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ct 31, 2014

5분짜리 편지



자기 가녀린 등뼈를 보여주기 싫어서 모든것을 앞면으로만 대하는 너에게

유난히 깊은 눈 머리에 눈물을 가득 담고도 더이상 상황을 말하지 않는 너에게

하고 싶은 말들이 앞니의 뒷면까지 바짝 와있는 데 잘근 혀와 함께 속으로 씹는 너에게

나는 불편함을 느끼면서도 자꾸만 이 쪽 그늘로 와서 쉬라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어진다.

까치발을 더해서라도 너에게 숨을 수 있는 그늘을 한 뼘 더 만들어주고싶어진다.

Oct 26, 2014

2014 광주비엔날레에서 만났던 보물들





O LevanteThe Uprising, 2012-2013
happening + video + documentation 


웹상에 올려져있는 영상이 없어서 너무 안타깝다.
벌인 해프닝 영상과 함께 나오는 글이 죽여준다(물론 나는 번역된 한글자막으로 읽었지만.)
http://cargocollective.com/jonathasdeandrade-eng








김성환 Sung Hwan Kim, 게이조의 여름

낯선 형식이 무척 즐겁고 반갑게 다가온다. 여러가지를 함께 엮은 힘이 역시 또 죽임.


보다 자세한 리뷰는 나중에. 내 영상편집부터 일단 잘하자


언젠가 어느날






















































그 날에 대비해 지금을 아무리 사려깊고 빠르게 움직인다해도
나는 절대 아빠의 마음을 따라잡을 수 없을 것이다.

내 인생보다 더 긴 기다림과 내 계획보다 더 깊은 절절함을 한 톨이라도 알 마음이 있다면
함부로 행동하지 말자 나를 쉽게 괴롭히지 말자

Oct 23, 2014

오늘의 마지막 딴짓 : 최근 근황


그러고보면 전 블로그에서는 이런식으로 나의 요즘을 기록하곤 했었구나





거대한 설치 작업을 하려고 장소물색하느라 바빴다.
나는 공사장 주변에 있는 물건들을 되게 좋아한다.
그리고 아저씨들의 타이포 그래피






매일 보고싶다.







광주 비엔날레에서 제일 좋았던 영상 작업 중 하나의 일부인데
응? 블로그스팟엔 안올라가지는건가 흥칫핏
내 마음속에만 간직하는 것으로..



















평생 이사하는 게 인간의 삶이겠지
근데 이건 이름이 너무 세서 슬프다





11월 초에 작업실을 빼야한다.
여름에 땀뻘뻘 흘리며 친구들 고생시키며 이만원이나 주고 사왔는데
작업에 쓰지도 못하고 저렇게 모셔두고 있다






졸전회의 집중 안한대요








9월부터 계속 되고 있는 이 작업은 옮기는게 제일 문제였다.
너무너무 무겁고 이동이 절대 간편하지 않다.
집이라는 게 그런거겠지..








그런 의미에서 긴장되고 초라하고 지칠대로 지친 셀피
(왜?)





안녕










한 작업 하는 동안 다른 퍼포먼스 영상도 촬영할 요량이었는데
한꺼번에 두개는 역시 못하겠더라. 마침 장례식 갈일도 생겨서 다 해논 밥에 재를 확 뿌려버렸다. 하지만 사실 준비가 안되어있어서 못 찍은게 크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하면서 여러밤을 잠도 잘 못자면서 끙끙대기만 했다. 새벽에 깨서 고물상에 일찍 가기도 했었다.
사람들 여럿 쓰는 일만큼은 당연한 소리지만 준비는 적어도 전전날에는 다 되어있어야겠다..고 직접 살로 교훈을 얻는 시간이었다.











대학원을 준비하는 두 남매
빨리 졸업했음 좋겠다 싶다가도 그 말 쉬이 뱉지 않는다.
당췌 몇살인지 여자인지 애매한 존재로 변모해가는 나










분명 그리워질것같다고.
그리워하는 것은 단순 장소는 아니구 이때의 시간과 사람들이다.
더더욱이 다시 반복되지 못할 조합이겠지













새콤달콤이 작게씩 나누어져 있는 이유는 다 따로 있는거다.
절대 한통을 혼자 다 먹어서는 안된다.
(엄청 늬끼해)

유투브에서 피아노 학원에서 날 법한 소리들 음원 찾다가 발견한 것들







뭐지 이 재기발랄함은.






뭐지 이 귀여움은..







이 친구는 뇌성마비라고 한다. 손가락 운동이 잘 안되는데 삼 년째 치고 있다며 격려차원에서 저기 저 선생님 본인이 찍어 올리셨나보다.
장애를 뛰어넘은 사례이면서 신동이니 천재니 불리는 피아노 연주자들의 이름을 숱하게 듣는다. 물론 그들이 대단한것 맞다. 그런데 장애의 범주로 묶이는 비슷한 처지에서 뛰어나지는 않지만 일종의 재활목적으로, 혹은 삶의 어떤.. 포기치 않을 의지, 혹은 삶을 연장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가느다란 실오라기 행위로서 그것을 지속하는 사람들도 있다. 아무의 시선도 닿지 않는 곳에서.
연주가 되게 우아하면서 구슬프다.








하안낫! 두울 세엣 네엣




 피아노 학원이라는 키워드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어린시절에 접속할 수 있다는게 너무나도 신기하다.
 제법 많은 사람들이 피아노를 배우는 경험에 대한 나름의 향수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어렸을 때 나도 피아노를 배웠었는데. 상계동에 살던 시절에는 오빠랑 나를 가르치러 방문렛슨 선생님이 오셨었다. 바이엘을 다 떼갈 무렵 하루는 갑자기 악보를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 날이 있었다. 여전히 영문모를 일이나 이 실선들과 검정색 점같은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도레미파솔라시도가 무엇인지, 열 손가락이 어떤 음계를 누르게 되는지 갑자기 한순간에 모두다 까먹은 것이다. 선생님은 이미 시이작!을 외치셨고 나는 하는 수 없이 뚫어져라 악보를 보며 가만히 앉아있었다. 뭔지 아무것도 모르겠다고 말하자 선생님이 까마귀고기를 먹었냐며 엄청나게 화를 내셨다.
 또 하루는 렛슨을 기다리면서 집에서 탱자탱자 놀고 있는데 선생님이 도착하시기 십분 전에 그제서야 그 날 간단한 쪽지 시험을 보기로한게 생각이 난거였다! 악상기호들이 무슨 뜻인지 맞추는 테스트였는데 아무것도 외우지를 못했던 것이다! 당시 어린 나에게 이 쪽지시험이라는 것은 인생중에 아직까지 경험해보지못한것이었고 그래서 몹시 당황했다. 아무도 알려주지도 않았는데 작달만한 꼬마는 알아서 컨닝페이퍼를 만들었고 책상아래에 갖가지 보물을 넣어두던 녹색 상자에다가 얼른 집어넣었다. 선생님은 도착하셨고 나를 보시자마자 그래 아람아 쪽지시험보자 하셨다. 자그마한 종이였나 문제가 써있는 것을 주셨고, 나는 엄마가 선생님을 뵈러 들어오신 틈을 타 어 선생님 잠시만요 하고 그 상자로 달려가 쭈그린채 얼른 보고 다시 와서 앉아 문제를 풀려고 했다. 안타깝지만 제키보다 높은 피아노 의자에 앉자마자 자꾸 악상기호는 헷갈렸고-엎어진 모자와 뒤집어진 모자는 대체 무슨 뜻이란말인가-어 선생님 잠시만요, 상자로 쪼르르 가기를 나는 계속 반복하며 어설프게 컨닝을 했다. 결국 또 혼났다.

 그래도 세번째 경험은 제법 귀엽다. 하루는 왠지 모르게 오늘은 정말로 열심히 할거야!!!라며 굉장히 기운차게 피아노학원에 갔다. 학원이라지만 옆동에 렛슨하시는 선생님 댁에가서 피아노 수업을 듣고 오는 식이었는데, 그날은 정말이지 콧구멍으로 바람을 쇡쇡거리며 열심히 쳤다. 뭔가 해냈다는 마음에 집에가려고 건물 현관을 나서는데 경비아저씨가 날 붙잡으시며 얘 꼬마야 괜찮니 하셨다. 나는 양 콧구멍으로 코피를 흘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날

어느 누구와 만나도 어떤 이야기를 나누어도 혼자가 되는 날,
그냥 일만 하나 더 떠맡게 되는 날
너의 애정을 과식하고 싶었다만 한 번 더 굶주림을 느끼는 날
해도 밉고 달도 밉고 그냥 베개가 내 머리를 싹둑 삼켜주었으면 싶은 날
지구가 폭발하고 그냥 공기 중 분자가 어서 되었으면 싶은 날

아버지가 보고싶다
아버지가
보고싶다

아버지 이름을 모를리가 없으나 불러도 소용이 없을까봐
내가 그렇게 멀리와있는가봐 부르기를 주저하는데
그래도 아버지가 보고싶다
아버지가
보고싶다


Oct 21, 2014

어제 오늘 내일의 실제 이야기

1.
나는 닉네임 ‘안함’으로 불리는 흔한 미대 졸업생이다. 20대 대부분을 예술학도의 신분으로 살면서 고귀한 예술제도 안전망에서 아름답게 헤엄치며 노닌 장본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안함’을 닉네임으로 정한건 내가 학부 졸업반이었을 때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학점 미달의 이유로 예술학도 신분을 연장하고 있을 때다. 당시는 예술 학도라는 신분이 슬슬 끝나 감에 따라 여느 수천 명의 학도들과 마찬가지로 불안했던 시기였고, 그에 따라 다음 내가 갖게 될 신분이 무엇일지 알아보려고 여기저기 두리번거리고 있던 시기였다. 바로 그때 내 앞에서 명동의 네온사인처럼 현란하게 불빛을 뿜어내고 있었던 것들은 문화예술 지원금, 예술가 레지던시, 청년작가지원금, 예술창작지원금, 문예진흥기금, 차세대 예술인력육성사업, 유망예술지원사업, 시각예술창작 및 전시공간지원 등등 몇 개 안 되는 단어의 조합으로 무한히 뽑아낼 수 있는 마법의 이름들이었다.

예술가 지원금(앞에서 말한 수많은 마법의 이름들을 감히 통칭해서 부르겠다.)은 어느덧 소위 부잣집 자식이 아니라면 어떻게 해서든 받아야 이 땅에서 그나마 굶어 죽지 않고 예술을 할 수 있는, 그리고 더불어서 예술가라는 직위를 수여받을 수 있는 하나의 필수조건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모두가 알다시피 한정된 자원이 있으면 그 다음은 불 보듯 뻔한 스토리가 이어진다. 설상가상으로 그마저 제 역할을 다 하는 자원도 아니지만, 무한 경쟁에 내몰린 이들은 그것을 가릴 때가 아니었다. 금싸라기 땅이 되어버린 예술가 지원금은 학부시절 ‘순수한 예술’만 공부해오던 나에겐 그 시작 절차부터 진입 장벽이 높았다. 처음 담배를 잡았던 학창시절 그 떨리는 마음으로 인터넷에서 지원서를 다운로드 받고 파일을 열던 그 순간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대문짝만 하게 쓰여 있던 ‘사업 계획서’. 사업 계획서라니?! 난 고귀한 예술을 하는 사람이오! 사업 계획서라니?! 하지만 이런 해프닝 아닌 해프닝도 시간이 지나면 무뎌지기 마련. 반복 학습의 결과로 나는 얼추 복잡한 서류들을 읽어내는 능력이 생겼고, 어떤 단어들을 써야 하는지 감을 잡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전히 내 마음 한편에는 여러 가지 질문들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질문들은 다시금 내게 물었다. ‘왜 지원을 받아야 하는 거지?’ 물론 당시에 나는 혁명가가 아닌 이상 큰 틀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지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스스로 내고 싶어 했고, 그 답을 찾는 과정이 결코 쉽지 않으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려면 스스로 결단이 필요했다. 그래서 나 자신에게 붙인 이름이 바로 ‘안함’이었다.

