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ct 1, 2014

장소와 장소상실 Place and Placelessness, 에드워드 렐프, 논형

참된 장소감

.. 장소에 대한 참된 태도란 장소 정체성의 전체적 복합성을 직접적이며 순수하게 경험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그 경험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인위적인 사회적 , 지적 유행에 매개되거나 왜곡되지 않고, 또 판에 박은 관습을 따르지 않는 태도를 말한다. 이러한 태도는 장소가 인간 의도의 산물이고, 인간 활동을 위한 의미로 가득한 환경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인식하고, 장소에 대한 심오하고 무의식적인 정체성을 지니는 데서 나오는 것이다.


나I-너Thou 관계.


오거스트 헥처는 다음과 같이 썼다.
"개인이 필요로 하는 것은 ... 땅덩어리가 아니라 장소다. 그 안에서 자신을 확장시키고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는 맥락이 필요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장소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보통 오랜 시간에 걸쳐, 평번함 사람들의 일상 생활을 통해 형성되어야만 한다. 그들의 애정으로 장소에 스케일과 의미가 부여되어야 한다. 그리고 나서 장소가 보존되어야 한다." 

노베르그-슐츠, 밋밋한 경관flatscape

"우리는 전국에 걸쳐 연속적으로 얄팍하게 펼쳐져 있는 사람들 음식 권력 오락을 위해 핵심을 포기하고 있는 것 같다. 지금 영국은 불모의 땅이자 .. 겉으로만 그럴듯하게 도금된 혼돈의 세계이다". 이러한 평가는 다양한 경관과 의미있는 장소가 결핍된, 일종의 무장소의 지리가 나타날 가능성을 나타낸다. 또한 우리가 현재 무장소성의 힘에 지배당하고 있으며 장소감을 상실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다양성이 인류에게서 사라지고 있다. 똑같은 방식으로 행동하고, 생각하고, 느끼는 것은 이제 전세계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 이것은 단지 국가들이 서로에게 더 많은 영향을 주고 서로를 더욱 신뢰하면서 모방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각 나라 사람들이 점점 신분제도나 직업, 가족에 따라 고유한 생각과 느낌을 포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점점 어디에서나 똑같은 인간 소질Constitution of man에 가까워져 가고 있다. 그래서 이들은 서로를 모방하지 않아도 비슷해지고 있다."
 토크빌이 말하는, '인간 소질'이란 수준 높은 영감이 아니라, 오히려 "셀 수 없이 많은 존재들, 뛰어난 사람도 없고 떨어지지도 않은 닮은 꼴"의로의 하향 평준화이다. 이러한 지적의 현재적 의미는 무장소성이 커뮤니케이션의 발달, 이동성과 모방의 증가로 인해 비슷해보이는 경관을 구성하고 있으며, 그 배후에 인간과 장소의 공통적이고 평균적인 성격에만 관심을 갖는 태도가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다는 데 있다 ... 이 '진정하지 못한 무장소적 태도'가 이제 너무 멀리 퍼져서, 피상적이고 우연적으로 접하는 수준이상의 장소를 경험하거나 창조하는 것이 전혀 불가능해졌다.





진정하지 못한 태도 - 집

진정한 경험에서 '집'이란 그것이 주택이든 마을이든 지역이든 나라이든지 간에, 실존과 개인의 정체성의 중심으로, 거기에서 외부 세계를 바라본다. 새 집을 짓는다거나 새로운 땅에 정착한다는 것은 아주 근본적인 일로서, 세계를 다시 세우는 것과 맞먹는다. 원시적이고 토착적인 문화에서는, 장소에 대한 실질적이고 종교적인 감정이 서로 얽혀있고 단일하고 영역이 병확하게 한정된 집에는 깊고 다면적인 애착이 존재한다. 그러나 현대 사회의 대부분은, "직장 생활, 가정 생활, 종교 생활, 그리고 장소"가 각기 분리되어 있다. 그래서 집이란 당신의 주택이 위치한 곳이며, 별 아쉬움 없이 3~4년에 한번씩 바뀔 수 있다. 엘리아데는 주택이란 "거주를 위한 기계"라고 말한 르 코르뷔제의 견해를 받아들여서 다음과 같이 썼다. "당신은 자전거나, 냉장고, 자동차를 바꾸듯이 당신이 거주하는 기계를 자주 바꿀 수 있다. 또한 당신은 기후의 차이 같은 어쩔 수 없이 이사해야 하는 특별한 이유 없이도 도시나, 지방을 바꿀 수 있다." 이러한 '집'의 상호 교환 가능성 -예를 들어 북아메리카에서는 가구당 3년에 한 번씩 이사한다-은 '집'의 중요성이 감소함으로써 가능해졌으며, 동시에 집의 의미 축소를 촉진한다.
 '집'의 의미는 이동성의 증가와 이동성과 연계된 기능의 분리를 통해서뿐만 아니라, 감상에 젖거나 상품화에 의해서도 약화되어 왔다. 잘알려진 '즐거운 나의 집'테마를 활용하는 키치적 골동품 취미가 넘치고 있다. 특히 이 테마는 독일어의 하임붸Heimweh 즉 향수, 그리고 하이마트Heimat 즉, 고향 개념에 잘 나타나 있다. 레오나르드 둡은 오스트리아의 연감에서 다음과 같은 해서을 끌어냈다. "우리가 이 그리운 단어 '하이마트'를 말하는 바로 그떄, 따뜻한 파도가 우리의 심장을 스치고 지나간다. 고독의 한가운데서도 우리는 혼자가 아니며, 슬픔의 한가운데서도 우리는 편안하다." 그리고 상업적 이해는 집에 대한 생각을 이용해 먹는 것을 잠시도 놓치지 않는다. 토론토의 한 대규모 아파트 회사는 "당신이 집이라고 부를 곳을 원한다면, 우리를 찾으십시오"라고 광고했다. 부동산업자들도 더 이상 주택이 아닌 집, 즉 비싼 집, 상류층 취향의 집, 아파트, 타운홈을 팔기 시작했다. 이제 '집'은 사실상 시장성 있는 교환 가능한, 센티멘털한 상품이 되었다.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