싸구려일 수 있다. 그럴때가 훨씬 많겠지.
내가 이런 교육을 받으려고 그간 얼마나 돈을 들이고 수고해왔는데 ! 라며 하소연 섞인 투정을 부리고 싶은 게 아니다. 예술의 영역에서 우리가 하는 일들, 그 관련된 모든 시간들이, 실제적인 삶 속에서, 정말로 우리가 숨쉬고 밥먹고 걸어다니는 우리의 삶 속에서, 이렇게 무력하게 차단당하고 거세당하는 걸- 그냥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제로의 가치로 받아들여지는걸 더이상 당연히 받아들여서는 안되겠다는 거다. 그럴 수 없다는 거다. 그냥 이렇게, 숙이고 들어가고 싶지 않다는 거다.
우물은 목마른 사람이 파낸다지. 동료들을 찾고, 맨손으로 돌파구를 직접 파내야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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