처음에 섣불리 선언된 나의 거부들은 역설적으로 거부된 대상을 좀 더 가까이 들여다보게끔 만들었다. 예술가 지원금은 내 생각보다 훨씬 더 큰 맥락을 갖고 있었다. 단순히 돈의 문제를 떠나 인식의 문제, 그리고 더 나아가 사회적 존재에 대한 문제로 다가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하지만 내가 여기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심사 기준, 사전/사후 지원 방식, 공공기금의 공공화, 국가 주도의 예술 지원 사업, 무한 경쟁의 논리 등과 같은 예술가 지원금으로 파생된 단편적인 현상들이 아니다. 조폭 영화에서 가장 멋있는 배우는 말한다. ‘난 한 놈만 패.’ 그 한 놈을 설령 잘못 잡았더라도 일단 잡았으면 되돌릴 수 없다. 그래서 내가 지금 잡은 그 운도 지지리도 없는 한 놈은, 바로 ‘예술가 지원이 결과로 도출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다.


2.
예술가 지원이 결과로 도출될 수 있을까. 이 질문 속에는 중요한 단서가 하나 숨어 있다. 예술이 어떠한 결과를 만들어내는지 혹은 만들어내지 못할지는 차후의 문제이다. 여기서 찾을 수 있는 것은 ‘결과가 도출되는 예술을 지원하겠다.’라는 예술가 지원금의 주체 의도이다. 이때 결과는 미학적 의미에서 말하는 과정-결과의 의미가 아니라, 사회-문화적인 결과의 의미로써 제도화된다. 그 결과가 어떻게 의미화되며 제도화되는지를 한 번 파헤쳐보자.

예술 지원금의 가장 첫 번째 기준은 지원받는 대상이 예술가인가를 증명하는 것이다. 아니 적어도 대상자가 예술로써 사회-문화적인 기여를 할 수 있는지를 증명하는 것이다. 그리고 연이어 파생되는 두 번째 기준, 바로 지원받는 대상의 예술행위에 대한 예측 가능한 미래를 담보한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기준으로 예술가 지원금의 주체는 예술가를 규정하는 프레임과 예술행위의 범위를 예측하는 가이드라인을 갖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지원받는 혹은 받으려는 자칭 예술가들을 포함한 여타 사회 전반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술가를 규정하는 데에 각기 다른 대답을 하고 있다. 이는 곧 우리 사회가 아직 예술에 대한 규정을 합의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술가 지원금의 주체들은 배타적인 입장을 고수하고 있고 또 그럴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흔히 생각할 수 있는 관료적인 실무 때문이라는 이유를 넘어서 오랫동안 우리가 가져온 커다란 인식이 이러한 괴리를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을 ‘생산의 환영’이라고 생각한다.

‘생산의 환영’은 예술행위뿐만 아니라 인간이 행동하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지배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체제에선 모든 행위는 잠재적으로 생산 가능한 그리고 동시에 소비 가능한 경제적 활동으로 규정된다. 반대로 말하면 어떤 행위가 경제적 활동으로 귀결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비전문적인 행위, 잉여 활동, 아마추어리즘, 취미, 혹은 더 나아가 실패한 행위 내지는 비생산적인 행위가 되어버린다. 그리고 이렇게 수면 아래로 침식한 행위들은 보호받지 못할뿐더러 존재 자체에 위협을 받는다. 위에서 언급한 예술가 지원금의 주체로부터 나오는 예술가와 예술행위에 대한 규정은 바로 여기서 ‘생산의 환영’과 맞물리게 되는 것이다. 다만 경제적 생산에서 문화적 생산으로 이름만 바뀌었을 뿐, 이 두 개념 사이에는 어떠한 차이도 있지 않다. 예술가를 규정하는 것에서부터 예술행위의 결과를 담보하는 것까지, 이 모든 것이 예술을 단순히 사회-문화적인 기여 역할을 하는 생산-소비 형태의 개념으로만 이해하기 때문이다.

예술가 지원은 단어의 뜻과는 다르게 결국 예술가를 제도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오늘날의 예술가는 생산의 환영을 꿈꾸며 무한 경쟁에 내몰려 끊임없이 스스로 증명하고 자신의 행위가 가져올 경제(문화)적 효과를 홍보해야 한다. 나는 묻고 싶다. 이것이 정말 나와 그대가 그토록 원하고 꿈꿔왔던 것이었던가.


3.
예술행위의 결과란 무엇일까. 그것은 작품도 아니고, 전시(상영, 공연, 출판 등)도 아니고, 예술가의 직업의식 표출도 아니고, 노동의 성취도 아니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그 시작이 어디인가를 생각해봐야 한다. 예술행위는 그 행위를 만드는 동기나 목적의식, 다시 말해 의도가 선행된다. 그러나 의도가 곧 예술행위의 시작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의도는 어느 불특정한 순간에 나올 수 있으며 자신의 삶 외부에서도, 심지어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의 외부에서도 나올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대정신을 만드는 것은 지배계급의 권력 유지용 서류들이 아니다. 반대로 서류에 기재할 수 없는 것들, 존재를 규정 받지 못한 것들, 경제적 생산을 하지 못하는 것들, 예측 가능한 미래를 담보하지 못하는 것들이다. 이렇게 수면 아래에 침식된 생각과 행동들이 불현듯 불특정한 이의 몸 안에서 터져 나오는 것이 바로 의도이다. 그리고 예술가는 그 불특정한 이들 중에서 예술이라는 표현 방법을 가진 이에 불과할 것이다. 예술행위는 결코 한 예술가 개인의 의지나 역량으로 시작되지 않는다. 그것의 시작은 ‘공동체적 공명현상’이다.

그렇다면 예술행위의 과정은 어떠한가. 한 미술작가의 전시가 열렸다고 생각해보자. 한 작가가 미술 작업을 어떠한 의도를 갖고 했고 그 결과로 여러 기관 및 개인들이 관계되고 전시가 열렸으며 또 여러 사람들이 그 전시장에 모였다. 간단한 하나의 문장으로 열거한 이 일련의 과정들은 보기와는 다르게 결코 단순하지도, 필연적이지도 않을뿐더러 어느 과정 하나가 그다음 과정을 보장하지도 않는다. 바로 여기에 예술행위가 갖는 또 다른 특성, ‘임기응변의 상태 참조’가 있다. 행위가 일어나는 그 시간과 공간 그리고 그것들에 매개된 관계 주체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임기응변의 상태 참조’는 행위로 하여금 어떠한 목적에도 얽매이지 않게 만든다. 매 순간 환경과 끊임없이 호흡하기 위해 주체를 해방시켜야 한다. 상품화된 주체성, 즉 스스로 규정하고 스스로 독점하는 배타적인 자기인식은 공동체적 공간인 여기서 이제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그래서 예술 행위자의 의도와 예술행위가 만들어지는 과정 그리고 예술행위가 일어나는 현장은 서류에서부터의 일탈을 꿈 꿀 수밖에 없다.


4.
예술가 지원금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술과 일상이 분리되면서 우리는 전자가 후자를 보완해줄 것이라는 착각 속에 갇혀 버렸다. 그것이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공공예술이고 공동체 예술이며 지역 예술이다. 하지만 그것은 보완이 아니라 오히려 예술과 일상의 분리를 촉진하는 ‘상호 착취-참여’의 관계이다. 예술과 일상 사이에는 예술가 지원금의 주체와 같은 매개자가 존재한다. 그리고 매개자는 필연적으로 권력자일 수밖에 없다. 결국 예술과 일상이 서로를 착취하고 그 착취에 서로 참여하면서 매개자를 강화시키는 꼴을 만드는 것이다.

예술 활동을 공동체적 활동으로 본다면 상황이 많이 달라진다. 예술의 영역이 예술을 쫓는 이들로 하여금 그곳에 들어가야 할 조건으로 만들었다면, 공동체의 영역은 그 획득해야만 했던 예술을 예술의 영역에서 일상의 영역으로 재배치시킨다. 고유한 예술의 영역에서 예술이 개인(혹은 사회-문화적으로 상품화된 개인)의 성취와 경제(문화)의 기여를 위한 활동이라면, 공동체의 영역에서는 그것이 생활의 일환으로 탈바꿈된다. 전자가 생존을 위한 노동이자 매개된 삶이라면, 후자는 공존을 위한 해방이자 직접적인 삶이다. 요컨대 공동체의 영역에서 예술은 매개된 삶으로부터 지배당하지 않는 방식을 끊임없이 도모하게 만들고, 고립된 주체를 해방시키는 역할을 하고, 낡은 가치관을 바꾸려는 시도이며, 그 형식에 있어서 상품화됨을 거부하는, 보다 더 현실적이고 일상적인 활동이다.

공동체라는 것을 일단 통상적인 편견을 버리고 볼 필요가 있다. 공동체를 다른 두 사람 이상이 모여서 생활이나 행동 또는 목적을 같이 하는 집단이라고 쉽게 생각할 수 있는데, 공동체를 인간의 소유물에 한정 지어서 보기보다는 그 의미를 확장시켜야 한다. 나를 담고 있는 공간, 그 공간에서 공존하고 있는 모든 생명, 시간을 뛰어넘어 의식을 공유하고 있는 모든 개체들, 심지어 이 모든 것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조차도 공동체라고 말할 수 있다. 나는 혼자서 존재할 수 없으며, 모든 것과의 관계 속에서 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나는 일상생활 속에서 수많은 공동체를 발견하지만 그것들이 파괴되는 것도 수없이 본다. 혹자는 진정한 공동체는 지속 가능한 조건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그 의견에 전적으로 반대한다. 공동체는 우리의 삶 속에서 그 누구도 모르는 사이에 생성되며 끊임없이 해체되는 것을 스스로 반복한다. 다시 말해 공동체는 생성의 단계, 즉 관계가 이루어지는 그 순간이 곧 절정이며 쇠퇴이다. 그 짧은 찰나가 모든 것을 지배하며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된다. 예측 가능한 미래를 보장하지 못함은 역으로 새로운 가능성의 길을 만들어낸다. 이 만남의 기쁨과 이별의 슬픔이 공존하는 공동체는 교환가치를 뛰어넘으며 자본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난다. 모든 것이 교환가치를 갖게 된 지금 여기서, 공동체를 꿈꾼다는 것은 어떤 이상향으로의 진보가 아니다. 그것은 본래 우리가 갖고 있었던, 잊고 있었던, 그리고 묵살되었던 본능을 되찾는 것인 동시에 공존하는 주체들의 직접적인 삶을 위한 투쟁이다.


5.
예술가 지원금은 아이러니하게도 나로 하여금 다른 방식의 삶을 찾도록 유도한 여러 가지 지표들 중의 하나이다. 미답의 지대를 찾아가는 활동에서 올바른 길을 걷는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지점에서 다른 삶의 방식, 다른 삶의 공간 그리고 다른 삶의 관계들을 만들어내는 과정이야말로 예술 활동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생존을 기관에 맡기는 방법보다는 공존을 위해 스스로 조직화하는 일 또한 예술 활동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생활의 기점으로부터 무엇을 먹고사는지, 누구와 먹고사는지, 무엇을 하며 먹고사는지를 직접적인 삶의 에너지로 바꾸는 일 또한 예술 활동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누군가는 이렇게 질문할 수도 있겠다. 사실 예술가 지원금을 받을 능력이 안 돼서 그렇게 하는 거냐고. 이에 대한 대답으로 나는 마지막으로 이 말을 하고 싶다.

