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ct 7, 2014

<피로사회>, 한병철, 문학과지성사 3

" ... 비록 이들 중 그 누구도 다른 존재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 순간ㅇ는, 나의 순간 속에서만큼은, 모두가 나란히 함께 있는 것이다." 한트케의 피로는 자아 피로, 즉 탈진한 자아의 피로가 아니다. 한트케는 오히려 "우리-피로"라고 말한다. 이때 나는 너한테 지치는 게 아니라, 한트케의 표현대로 말하자면 너를 향해 지치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 앉아 있었고 말을 하기도하고 침묵을 지키기도 하면서 공동의 피로를 즐겼다. 피로의 구름이, 에테르 같은 피로가 당시 우리를 하나로 엮어 주고 있었다."


..성령을 맞는 오순절의 사람들을 나는 언제나 피로한 모습일 거라고 상상한다. 피로의 영감은 ㅁ 엇을 할 수 있는지 보다는 무엇을 내버려두어도 괜찮은지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 ... 그것은 모든 감각이 지쳐 빠져있는 그런 상태가 아니다. 오히려 피로속에서 특별한 시이 깨어난다. ... 짧고 빠른 과잉 주의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는 저 길고 느린 형식의 주의 말이다.


탈진의 피로는 긍정적 힘의 피로다. 그것은 무언가를 행할 수 있는 능력을 뺴앗아간다. 영감을 주는 피로는 부정적 피로, 즉 무위의 피로다. 원래 그만둔다는 것을 뜻하는 안식일도 모든 목적 지향적 행위에서 해방되는 날,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리면 모든 염려에서 해방되는 날이다. 그것은 막간의 시간이다. 신은 창조를 마친 뒤 일곱쨰 날을 신성한 날로 선포했다. 그러니까 신성한 것은 목적 지향적 행위의 날이 아니라 무위의 날, 쓸모없는 것의 쓸모가 생겨나는 날인 것이다. 그날은 피로의 날이다. 막간의 시간은 일이 없는 시간, 놀이의 시간으로서 본질적으로 염려와 노동의 시간이라고 할 수 있는 하이데거의 시간과도 구별된다. 한트케는 이러한 막간의 시간을 평화의 시간으로 묘사한다. 피로는 무장을 해제한다. 피로한 자의 길고 느린 시선 속에서 단호함은 태평함에 자리를 내준다. 막간의 시간은 무차별성의 시간, 우애의 시간이다. "내가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은 평화 속의 피로, 막간의 시간속에서의 피로다. 그리고 그 시간은 평화로웠다 .... 또한 놀라운 것은 그곳에서 나의 피로가 때때로 찾아오는 평화에 함께 기여하는 듯이 보였다는 사실이다. 피로한 시선이 폭력과 싸움의 몸짓, 심지어 불친절한 행동마저도 이미 그 싹에서부터 부드럽게 가라앉히고 완화하기 때문이었을까?"

 한트케는 내재적 성격을 지닌 피로의 종교를 구상한다. "근본적 피로"는 자아의 논리에 따른 개별적 고립화 경향을 해소하고 친족관계에 의존하지 않는 하나의 공동체를 만들어낸다. 그 속에서 어떤 특별한 박자가 일어나 하나의 화음을, 친근함을, 어떤 가족적 유대나 기능적 결속과도 무관한 이웃관계를 빚어낸다. "피로한 자는 또 다른 오르페우스로서 가장 사나운 동물들조차 그의 주위에 모여들어 마침내 피로를 나눌 수 있게 된다. 피로는 흩어져 있는 개개인을 하나의 박자 속에 어울리게 한다." 무위를 향해 영감을 불어넣는 저 "오순절의 모임"은 활동사회의 반대편에 놓여 있다. 한트케는 거기 모인 사람들이 "언제나 피로한 상태"라고 상상한다. 그것은 특별한 의미에서 피로한 자들의 사회이다. "오순절-사회"가 미래사회의 동의어라고 한다면, 도래할 사회 또한 피로사회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