“예술가 지원금, 저도 참 좋아하는데요, 제가 한 번…”


 안함


얼룩진 5호 , [예술과 제도] 예술가 지원금, 저도 참 좋아하는데요. 제가 한 번…, http://alllookzine.net/index.php/archives/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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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졸업심사와 졸업전시 준비로 혼이 나갈정도로 바쁜 와중에 나는 돈을 벌 필요를 강렬히 느끼게 되었다. 최근까지 신사동 모 미술학원에서 S대를 지망하는 친구들을 실컷 가르치는 동안엔 아무 걱정이 없었는데, 수시 철이 지나고 수많은 아이들이 떨어져 나가자 학원에서는 '새끼선생님'들은 필요치 않게 되었던 것이다. 웃긴 건 아직도 내가 가르치던 친구들 중에 누가 1차에 합격했는지 알지 못한다는 것과, 더이상 나오실 필요 없어요 라는 통보 없이도 나는 아주 자연스럽게, 잘렸다는 것이다.
 네오룩을 몇주간 들락날락했다. 위시캣을 잠시 들여다보다가 알바몬을 뒤지기 시작한다. 결국 그 사이 어딘가이다.
 학원강사일을 하다보니 절대적인 수로는 사실 그것조차 많은 양은 아닐지 몰라도, 도저히 최저시급을 조금 웃도는 수준의 일을 하기로 다시금 마음먹는 일이 참 쉽지가 않고 서럽다. 그러니 네오룩에 다시 매달린다. 전문 미술 인력을 원하는 일들. 이것도 가난하기는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날짜나 기간때문에 또 마구마구 부딪친다. 다시 알바몬을 향한다. 다시 네오룩을 향한다. 다시 알바몬. 다시 네오룩. 절망스럽게 노트북을 접고 밖에 나와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거리를 걷는데, 오늘 요망한 꽃무늬가 박힌 긴 치마를 입고 백팩을 맨 나를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상상해보았다.

 경제적인 가치로 환산된 나는 이 세상에서 몹시도 싸구려일 수 있다. 그럴때가 훨씬 많겠지.
내가 이런 교육을 받으려고 그간 얼마나 돈을 들이고 수고해왔는데 ! 라며 하소연 섞인 투정을 부리고 싶은 게 아니다. 예술의 영역에서 우리가 하는 일들, 그 관련된 모든 시간들이, 실제적인 삶 속에서, 정말로 우리가 숨쉬고 밥먹고 걸어다니는 우리의 삶 속에서, 이렇게 무력하게 차단당하고 거세당하는 걸- 그냥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제로의 가치로 받아들여지는걸 더이상 당연히 받아들여서는 안되겠다는 거다. 그럴 수 없다는 거다. 그냥 이렇게, 숙이고 들어가고 싶지 않다는 거다.
우물은 목마른 사람이 파낸다지. 동료들을 찾고, 맨손으로 돌파구를 직접 파내야할 것 같다.

Oct 18, 2014

Hominid



진찰실 벽면에서 보았을 법한 낯선 표현방식인데 내용은 낯설지가 않아서 더 무섭다.
인간과 동물을 조합해놓은 몸의 형태 덕분에 대상이 인간으로 읽혔다가, 동물로서 다시 읽히다가를 반복한다. 그렇게 인간의 모습과 동물의 생존원리가 간단하게 겹쳐진다.

문제는 새가 거미에게 잡아먹힌다는 것이다. 새가. 거미에게.

어떤 부끄러움



Adele - Make you feel my love

When the rain is blowing in your face,
And the whole world is on your case,
I could offer you a warm embrace
To make you feel my love.

When the evening shadows and the stars appear,
And there is no one there to dry your tears,
I could hold you for a million years
To make you feel my love.
....





세상에서는 계속 '주기'만 하면 결국 상대가 달아난다고 가르친다.
그러니 적당히 '주고' 세게 나갈 줄도 알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계속 이해'해주면' 너만 힘들다고 가르친다.
더 나은 무언가가 저 너머에 있으니 너 한몫 잘 보호해야한다고 가르친다.
그런데 나는 그렇게 배우지 않았다.

'준다'는 건 뭔가 우위에 있는 상태 내지는 더 많이 가지고 있음을 의식하는 표현이라 느껴진다. 그렇다면 사랑은 사실은 -엄밀히 따지자면- 저 단어와는 어울리지 않는, 어울려서는 안되는 것이라고 믿는다.

주는 게 아니고 그냥 하는 것일텐데.
분명 그렇게 배웠는데,
자꾸만 어느새 높아져 있는 내 마음을 목격하거나 말로 표현으로 상대방을 후려치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는 일이 참 숱한것같아서
이렇게 내 뒷모습을 돌아보게 되는 시간이면 미안해서, 부끄러워서, 마음이 아주 사무친다.


왜 그랬어 됐어 대체 왜그래 싫어 안해 이렇게는 못해? 아니야 나중에

미안해 고마워 좋아 사랑해 잘했어 훌륭해 멋지다 수고했어 괜찮아


오늘 지금 여기 가까운 사람에게부터
언제든 쉴 수 있는 튼튼한 그늘이고 싶다.
그게 내가 배운 사랑이다.

Don't look back in anger






Oct 7, 2014

<피로사회>, 한병철, 문학과지성사 3

" ... 비록 이들 중 그 누구도 다른 존재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 순간ㅇ는, 나의 순간 속에서만큼은, 모두가 나란히 함께 있는 것이다." 한트케의 피로는 자아 피로, 즉 탈진한 자아의 피로가 아니다. 한트케는 오히려 "우리-피로"라고 말한다. 이때 나는 너한테 지치는 게 아니라, 한트케의 표현대로 말하자면 너를 향해 지치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 앉아 있었고 말을 하기도하고 침묵을 지키기도 하면서 공동의 피로를 즐겼다. 피로의 구름이, 에테르 같은 피로가 당시 우리를 하나로 엮어 주고 있었다."


..성령을 맞는 오순절의 사람들을 나는 언제나 피로한 모습일 거라고 상상한다. 피로의 영감은 ㅁ 엇을 할 수 있는지 보다는 무엇을 내버려두어도 괜찮은지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 ... 그것은 모든 감각이 지쳐 빠져있는 그런 상태가 아니다. 오히려 피로속에서 특별한 시이 깨어난다. ... 짧고 빠른 과잉 주의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는 저 길고 느린 형식의 주의 말이다.


탈진의 피로는 긍정적 힘의 피로다. 그것은 무언가를 행할 수 있는 능력을 뺴앗아간다. 영감을 주는 피로는 부정적 피로, 즉 무위의 피로다. 원래 그만둔다는 것을 뜻하는 안식일도 모든 목적 지향적 행위에서 해방되는 날,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리면 모든 염려에서 해방되는 날이다. 그것은 막간의 시간이다. 신은 창조를 마친 뒤 일곱쨰 날을 신성한 날로 선포했다. 그러니까 신성한 것은 목적 지향적 행위의 날이 아니라 무위의 날, 쓸모없는 것의 쓸모가 생겨나는 날인 것이다. 그날은 피로의 날이다. 막간의 시간은 일이 없는 시간, 놀이의 시간으로서 본질적으로 염려와 노동의 시간이라고 할 수 있는 하이데거의 시간과도 구별된다. 한트케는 이러한 막간의 시간을 평화의 시간으로 묘사한다. 피로는 무장을 해제한다. 피로한 자의 길고 느린 시선 속에서 단호함은 태평함에 자리를 내준다. 막간의 시간은 무차별성의 시간, 우애의 시간이다. "내가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은 평화 속의 피로, 막간의 시간속에서의 피로다. 그리고 그 시간은 평화로웠다 .... 또한 놀라운 것은 그곳에서 나의 피로가 때때로 찾아오는 평화에 함께 기여하는 듯이 보였다는 사실이다. 피로한 시선이 폭력과 싸움의 몸짓, 심지어 불친절한 행동마저도 이미 그 싹에서부터 부드럽게 가라앉히고 완화하기 때문이었을까?"

 한트케는 내재적 성격을 지닌 피로의 종교를 구상한다. "근본적 피로"는 자아의 논리에 따른 개별적 고립화 경향을 해소하고 친족관계에 의존하지 않는 하나의 공동체를 만들어낸다. 그 속에서 어떤 특별한 박자가 일어나 하나의 화음을, 친근함을, 어떤 가족적 유대나 기능적 결속과도 무관한 이웃관계를 빚어낸다. "피로한 자는 또 다른 오르페우스로서 가장 사나운 동물들조차 그의 주위에 모여들어 마침내 피로를 나눌 수 있게 된다. 피로는 흩어져 있는 개개인을 하나의 박자 속에 어울리게 한다." 무위를 향해 영감을 불어넣는 저 "오순절의 모임"은 활동사회의 반대편에 놓여 있다. 한트케는 거기 모인 사람들이 "언제나 피로한 상태"라고 상상한다. 그것은 특별한 의미에서 피로한 자들의 사회이다. "오순절-사회"가 미래사회의 동의어라고 한다면, 도래할 사회 또한 피로사회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피로사회>, 한병철, 문학과지성사 2

 긍정성의 과잉은 자극, 정보, 충동의 과잉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그리하여 주의 구조와 경제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지각은 파편화되고 분산된다. 업무 부담의 증가도 시간과 주의를 관리하는 특별한 기법을 요구하는데, 그러한 기법은 다시 주의구조에 영향을 미친다. 멀티태스킹이라는 시간 및 주의 관리 기법은 문명의 진보를 의미하지 않는다. 멀티태스킹은 후기 근대의 노동 및 정보사회를 사는 인간만이 갖추고 있는 능력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퇴화라고 할 수 있다. 멀티태스킹은 수렵자유구역의 동물들 사이에서도 광범위하게 발견되는 습성이다. 야생에서의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기법이 멀티태스킹인 것이다.

 먹이를 먹는 동물은 이와 동시에 다른 과업에도 신경을 써야한다. 이를테면 경쟁자가 먹이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하고, 먹는 중에 도리어 잡아먹히는 일이 없도록 경계를 늦추지 않아야 하며, 동시에 새끼들도 감시하고, 또 짝짓기 상대도 시야에서 놓치지 않아야 한다. 수렵자유구역에 사는 동물은 주의를 다양한 활동에 분배하지 않을 수 없고 그런 까닭에 깊은 사색에 잠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는 먹이를 먹을 때도, 짝짓기를 할 때도 마찬가지다. 동물은 자신이 마주하고 있는 대상에 사색적으로 몰입할 수 없다. 언제나 그 배경의 사태도 계속 정신적으로 처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멀티태스킹 뿐만 아니라 컴퓨터 게임과 같은 활동 역시 야생동물의 경계 태세와도 크게 다르지 않는 주의구조, 넓지만 평면적인 주의 구조를 생산한다. 최근의 사회적 발전과 주의구조의 변화는 인간 사회를 점점 더 수렵자유구역과 유사한 곳으로 만들어간다. .. 좋은 삶이란 성공적인 공동의 삶까지를 포괄하는 개념이거니와, 그런 의미에서 좋은 삶에 대한 관심은 날이 갈수록 생존 자체에 대한 관심에 밀려나고 있다.

 철학을 포함한 인류의 문화적 업적은 깊은 사색적 주의에 힘입은 것이다. 문화는 깊이 주의할 수 있는 환경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러한 깊은 주의는 과잉 주의에 자리를 내주며 사라져가고 있다. 다양한 과업, 정보 원천과 처리 과정 사이에서 빠르게 초점을 이동하는 것이 이러한 산만한 주의의 특징이다. 그것은 심심한 것에 대해 거의 참을성이 없는 까닭에 창조적 과정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는 저 깊은 심심함도 허용하지 못한다. 발터 벤야민은 깊은 심심함을 "경험의 알을 품고 있는 꿈의 새"라고 부른 바 있다. 잠이 육체적 이완의 정점이라면 깊은 심심함은 정신적 이완의 정점이다. 단순한 분주함은 어떤 새로운 것도 낳지 못한다. 그것은 이미 존재하는 것을 재생하고 가속화할 따름이다. 벤야민은 꿈의 새가 깃드는 이완과 시간의 둥지가 현대에 와서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고 한탄한다. 이제 더 이상 그 누구도 그런 것을 "자지도, 잣지도"않는다. 심심함이란 "속에 가장 열정적이고 화려한 안감을 댄 따뜻한 잿빛 수건이다." 그리고 "우리는 꿈꿀 때 이 수건으로 몸을 감싼다." 우리는 "수건 안감의 아라베스크 무늬 속에서 안식한다." 이완의 소멸과 더불어 "귀 기울여 듣는 재능"이 소실되고 "귀 기울여 듣는 자의 공동체"도 사라진다. 이 공동체의 정반대편에 있는 것이 우리의 활동 공동체이다. "귀 기울여 듣는 재능"은 깊은 사색적 주의를 기울일 수 있는 능력에 바탕을 둔다. 지나치게 활동적인 자아에게 그런 능력은 주어지지 않는다.

 ... 그러나 사색의 능력이 반드시 영원한 존재에만 묶여 있는 것은 아니다. 떠다니는 것, 잘 눈에 띄지 않는 것, 금세 사라져버리는 것이야말로 오직 깊은 사색적 주의 앞에서만 자신의 비밀을 드러내는 것이다. 또한 긴 것, 느린 것에 대한 접근 역시 오랫동안 머무를 줄 아는 사색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지속의 형식 또는 지속의 상태는 과잉활동성 속에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 이러한 사색적 집중 상태에 이르지 못한다면 시선은 그저 불안하게 헤매기만 할 뿐, 아무 것도 표현해 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예술이란 "표현 행동"이다. 존재를 의지로 대체한 니체조차 인간에게서 모든 관조적 요소가 제거된다면 인간 삶은 치명적인 과잉활동으로 끝나고 말것임을 알고 있었다. "우리 문명은 평온의 결핍으로 인해 새로운 야만 상태로 치닫고 있다. 활동하는 자, 그러니까 부산한 자가 이렇게 높이 평가받은 시대는 일찍이 없었다. 따라서 관조적인 면을 대대적으로 강화하는 것은 시급히 이루어져야 할 인간 성격 교정 작업 가운데 하나이다."


 ... 후기근대의 노동하는 동물은 거의 찢어질 정도로 팽팽하게 자아로 무장되어 있다. 그리고 이는 수동성과는 정말 거리가 먼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개성을 포기하고 유적과정 속에 완전히 녹아들어 간다면 적어도 동물 특유의 느긋함이라도 보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후기근대의 노동하는 동물은 정확히 말해서 전혀 동물적이지 않다. 그는 과도하게 활동적이도 신경과민 상태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근대는 신과 피안에 대한 믿음 뿐 아니라 현실에 대한 믿음까지도 상실하는데, 이러한 상황은 인간 삶을 극단적인 허무 속에 빠뜨린다. 유사 이래 삶이 오늘날처럼 덧없었던 적은 없었다. ... 그러나 후기근대의 자아는 완전히 개별적으로 고립되어 있다. 죽음의 기술로서 죽음에 대한 공포를 덜어주고 지속의 감정을 불러일으켜야 할 종교도 이제 그 시효가 다 되었다. 세계는 전반적으로 탈서사화되었으며(근대에 이르러 삶에 가치와 의미를 부여해줄 이야기가 붕괴되었다는 의미.) 탈서사화는 삶을 벌거벗은 생명으로 만든다. 노동자체가 적나라한 활동이다. ... 서사성을 지닌 죽음의 기술이 존재하지 않는 까닭에 벌거벗은 생명 자체라도 건강하게 유지해야한다는 강박관념이 생겨난다. 이미 니체가 말했듯이 신의 죽음 이후에는 건강이 여신의 자리에 등극한다. 만일 벌거벗은 생명 자체를 넘어서는 의미 지평이 존재한다면, 건강의 가치가 이토록 절대화될 수 는 없었을 것이다.




... 진정 다른 것으로의 전환이 일어나려면 중단의 부정성이 필요한 것이다. 행동의 주체는 오직 잠시 멈춘다는 부정적 계기를 매개로 해서만 단순한 활동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우연의 공간 전체를 가로질러 볼 수 있다. 머뭇거림은 긍정적 태도는 아니지만, 행동이 노동의 수준으로 내려가는 것을 막는 데 필요불가결한 요소이다. 오늘날 우리는 중단, 막간, 막간의 시간이 아주 적은 시대를 살고 있다. <활동적 인간의 주된 결함>이라는 아포리즘에서 니체는 다음과 같이 쓴다. "활동적인 사람들은 보통 고차적 활동을 하는 법이 없다 ... 이런점에서 그들은 게으르다 ...돌이 구르듯이 활동적인 사람들도 기계적인 어리석음에 걸맞게 굴러간다." 활동에는 다양한 종류가 있다. 기계처럼 어리석게 계속되는 활동은 중단되는 일이 거의 없다. 기계는 잠시 멈출 줄을 모른다. 컴퓨터는 엄청난 연산 능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리석다. 머뭇거리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힘에는 두 가지 형태가 있다. 하나는 긍정적 힘으로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힘이고, 다른 하나는 부정적 힘으로서 하지 않을 수 있는 힘, 니체의 말을 빌린다면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힘이다. 이러한 부정적 힘은 단순한 무력함, 무언가를 할 능력의 부재와는 다른 것이다. 무력함은 단순히 긍정적인 힘의 대립항일 뿐이다. 무력함은 무언가를 해내지 못하는 것으로, 결국 그 무언가에 대한 종속이며 그 점에서 긍정적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부정적 힘은 무언가에 종속되어 있는 이런 긍정성을 넘어선다. 그것은 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이다. 지각하지 않을 수 있는 부정적 힘 없이 오직 무언가를 지각할 수 있는 긍정적 힘만 있다면 우리의 지각은 밀려드는 모든 자극과 충동에 무기력하게 내맡겨진 처지가 될 것이고, 거기서 어떤 "정신성"도 생겨날 수 없을 것이다. 무언가를 할 수 있는 힘만 있고 하지 않을 힘은 없다면 우리는 치명적인 활동과잉 상태에 빠지고 말 것이다. 무언가 생각할 힘밖에 없다면 사유는 일련의 무한한 대상들 속으로 흩어질 것이다. 돌이켜 생각하기는 불가능해질 것이다. 긍정적인 힘, 긍정성의 과잉은 오직 계속 생각해나가기 만을 허용하기 때문이다.

<피로사회>, 한병철, 문학과지성사 1


 지난 세기는 면역학적 시대였다. 즉 안과 밖, 친구와 적, 나와 남 사이에 뚜렷한 경계선이 그어진 시대였던 것이다. 냉전 역시 이러한 면역학적 도식을 따른다. 지난 세기의 면역학적 패러다임 자체가 철저하게 냉전의 어휘와 본질적으로 군사적인 장치의 영향 아래 놓여 있었다. 면역학적 행동의 본질은 공격과 방어이다. 생물학적 차원을 넘어서 사회적 차원에 이르기까지 전 사회를 장악한 이러한 면역학적 장치의 본질 속에는 어떤 맹목성이 있다. 낯선 것은 무조건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면역 방어의 대상은 타자성 자체이다. 아무런 적대적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은 타자도, 아무런 위험을 초래하지 않는 타자도 이질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제거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면역의 근본 특징은 부정성의 변증법이다. 면역학적 타자는 자아 속으로 침투하여 자아를 부정하려고 하는 부정 분자이다. 자아는 타자의 이러한 부정성으로 인해 파멸하는데, 이를 피하려면 자아 편에서 타자를 부정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자아의 면역학적 자기주장은 부정의 부정을 통해 관철되는 것이다. 자아는 타자의 부정성을 부정함으로써 타자 속에서 자기 자신을 확인한다. 면역학적 예방법, 즉 예방접종 역시 부정성의 변증법을 따른다. 이 경우 면역 반응을 촉발하기 위해 다만 타자의 파편만이 자아 속으로 투입된다. 그리하여 부정의 부정은 치명적 위험 없이 이루어진다. 면역 저항체계가 타자와 직접 대결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치명적일 수 있는 훨씬 더 큰 폭력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자발적으로 약간의 폭력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질성의 실종은 우리가 부정성이 많지 않은 시대를 살고 있음을 의미한다. 21세기의 신경성 질환들 역시 그 나름의 변증법을 따르고 있지만, 그것은 부정성의 변증법이 아니라 긍정성의 변증법이다. 그러한 질환은 긍정성의 과잉에서 비롯된 병리적 상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세계의 긍정화는 새로운 형태의 폭력을 낳는다. 새로운 폭력은 면역학적 타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 자체에 내재하는 것이며, 바로 그러한 내재적 성격으로 인해 면역 저항을 유발하지 않는 것이다.



 병원, 정신병자 수용소, 감옥, 병영, 공장으로 이루어진 푸코의 규율사회는 더 이상 오늘의 사회가 아니다. 규율사회는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고 그 자리에 완전히 다른 사회가 들어선 것이다. 그것은 피트니스 클럽, 오피스 빌딩, 은행, 공항, 쇼핑몰, 유전자 실험실로 이루어진 사회이다. 21세기의 사회는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 변모했다. 이 사회의 주민도 더 이상 "복종적주체"가 아니라 "성과주체"라고 불린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경영하는 기업가이다. 정상적인 것과 비정상적인 것을 갈라놓는 규율 기관들의 장벽은 이제 거의 고대의 유물처럼 느껴질 지경이다.

 규율사회는 부정성의 사회이다. 이러한 사회를 규정하는 것은 금지의 부정성이다. '~해서는 안된다'가 여기서는 지배적인 조동사가 된다. '~해야 한다'에도 어떤 부정성, 강제의 부정성이 깃들어 있다. 성과사회는 점점 더 부정성에서 벗어난다. 점증하는 탈규제의 경향이 부정성을 폐기하고 있다. 무한정한 '할 수 있음'이 성과사회의 긍정적 조동사이다. "예스 위 캔"이라는 복수형 긍정은 이러한 사회의 긍정적 성격을 정확하게 드러내준다. 이제 금지, 명령, 법률의 자리를 프로젝트, 이니셔티브, 모티베이션으 대신한다. 규율사회에서는 여전히 '노No'가 지배적이었다. 규율사회의 부정성은 광인과 범죄자를 낳는다. 반면 성과사회는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를 만들어낸다.


 알랭 에렝베르는 우울증을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의 이행기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규정한다. "우울증이라는 병은 권위적 강제와 금지를 통해 인간에게 사회 계급과 성별에 따른 역할을 부여하는 규율적 행위 조종의 모델이 만인에게 자기 주도적으로 될 것, 자기 자신이 될 것을 요구하는 새로운 규범으로 대체되는 순간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 우울한 자는 컨디션이 완전히 정상이 아니다. 그는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요구에 부응하려고 애쓰다가 지쳐버리고 만다."
...그에게 우울증은 자기자신이 되지 못한 후기근대적 인간의 좌절에 대한 병리학적 표현이다. 그러나 우울증을 초래하는 요인 가운데는 사회의 원자화와 파편화로 인한 인간적 유대의 결핍도 있다.


.. 긍정성의 과잉 상태에 아무 대책도 없이 무력하게 내던져져 있는 새로운 인간형은 그 어떤 주권도 지니지 못한다. 우울한 인간은 노동하는 동물로서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물론 타자의 강요없이 자발적으로 그는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이다. 강조적 의미의 자아 개념은 여전히 면역학적 범주다. 그러나 우울증은 모든 면역학적 도식 바깥에 있다. 우울증은 성과주체가 더 이상 할 수 있을 수 없을 때 발발한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일과 능력의 피로이다.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우울한 개인의 한탄은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에서만 가능한것이다. 더 이상 할 수 있을 수 없다는 의식은 파괴적 자책과 자학으로 이어진다. 성과주체는 자기 자신과 전쟁 상태에 있다.

 성과주체는 노동을 강요하거나 심지어 착취하는 외적인 지배기구에서 자유롭다 그는 자신의 주인이자 주권자이다. 그는 자기 외에 그 누구에게도 예속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그 점에서 성과주체는 복종적 주체와 구별된다. 그러나 지배기구의 소멸은 자유로 이어지지 않는다. 소멸의 결과는 자유와 강제가 일치하는 상태이다. 그리하여 성과주체는 성과의 극대화를 위해 강제하는 자유 또는 자유로운 강제에 몸을 맡긴다. 과다한 노동과 성과는 자기 착취로까지 치닫는다. 자기 착취는 자유롭다는 느낌을 동반하기 떄문에 타자의 착취보다 더 효율적이다. 착취자는 동시에 피착취자이다. 가해자와 피해자는 더 이상 분리되지 않는다. 이러한 자기 관계적 상태는 어떤 역설적 자유, 자체 내에 존재하는 강제 구조로 인해 폭력으로 돌변하는 자유를 낳는다. 성과사회의 심리적 질병은 바로 이러한 역설적 자유의 병리적 표출인 것이다.



Oct 6, 2014

오후 4시의 공기

너가 없는 낮 내가 없는 밤
끈덕지게 반복해서 보내다보면 우리 다시 만나있을거라

Oct 5, 2014

언니가 쓰는 글은 한 번 읽고 다 이해했다고 말하기엔 너무 감동적일때가 많아서

안녕하세요.
곧있을 10/8일 (수) 전체회의에 앞서 졸업전시제목에관한 얘기를 덧붙이려고 합니다. 이준용의 말에 공감하며 이런 의견이 나오게 된 맥락과 제목에관한 논의가 좀 더 있었으면하는 마음의 몇가지 근거들을 말씀드리려고합니다. 

어느 금요일 점심시간 임민욱선생님의 졸전제목에 관한 간결한 피드백이 있었습니다. 대강의 내용은 이러합니다.

 작가양성학교의 교육을 받은 우리는 우리가 의도하지 않더라도 학교 바깥의 관심과 주목을 받는다. 그러한 우리들이 뭔가 더 힘있는 메세지를 던져야하지 않겠는가. 
대략 선생님은 한국의 미술입시의 판도를 바꾼 학교의 졸업생들로서 우리가 할 수있고 해야만하는 일들이 있다는 믿음과 기대를 동시에 비치셨던 것 같습니다. 더이상 우리들만의 예술을 한다는 소수자적 태도나,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할 뿐이다 식의 마음자세로는 한예종 조형과에 대한 다른이들의 기대를 져버릴 수 밖에 없다는 우려도 느껴집니다.
 
이러한 기대와 믿음을 저를 비롯하여 몇몇 졸업동기들이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파국이라불리는  국내 상황과 마냥 미술하는것이 평화롭지만은 않은 세상에서 그래도 미술을 하는이유, 더 나아가 미술로 무얼 더 할 수있느냐는 질문에 대한 공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타쿠 혹은 잉여의 존재론에 기대는 담론과 관심들은 유행을 지나 스러졌고, 우리들 또한 단지 각자의 심오한 자아를 심사에 통과시키기 위해 수많은 크리틱을 견디거나 긁어 부스럼만 내는 크리틱들에대해 반감을 가졌던건 아닐 것입니다.

선생님이 주신 몇가지 메시지 덕택에 몇몇 친구들과 저는 졸전 제목이 가지는 의미와 그 힘에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졸업전시가 2개월 가량 남은 시기, 제목이 가질만한 힘을 다시 재고하자는 것은 아직은 몇몇사람의 욕심일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공식적으로 제목에 관한 문제를 다시 꺼내는 것은 동일한 커리큘럼을 거쳤고, 4년이라는 동일한 기회로 얻어 누린 우리가 같은 순간에 문밖을 나서는 이 '사건'을 즐겁고도 힘있는 에너지로 발산해보고싶은 열망입니다. 우리의 졸전은 개인작업의 단순한 합이 아니라, 회화와 조각 비디오 드로잉 설치 움직임 그 온갖 노동의 형식이 다 섞여 폭발하는 단 한번뿐일 졸전이니까요. 

최초 자극이 된 선생님의 이야기를 조금은 다르게 풀어보자면 이렇습니다.

한예종 조형예술과 입시시험을 치던 그 언젠가의 막연한 열망과 호기심을 떠올려 봅니다. 뭐, 저뿐만은 아니겠지만 현대미술의 뭣도 모르고 입시를 치렀으며 제가 1학년으로 들어온 2011년도에는 맘편히 미술을 그만 둘 수 있는가를 질문하던 선배들이 막 학교를 떠나려던 참이었지요. 그리고 2-3학년때 는 동시대가 어떻고 컨템포러리가 어떻고 서도호가 그러했고 양혜규가 그랬더라는 현대미술의 쟁점들에대해 듣고 검색하고 11시 59분에 완성된 리포트를 선생님들의 메일주소에 첨부하던 날들의 연속이었습니다.
 
저는 제 개인 블로그에서 한예종입시에관한 이런저런 상담을하며 입시문턱을 넘은자의 안도와 자유, 그리고 그 문턱을 넘기 전 우러러보는 누군가 사이의 어떤 불편한 간극을 느끼곤 했습니다. 여기서 든 생각은 우리가 함께 혹은 비슷하게 지나쳐온 4년의 과정을 입시를 거쳐야만 들어갈 수 있는 어떤 미지의 전당, 꿈의 기회가 아니라 어떤 '실체'로 보여야 하지 않을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실체란 것은 미술대학을 경험해 낸 자들의 자신감넘치는 패기이자, 설사 불안하더라도 뭔가를 가지고나가는 다부진 마음, 혹은 범상치 않으면서도 유연한 뒷모습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이런 생각은 굳이 '졸업생'이라는 역할설정보다도, 우리가 '한예종을 다니며 미술을 해온 사람들'이라는 데서 더 명확해집니다. 우리가 다닌 학교와 혹은 우리를 의식하는 시선에 대응할만한 에너지를 우리 스스로 발산해 낼 때, 추운 겨울 졸전을 보러 오는 사람들도 추운 전시공간을 지키는 우리들도 그날그날의 질문을 가지고 귀가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남의 눈치보는 것과는 다른, 우리의 위치를 인지하고 확실히 누리는 형태로 말입니다. 때문에 저는 이준용이 제안한 제목의 형태, 즉 외부로 향한'선언'이자 다소 '반동'적일 수있는 '질문'의 형식을 취하는 것에 동의합니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학년단위로의)4년간의 작업의 '정리' 혹은 4년으로부터의 '밀려남'아니라 '지금''여기''우리''미술(작업)'이라는 시간과- 우리라는 주체를 당당히 드러내는 '독립'적 태도를 취할 수 있을 것이고, '떠나는 우리'이기 보다는 4년전 그때와는 분명히 달라진 우리를 좀더 인식하고 피력하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준용 형/오빠의 '움츠려들지 말고 엿가튼걸 하나 만들어 놓을테니 와서 볼테면봐봐라 하는 똥배짱'이란 말의 급진성이 이와 같은 의미와 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지난번 회의에서 물고기도 바다멀미를 할까 이 제목에 동의를 했고 이 제목의 변용가능성에 찬성했습니다. 일단은 우리의 공통된 '처지'에 관한 것을 이 제목이 우아하게 담기때문이었지요. 그러나 다시 생각해봤을 때 Do fish ever get seasick은 우리 터전에 대한 이야기인듯하나 동시에 미술장르 안의 미술졸업자들이 내부적으로 끌어올린 자조라는 느낌을 완전히 지우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좀 잊고싶은 기억이지만 물고기도 바다멀미를 하는가라는 제목을 들으신 졸업담당교수님은 곧바로 "그래, 배타던 사람이 지상에 내려와도 멀미를 한다지"란 말씀을 하셨지요. 그날은 그 누구에게 진지하게 따져묻고 대답하지 못했던 날로 기억합니다..
 물고기도 바다멀미를 할까라는 제목은 저명한 문학 텍스트의 일부를 차용했기에 나름의 완결성과 함축성을 지닌 좋은 제목입니다. 그러나 이 제목을 그대로 쓰기에는 제목의 긍정적인 면들에서 취득한 보편성이 일반적인 것으로 되어버리는 측면이 있어요. 전 이 지점을 보완하는 단계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제목과 컨셉회의가 있었던 회의에서 이런 문제까지 다루지 못했다는 점. 특히 도록과 인쇄물관련하여 컨셉회의를 수차례 가졌을 디자인/ 홍보팀에게 부담을 주게 된 점에 대하여 졸준위의 일인으로서 반성합니다. 
 이 반성이 접수되기전임에도 불구하고, 졸업이지니는 '끝'이라는 이미지 뿐만아니라 우리의 배움, 작업, 좌절 그리고 동시에 우리의'미술'이라는 맥락이 졸전을 통하여 다시 읽히고 기존제목보다는 조금 다른 이미지와 메시지를 남길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에 장문의 글을 남깁니다.


때문에 상호의견충돌을 충분히 허용하며 나은 결론을 낼 수 있는 별도의 졸전제목회의를 제안합니다.


이 제안과 함께 몇가지 바람들을 요약하는 아주 거친, 제 딴엔 강도를 무작정 높인 문장들을투척합니다. 제목짓는 센스가 부족하여 장황히 떠들기만합니다. 곧 있을 제목회의때 이 거친 내용과 개념들을 부셔주시고 새롭게 갈아엎어주세요.



"우리는 지금 이 순간을 차지한다.
우리는 우리의 노동 뿐만아니라 아니라 우리의 노동이 스쳐 만들어진 물질들과 함께 지금 이곳을 차지할 것이다.
동시에 우리는 알고있다. 이 한정된 시공간의 한계또한 공유하고 있는것이 지금의 우리임을.
우리는 서로가 맞물려있으며 언젠가 맞물린 고리들이 해체될 때 각자가 누리는 공간도 시간도 흩어질 것임을 알고있다.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를 채득하려했던 날들이 있었다. 그 날들의 끝에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하는 자조에 잠긴 날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해야하는가하는 질문을 딛고일어났을 때, 우리는 비로소 미술로 무엇을 더 할 수 있는가를 물을 수 있었다.

 
우리가 차지하지 못하고, 점거할 수 없는 것들은 늘 우리의 핵심을 비껴간다. 우리의 그물에 잡힌 것, 그것만이 우리의 핵심이다. 스포트라이트는 아주 잠시동안만 이곳을 비출것이다. 적어도 우리가 4년을 매달린 시간과, 가치들, 질문들이 펼쳐진 이곳을 말이다.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아니면 더이상 알 수 없을 '무엇을 더 할 수 있는가의' 영역에 스스로 불을 지펴야한다.

화면에 최초의 선이그어질 때, 재생 단추가 눌러질 때, 작업실의 공구를 손에 쥘 때, 고민하던 입술이 벌어질 때 그 누구의 허락도, 허용도, 압박도 필요하지 않았다. 누구도 지정해준적 없는 순간들로부터 우리의 모든 것들이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음을 우리는 기억한다. 
그 누구도 말하지않고 움직이지 않으며 창작해내지 않는 고요가 우리에게 공포가 될지언정 우리가 우리의 그물을 짜고 불을 지피던 방식을 기억하는 이상 우리의 적은 없다. 때문에 우리를 해칠 누구도 없다는 점. 우리는 그것을 천성적으로 알아 창작이라는 힘에 매달렸다. 이 힘만큼은 무엇에도 기생하지 않는 독립적인 힘이었다. 우리는 이곳에서 우리의 노동을 믿게 되었고, 질문만이 자신의 입구와 출구를 스스로 더듬어가는 길임을 배웠다. 미술로 무엇을 더 할 수 있는가의 물음은 이러한 우리에게 필연적인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미술은 우리에게 '더'라는 공백을 허용하는 공간이었다.
그렇기에 미술은 우리에게 벽임과 동시에 새로운 문이다.
가장 커다란 문을 짓기위해 튼튼한 벽을 찾던 날들도 있었다. 
혹시 무너뜨려야만 열리는 벽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이 판에 던져질 모든 질문에 앞서 숨을 고르는 존재들은 우리이다.

누구나의 시간이 그러하듯이 우리들의 현재는 이미-아직으로 온다. 이곳은 이미 있던 것들이 희미해지는 곳이며 아직이라기엔 너무도 명징한 실체의 우리가 모인 곳이다. 졸업전시는 여러차례 반복될 것이지만 지금 이순간의 우리는 단 한번뿐이다. 우리는 복잡한 행선지가 모여 만든 기나긴 열차이며 올 겨울 세차게 역을 지나칠 것이다.

여기는 지금이라는 가장 짧은 순간, 긴 미래를 겨냥할 수 있는 우리의 맨- 앞이다."
 
 
 
 
 
<졸전제목에관한 건의2>, 신유현, 2014 /10/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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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최종적으로 어떤 문장을 졸업전시의 제목으로 삼게 될런지는 아직 모르겠다. 하지만
과정에서의 소통과 논의들이 참 가치있다. '빨리' '처리'해버릴 일이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같은 학교에 학생이라는 신분으로 같이 몸담고 있는 사람의 목소리로부터
그 목소리가 뱉어지는 과정에서, 그 소리를 함께 보고 들으면서 배운다.
내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지, 내가 느끼는 감정들이 사실 어떤것인지.
 
'씨팔, 이번 학기 끝나면 미술 다 관둬버리겠어, 
내가 하고싶은거 다 지르고 이 판을 끝낼거다!'
요즘 계속해서 느끼던 이런 나의 분노감들이
실은 정말 그만 둬버리겠다는, 더러워서 피하겠다는, 결국 우울함과 무기력함에 버무려진 패배주의적 성격의 결론이 아니라
이렇게 괴롭힘이 끊임없는, 명쾌한 해답없이 서로 잔혹상에 대해 연속적인 책임회피를 해대는 이 세상에 한번 맞서보겠다는, 내가 든것이 초라한 물맷돌일지언정 그러기 위해 나의 오늘을 불사지르겠다는 지독한 결단에 가까운 것이 아니었겠는가 생각해본다.
 
으아 왠지 너무 힘이 솟는다. 너무.

Oct 2, 2014




나는 어리구나. 좀더 단단하고 진정할 수 있는 사람이고 싶다.

Sia - Chandelier


















가을노래



김동률-그게나야

김동률의 목소리, 피아노 선율, 공유라는 배우 1명, 커튼이 잔뜩 쳐진 무채색 방.
화면에 좁은 여백을 둔 쪽으로 허공을 바라보는 눈 클로즈업.

끝까지 눈물없이 가도 충분했을텐데 라는 아쉬움도 들지만,
그리움과 그로인한 무력감을 보여주는 방식이 충분히 담백하게 느껴진다.
그런 종류의 감정은 철저히 개인의 것이어서.
셔츠 단추를 잠글때에도, 두 귀를 이어폰으로 꽉 막아도,
간신히 넘쳐 흐르지 않을만큼만 넘실거린다.









자이언티-양화대교

건반악기 느낌의 미디 사운드같은 Zion.T 목소리,
마젠타~옐로,그린 계열의 그라데이션 색보정/조명, 택시 색상,
양화대교와 무대라는 공간의 대비, 어룽어룽 다중으로 상이 맺히는 촬영방식.

택시기사와 그가 가장인 가정의 형편은 말하지 않아도 뻔하다.
가난할 수록 남에게 설명하기 복잡한 애매하고 속아픈 스토리가 넘치기 마련인데,
그 시절의 복잡다단한 감정들을 지리하게 설명하는 대신 당시 상황에 대한 간결한 윤곽만 그려내는'듯한' 가사, 그리고 행복하자 행복하자 행복하자라는 울림이 있다.
"택시 ㄷ쥬롸버 taxi driver~", "어린날의 날 /그날의 날~", "행복하자-".
하 무척이나 세련되다.










Sam Smith-Stay with me

이건 ^.^ 뮤비보다 오디오로만 듣는게 더 좋은것은 왜일까.. 미안!!




Oct 1, 2014

장소와 장소상실 Place and Placelessness, 에드워드 렐프, 논형

참된 장소감

.. 장소에 대한 참된 태도란 장소 정체성의 전체적 복합성을 직접적이며 순수하게 경험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그 경험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인위적인 사회적 , 지적 유행에 매개되거나 왜곡되지 않고, 또 판에 박은 관습을 따르지 않는 태도를 말한다. 이러한 태도는 장소가 인간 의도의 산물이고, 인간 활동을 위한 의미로 가득한 환경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인식하고, 장소에 대한 심오하고 무의식적인 정체성을 지니는 데서 나오는 것이다.


나I-너Thou 관계.


오거스트 헥처는 다음과 같이 썼다.
"개인이 필요로 하는 것은 ... 땅덩어리가 아니라 장소다. 그 안에서 자신을 확장시키고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는 맥락이 필요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장소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보통 오랜 시간에 걸쳐, 평번함 사람들의 일상 생활을 통해 형성되어야만 한다. 그들의 애정으로 장소에 스케일과 의미가 부여되어야 한다. 그리고 나서 장소가 보존되어야 한다." 

노베르그-슐츠, 밋밋한 경관flatscape

"우리는 전국에 걸쳐 연속적으로 얄팍하게 펼쳐져 있는 사람들 음식 권력 오락을 위해 핵심을 포기하고 있는 것 같다. 지금 영국은 불모의 땅이자 .. 겉으로만 그럴듯하게 도금된 혼돈의 세계이다". 이러한 평가는 다양한 경관과 의미있는 장소가 결핍된, 일종의 무장소의 지리가 나타날 가능성을 나타낸다. 또한 우리가 현재 무장소성의 힘에 지배당하고 있으며 장소감을 상실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다양성이 인류에게서 사라지고 있다. 똑같은 방식으로 행동하고, 생각하고, 느끼는 것은 이제 전세계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 이것은 단지 국가들이 서로에게 더 많은 영향을 주고 서로를 더욱 신뢰하면서 모방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각 나라 사람들이 점점 신분제도나 직업, 가족에 따라 고유한 생각과 느낌을 포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점점 어디에서나 똑같은 인간 소질Constitution of man에 가까워져 가고 있다. 그래서 이들은 서로를 모방하지 않아도 비슷해지고 있다."
 토크빌이 말하는, '인간 소질'이란 수준 높은 영감이 아니라, 오히려 "셀 수 없이 많은 존재들, 뛰어난 사람도 없고 떨어지지도 않은 닮은 꼴"의로의 하향 평준화이다. 이러한 지적의 현재적 의미는 무장소성이 커뮤니케이션의 발달, 이동성과 모방의 증가로 인해 비슷해보이는 경관을 구성하고 있으며, 그 배후에 인간과 장소의 공통적이고 평균적인 성격에만 관심을 갖는 태도가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다는 데 있다 ... 이 '진정하지 못한 무장소적 태도'가 이제 너무 멀리 퍼져서, 피상적이고 우연적으로 접하는 수준이상의 장소를 경험하거나 창조하는 것이 전혀 불가능해졌다.





진정하지 못한 태도 - 집

진정한 경험에서 '집'이란 그것이 주택이든 마을이든 지역이든 나라이든지 간에, 실존과 개인의 정체성의 중심으로, 거기에서 외부 세계를 바라본다. 새 집을 짓는다거나 새로운 땅에 정착한다는 것은 아주 근본적인 일로서, 세계를 다시 세우는 것과 맞먹는다. 원시적이고 토착적인 문화에서는, 장소에 대한 실질적이고 종교적인 감정이 서로 얽혀있고 단일하고 영역이 병확하게 한정된 집에는 깊고 다면적인 애착이 존재한다. 그러나 현대 사회의 대부분은, "직장 생활, 가정 생활, 종교 생활, 그리고 장소"가 각기 분리되어 있다. 그래서 집이란 당신의 주택이 위치한 곳이며, 별 아쉬움 없이 3~4년에 한번씩 바뀔 수 있다. 엘리아데는 주택이란 "거주를 위한 기계"라고 말한 르 코르뷔제의 견해를 받아들여서 다음과 같이 썼다. "당신은 자전거나, 냉장고, 자동차를 바꾸듯이 당신이 거주하는 기계를 자주 바꿀 수 있다. 또한 당신은 기후의 차이 같은 어쩔 수 없이 이사해야 하는 특별한 이유 없이도 도시나, 지방을 바꿀 수 있다." 이러한 '집'의 상호 교환 가능성 -예를 들어 북아메리카에서는 가구당 3년에 한 번씩 이사한다-은 '집'의 중요성이 감소함으로써 가능해졌으며, 동시에 집의 의미 축소를 촉진한다.
 '집'의 의미는 이동성의 증가와 이동성과 연계된 기능의 분리를 통해서뿐만 아니라, 감상에 젖거나 상품화에 의해서도 약화되어 왔다. 잘알려진 '즐거운 나의 집'테마를 활용하는 키치적 골동품 취미가 넘치고 있다. 특히 이 테마는 독일어의 하임붸Heimweh 즉 향수, 그리고 하이마트Heimat 즉, 고향 개념에 잘 나타나 있다. 레오나르드 둡은 오스트리아의 연감에서 다음과 같은 해서을 끌어냈다. "우리가 이 그리운 단어 '하이마트'를 말하는 바로 그떄, 따뜻한 파도가 우리의 심장을 스치고 지나간다. 고독의 한가운데서도 우리는 혼자가 아니며, 슬픔의 한가운데서도 우리는 편안하다." 그리고 상업적 이해는 집에 대한 생각을 이용해 먹는 것을 잠시도 놓치지 않는다. 토론토의 한 대규모 아파트 회사는 "당신이 집이라고 부를 곳을 원한다면, 우리를 찾으십시오"라고 광고했다. 부동산업자들도 더 이상 주택이 아닌 집, 즉 비싼 집, 상류층 취향의 집, 아파트, 타운홈을 팔기 시작했다. 이제 '집'은 사실상 시장성 있는 교환 가능한, 센티멘털한 상품이 되었다.



장소와 장소상실 Place and Placelessness, 에드워드 렐프, 논형



인간실존의 근원적 중심으로서의 집

빈센트 비시나스는 하이데거의 말을 알기 쉽게 풀어서, 집이라는 현상은 "우리가 복종할 수밖에 없는 압도적이고 교환 불가능한 무엇이며, 우리가 여러 해 동안 집을 떠나 있었다 해도 우리 삶의 방향을 정하고 길잡이가 되는 어떤 것"이라고 설명했다. 집은 개인으로서 그리고 한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의 우리 정체성의 토대, 즉 존재의 거주장소dwelling-place of being이다. 집은 단순히 당신이 어쩌다 우연히 살게 된 가옥이 아니다. 그것은 어디에든 있는 것이거나 교환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의미의 중심인 것이다. 이것은 매우 철학적이며 모호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사실집은 공통적이고 일상적인 경험을 이루는 요소이다.  .. 가장 근원적인 모습을 한 집이란 특정한 상황이나 특별한 환경에 대한 애착이며, 그것에 비하면, 장소에 대한 다른 모든 관계는 한정된 의미를 가질 뿐이다. 우리가 자신의 진로를 정하고 외부 세계로 나아갈 출발점이 바로 집이다.
 집이라는 장소에 대한 이런 종류의 애착이 현대사회의 특징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어려운 일이다. .. 하이데거는 집을 과거 시제로 기록하고, 이렇게 선언했다. "오늘날의 집은 왜곡되고, 비뚤어진 현상이다. 집이 주택과 동일해졌다. 다시 말해서 집은 어디에든 있을 수 있다. 집이 우리의 손아귀에서 금전적 가치로 쉽게 측정되고 표현될 수 있게 된 것이다". 수많은 실존 철학자들과 사회 과학자들이 주장한 대로, 현대인은 집 잃은 존재homeless being이며, 집이라는 장소에 대한 애착을 상실했다는 것은 맞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하이데거처럼 아예 집의 의미를 기각시켜버리는 것은 너무 지나치다. 사실 집이라는 장소와의 연계는 극도의 애착에서부터 전혀 애착없는 상태 사이의 수많은 단계로 존재한다. 더구나 사람들과 그들의 집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와 관심은 대개 물질주의적 태도에 가려져 있다가 상실과 고난의 시대를 겪으면서 비로소 드러난다. 정신과 의사인 마크 프라이드Mark Freid는 보스턴의 웨스트 엔드에서 거주하다가 집을 몰수 당하여 보스턴 시내의 다른 곳으로 이주한 주민 집단의 반응을 연구했다.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고통스러운 상실감 ...계속되는 갈망...절망감...그리고 잃어버린 장소를 이상화하려는 경향과 슬픔"같은 감정적인 반응을 나타냈다.

 ...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물리적 외관, 즉 어떤 장소의 경관일 수 있다.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장소의 지속성을 인식하는 것, 혹은 우리가 알고 있고 우리의 존재가 알려져 있는 곳, 우리의 인생에서 가장 의미 있는 경험이 바랭하는 곳이 바로 여기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로 한 장소에 뿌리를 내리고 그 곳에 애착을 가지고 있다면, 이 장소가 진정으로 우리의 집이라면, 이 모든 측면들이 의미심장하면서 분리될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런 집이라는 장소는 사실 인간 존재의 토대이며 모든 인간활동에 대한 맥락뿐 아니라 개인과 집단에 대한 안전과 정체성을 제공한다. 에릭 다델은 다음과 같이 썼다.
 "어떠한 선택을 하기도 전에, 우리가 성택하지 않은 이 장소는 존재한다. 이 장소에서 지구상의 실존과 인간조건의 토대가 확립된다. 우리가 장소를 변화시킬 수 있고 장소를 이동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 또한 어떤 장소를 찾는 것이다. 우리 존재를 정착시키고, 우리의 가능성을 실현시키기 위한 근거로 장소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여기는 세계가 모습을 드러내는 곳이며, 거기는 우리가 갈 수 있는 곳이다."
 장소와의 깊은 관계는 사람들과의 긴밀한 관계만큼이나 필수적이며 불가피한 것이다. 그런 관계가 없다면 인간 존재는 가능성 있는 그 의미의 대부분을 잃고 말 것이다.







장소가 주는 고역

'노스탤지어'라는 말은 1678년에 스위스의 의학도 요한네스 호퍼가 불면증, 식욕 감퇴, 가슴이 뜀, 마비, 발열 그리고 특히 계속해서 집을 생각하는 등의 증후를 가진 병을 설명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지금은 노스탤지어의 유사어로 '향수병'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하지만, 향수병은 노스탤지어보다 의미가 약한 유사어이다. 호퍼와 그 뒤를 이은 17세기, 18세기의 의사들은 노스탤지어가 집에 돌아갈 수 없으면 죽음에 이를 수 있는 병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노스탤지어는 장소에 대한 애착의 중요성이 예전에는 잘 인식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16세기 로버트 버튼이 <우울의 해부>란 책에서 "..죽음 자체, 또 하니의 지옥... 한 장소에 속박되는 것"이라 쓴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처럼 한 장소에 갇히는 것은 버튼이 지적한 우울증의 수많은 원인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의 진술은 장소에의 애착이 전적으로 즐거운 경험만은 아니라는 것을 시사한다. 우리가 가장 관심을 갖는 장소는 바로 우리 삶의 중심일 것이다. 그러나 장소는 또한 억압적이고 감옥 같은 것일 수도 있다.
 장소에는 끔찍한 고역, 즉 이 장소에 꼼짝없이 묶여 있다는 느낌, 이미 만들어져 있는 환경과 상징 그리고 틀에 박힌 일상에 속박되어 있다는 느낌이 있다. 일상 생활의 기반으로서의 장소는 앙리 르페브르가 "일상생활의 끔찍함"이라고 부른 특성을 필연적으로 가지고 있다. 즉, 일상 속에는 지루한 일들, 굴욕, 또 끊임없이 충족시켜 주어야 하는 기본적인 필요들, 고난, 보잘것없음, 탐욕이 점철되어 있다. 개인과 장소간에는 융합뿐만 아니라 긴장도 존재한다. 로날드 블리드는 이스트 앵글리아의 한 마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썼다.
 " 겨우 한 세대 정도 전에, '일자리'를 찾아 떠나야만' 했던 마을 사람은 어쩔 수 없이 그가 중요한 구성원이었던, 긴밀한 유대 관계와 의미로 가득했던 마을을 포기해야만 했다 .... 또한 반대로 마을을 떠날 방법이 없어서 마을 생활을 질식 할 것 같고 억압적으로 느끼는 젊은이들은 군에 입대하거나, 감옥같은 고향 마을을 떠나 오랜 방랑 여행에라도 합류하고 싶어할 것이다 "
 고역은 언제나 장소에 대한 깊은 개입의 일부이며, 이 모든 개입은 또한 장소가 부과하는 제약과 그로 인한 고통을 수용할 수 밖에 없다. 우리의 장소 경험, 특히 집에 대한 경험은 변등법적인 것이다. 즉, 벗어나고 싶은 욕망과 정착하고 싶은 욕구가 균형을 이룬다. 이러한 욕구 가운데 한쪽이 너무나 쉽게 충족 되면, 우리는 노스탤 지어나 뿌리뽑힘의 느낌으로 고통받기도 하고, 반대로 억압감이나 한 장소에 갇혀있다는 느낌을 수반하는 우울증으로 고통받는다.





장소의 본질

장소는 행위와 의도의 중심이며 "우리가 실존의 의미있는 사건들을 경험하게 되는 초점이다".
장소는 의도적으로 정의된 사물 또는 사물이나 사건들의 집합에 대한 맥락이나 배경이다. 혹은 장소 그 자체로도 의도의 대상이 될 수 있다.

.. 요약하면, 우리가 장소로 인식하는 생활 세계의 특성들은 다른 것들과 구별된다. 왜냐하면 장소에는 우리의 의도, 탣, 목적과 경험이 모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모든 것의 초점이 되는 장소의 특성 때문에, 장소는 주위 공간의 일부이면서도 그 공간과는 별개이다. 그러므로 장소는 세계 경험에 질서를 부여하는 기본적인 요소가 된다.
.. 그러므로 장소의 기본적인 의미, 즉 장소의 본질은 위치에서 오는 것도, 장소가 수행하는 사소한 기능들에서 오는 것도, 장소를 점유하고 있는 공동체에서 오는 것도, 피상적이고 세속적인 경험에서 오는 것도아니다. 이들 모두가 장소의 일반적이고 필수적인 특성이긴 하지만, 장소를 인간 존재의 심원한 중심으로 정의하는 대체로 무의식적인 의도성에 장소의 본질이 있다. 결국 모든 사람은 태어나고, 자라고, 지금도 살고 있는, 또는 트히 감동적인 경험을 가졌던 장소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으며 그 장소를 의식하고 있다. 이러한 관계가 개인의 정체성과 문화적 정체성, 그리고 안정감의 근원이자, 우리가 세계 속에서 우리자신을 외부로 지향시키는 출발저믈 구성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프랑스의 철학자인 가브리엘 마르셀은 "개인은 자신의 장소와 별개가 아니다. 그가 바로 장소이다"라고 간단하게 요약했다.

장소와 장소상실 Place and Placelessness, 에드워드 렐프, 논형

인간답다는 것은 의미있는 장소로 가득한 세상에서 산다는 것이다. 인간답다는 말은 곧 자신의 장소를 가지고 있으며 잘 알고 있다는 뜻이다.



 장소는 의미를 가진다. 장소는 인간의 믿음에 따라 규정된다. "지리학자들은 왜 장소가 인간 의식 속에서 하나의 사실적 사건이 되는가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장소에 대해 어떤 믿음을 가지는지를 이해하고자 한다...인간행위의 바탕에는 장소가 있으며, 인간 행위는 다시 장소에 특성을 부여하게 된다. _루커만,1964
그래서 루커만은 장소를 특정 위치에서 발달해 왔으며 현재도 발달하고 있는 자연과 문화의 복합적인 통합체로 보고, 이 장소들이 사람과 물자의 흐름을 통해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 장소란 단지 사물이 위치한 '어디'가 아니다. 장소는 위치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통합되어 있고 의미있는 현상으로 보이는, 위치를 점하는 모든 것이다.



그리고 알프레드 슈츠Alfred schultz는 "내가 살고 있는 장소는 지리적 개념으로서가 아니라 나의 집으로서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1967



 장소가 정말로 인간이 세계에 존재하는 데 근본적인 속성이라면, 또 개인이나 집단에게 있어 안정과 정체성의 원천이라면, 의미 있는 장소를 경험하고 창조하고 유지하는 방법을 잃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바로 이런 방법들이 사라지고 있고, 장소의 독특하고 다양한 경험과 정체성이 약화되는 현상, 즉 무장소성이 지금 지배적으로 되어가고 있는 징후들이 많다. 이런 경향은 실존의 지리적 토대에 상당한 변화가 발생했음을 보여준다. 변화란 장소에 깊이 뿌리내린 삶으로부터 뿌리뽑힌 삶으로의 변화이다.





...수잔 랑거는 건축에서의 장소 개념을 설명하면서 장소란 문화적으로 정의되는 것으로 지도학적 의미에서의 위치란 단지 장소의 부수적인 특성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 바 있다. "...자꾸 위치를 바꾸는 배라고 할지라도 그 배는 그 자체로 독립적인 장소이다. 집시나 인디언의 야영지, 서커스단의 야영지 역시 아무리 이 장소들이 측지학적인 특성을 자주 바꾼다할지라도, 그 자체로 독립적인 장소이다. 글자 그대로 보면, 야영지는 어떤 장소 안에 있다고 말하지만, 문화적인 의미에서 볼 때 야영지는 그 자체로 하나의 장소이다. 집시의 야영지가 비록 지리적으로는 인디언 야영지가 있었던 곳에 자리를 잡았다 할지라도 인디언의 야영지와는 다른 장소인 것이다."
 물론 이것은 어느 정도 예외적인 사례이다. 사실 대부분의 장소는 어딘가에 위치하고 있다. 하지만 위의 사례는 위치라는 것이 장소의 조건에 있어서 공통적인 것이긴 하지만, 필수 조건도 충분 조건도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이것은 상당히 중요하다. 이동성이나 유목이 장소에 대한 애착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브라질의 보로로Bororo족은 3년마다 자기 마을을 부수고 다른 곳에 다시 세우지만, 그들은 여전히 자기들이 살고 있는 장소에 강한 애착을 느낀다.Choay,1969. 마찬가지로 현대 사회에서 가장 자주 이동하는 단지 체류자들이 저절로 집도 없고, 장소도 갖지 못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매우 빨리 새로운 장소에 애착을 느끼게 될 수도 있다.



수잔 랑거는 다음과 같이 건축적 장소에 대한 논의를 이어간다.
"... 인간 생활의 흔적에 의하여 명확해진 '장소'는 생명체처럼 유기체로 보일 것이 틀림없다 ... 한 가옥이 지표면에 차지하는 장소, 말하자면 실제 공간상에서의 가옥의 위치는 그것이 불타거나, 파손되거나, 철거되어도 똑같은 장소로 남아있다 그러나 건축가가 창조해낸 장소는 일종의 환상이고 느낌이 가시적으로 표현되어 낳은 것으로, 때로는 '분위기atmosphere'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런 종류의 장소는 그 가옥이 파괴되면 사라져버린다..."

 장소가 경관으로 이해되고 경험되는 이유가, 시각적 특딩이 인간 활동의 모습을 가시적으로 보여 준다는 직접적이고도 분명한 의미에서이든, 아니면 인간의 가치와 의도를 반영한다는 다소 미묘한 의미에서이든 간에, 외관은 모든 장소들의 중요한 특성이다. 그러나 모든 장소 경험을 경관 경험으로 이해하기는 어렵다. 몇년 동안 떠나 있다가 돌아온 장소에 대해 예전의 친밀감을 다시 회복하는 것과, 외관상 중요한 변화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변했다고 느끼는 것에는 공통적인 느낌이 있다. 전에는 우리가 그 경관 안의 일부였지만, 지금은 아웃사이더이고 관찰자이다. 하지만 기억을 조금만 끄집어내어도 우리는 옛 장소의 의미를 다시 포착할 수 있다.




개인이나 문화에 의해 정의되는 장소들은 그 위치 활동 건물들이 의미를 가지고 또 잃어버리면서 성장 번영하고 쇠퇴하게 된다. 현재의 장소는 이전의 장소에서 성장하거나 과거의 장소를 대체하면서 그런 의미들의 진전이 있을 것이다. 마치 여리고가 이전 도시의 폐허 바로 위에 또 세워지고 또 세워지는 것처럼, 새로운 도시는 똑같은 장소이지만 동시에 이전의 장소와는 다르다. 몇몇 장소들은 죽었다. 그러므로 세계는 죽은 장소들의 유골로 가득하다. 스톤헨지나 카르낙, 아즈텍과 잉카의 폐허 도시, 유령도시, 버려진 농장 같은 곳들은 원래의 의미를 박탈 당하고, 관광객이나 행인들, 다른 외부인들에게 대수롭지 않은 구경거리가 되었다. 이처럼 사라져버리고 변화하는 것을 막아주는 것은, 장소가 영구적이라는 감성을 강화시키는 의식과 전통이다. 그런 의식은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잉글랜드의 몇몇지역에서는 해마다 교구 주위를 행진하며 '구역땅 두드리기'라는 행사를 열기도 하고, 로마의 루스라시오는 연례적인 구역 행진을 통해 농장이나 도시의 경계를 신성하게 했다. 이런 의식은 장소를 상징적으로 또 법적으로 재확인 하며, 동시에 장차 그 장소의 상속자가 될 어린 아이들에게도 그 경계를 알려주는데 기여한다. 이처럼 반복적인 전통행사를 통해 장소를 재확립하고 급격한 변화 속에서도 장소가 안정성과 계속성을 지니도록 한다.




특히 장소와 공동체의 관계는 경관에 표출되는데, 이런 의미에서 경관은 커뮤니케이션 매체로서 모든 경관 요소들이 메시지를 가질 수 있다. 즉, 건물, 거리, 퍼레이드, 마을축구팀 이 모든것은 공동체를 단결시킬 뿐만 아니라 공동체를 드러낸다. 따라서 공통적으로 경험하는 경관의 상징이나 메시지는 알도 반 에이크가 적절하게 이름붙인 "집단적으로 규정된 장소 의식"을 유지하는 데 기여한다. 그리고 이 장소 의식은 같은 장소 출신의 사람들에게 그 장소 자체가 지닌 본질적으로 동일한 정체성을 부여하며, 그 역도 성립한다. 로날드 블리드Ronald Blythe는 이스트 앵글리아의 아켄필드 마을에 대한 감수성있는 연구를 통해 이점을 지적하고 있다.
"자신이 태어난 장소에서 한번도 이주한 적이 없는 마을 주민은...자기 마을의 독특한 표시를 지니고 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다른 마을 사람에게 자신이 아켄필드 출신이라고 말한다면, 이 말속에는 그보다 훨씬 많은 의미를 단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는 당사자도 알고 있다. 즉, 그 말 속에는 자기의 외모에서부터 정치적 태도에 이르는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다."
간단히 말해, 사람은 곧 자신이 살고 있는 장소이고, 장소는 곧 그 곳에 살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개념적으로는 쉽게 분리될 수 있지만, 경험적으로는 쉽게 분리될 수 없다. 이런 맥락에서 장소는 '공적'이다. 장소는 상징과 의미를 공유하면서 경험을 함께하고 관련을 맺음으로써 창조되고 알려지기 때문이다.





(3-5 사적인 장소들)
공식적인 공공 장소와, 공동으로 경험하는 장소들은 장소 현상의 특별한 형태일 뿐이다. 공동 경험이 장소 이해에 중요한 요소임은 틀림없지만, 장소의 본질을 정의하기에는 충분치 못하다. 모든 장소와 경관은 개인적으로 경험된다. 우리의 태도, 경험, 의도하는 렌즈를 통해서, 그리고 우리만의 고유한 환경으로부터 장소와 경관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바로 이점에서 라이트는 "지구전체는 미지의 땅terra incognitae이라는 조각들을 모아놓은 거대한 잡동사니"라고 했다. 여기서 미지의 땅이란 사적인 개인들의 지리를 말한다. 이처럼 모든 경관에는 개인적인 색깔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경관이란 개별적인 동시에 공동의 맥락을 통해 경험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모두 개인이면서 동시에 사회의 일원이기 때문에 그렇다.
 확실히 이렇게 물리적으로 경계지어지고, 다른 사람들이 그 경계를 존중해주는 장소들은 우리 모두에게 중요하다. 이런 장소들은 우리의 개별성을 표현해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적인 장소들이 이처럼 직접적이고 분명할 필필요는 없다. 사실은 사적인 장소들에 대해 공통된 지식은 없을지도 모른다. 오히려 그런 장소들은 우리들에게 구체적이고 특별한 의미로 정의되고, 구체적으로 존재한다기 보다는 기억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특히, 유년기의 장소들은 많은 개인들에게 있어 아주 중요한 준거점이 된다. 실제로 그런 경험이 발생한 곳이 아니라 할지라도 특별한 개인적인 경험을 상기시키는 특정 위치나 환경도 그런 장소가 될 수 있다. 그래서 르네 듀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장소들이 불러 일으키는 것은 지리적 위치가 아니라 그 당시 나의 삶의 모습이기 때문에, 나는 장소의 정확한 특징보다 그 장소들의 분위기를 더 잘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격정적인 경험이든, 천천히 그리고 차분한 관계로 진전된 경험이든, 중요한 것은 이 장소가 당신만의 고유하고 사적인 곳이라는 느낌이다. 당신이 그 장소를 경험하는 것은 분명히 개인적이기 때문이다. 알베르 카뮈는 피렌테 보볼리 가든에서 바라본 전망 경험을 다음과 같이 썼다. "수 백만 개의 눈이 이 경관을 전망해 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내겐 그 경관이 하늘이 보여준 최초의 미소였다. 그것은 내 마음을 경관의 가장 심오한 의미속으로 데려갔다." 이는 문자 그대로 장소애topophilia', 즉 강렬하게 개인적이고 심오하게 의미있는 장소와의 만남이다.




(3-6 뿌리 뽑힘과 장소에 대한 관심)

장소를 공동체의 한사람으로 경험하든 개인적으로 경험하든 거기에는 보통 긴밀한 애착, 즉 친밀감이 생기는데, 친밀감은 특정 장소에서 여기를 알게 되고 알려지게 되는 과정의 일부이다. 우리가 장소에 내린 뿌리는 바로 이 애착으로 구성된 것이며, 이 애착이 포괄하고 있는 친밀감은 단지 장소에 대해 세부적인 것까지 알고 있는 것만이 아니라 그 장소에 대한 깊은 배려와 관심이다.
 장소에 애착을 갖게 되고 그 장소와 깊은 유대를 가진다는 것은 인간의 중요한 욕구이다. 시몬느 베이유Simone Weil는 <뿌리에의 욕망 the Need for Roots>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뿌리를 내린다는 것은 아마도 인간의 영혼에서 가장 중요하지만 가장 적게 인식되는 욕망이다. 그것은 가장 정의하기 어려운 것 중의 하나이다. 인간은 공동체 생활에 적극적이고 자연스럽게 참여함으로써 뿌리를 갖게 된다. 이를 통해 공동체의 특정한 생활 형태가 미래에도 계속 고수될 수 있다. 이러한 공동체에의 참여가 장소나 출생 조건, 직업, 사회적 환경에 의해 자동적으로 유발된다는 점에서, 그 참여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다양한 뿌리를 가질 필요가 있다. 인간은 자신이 일부를 이루는 환경을 통해서 도덕적, 지적, 정신적 삶 전체를 ㄹ영위해야만 한다."
...다음은 로버트 콜즈 Robert Coles가 뿌리를 상실한 미국 어린이들에 대한 연구에서 결론적으로 말하는 내용이다. "뿌리를 원하고, 뿌리를 필요로 하고, 뿌리-소속감-내것-네것-우리것으로 인식되는 어떤 장소를 쟁취하려는 것은 확실히 우리 본성의 일부분이다. 국가, 지역, 주, 군, 도시, 타운, 이모두는 정치, 지리, 역사와 관련이 있지만, 그 이상의 것이다. 그것들은 어떻든지 인간성, 곧 어딘가에 머물고자 하고 다른 사람들, 그리고 특정 환경이나 공간, 또는 근린, 일련의 상황이라도 불리는 것들을 알고자 하는 욕망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한 장소에 뿌리를 내린다는 것은 세상을 내다보는 안전지대를 가지는 것이며, 사물의 질서 속에서 자신의 입장을 확고하게 파악하는 것이며, 그리고 특정한 어딘가에 의미있는 정신적이고 심리적 애착을 가지는 것이다.
 우리가 가장 애착을 가진ㄴ 장소들은 글자 그대로 관심의 영역으로, 그 속에 우리의 복잡다단한 경험이 있으며 또 아주 복잡한 애정과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환경이다. 그러나 장소를 소중히 여긴다는 것은 과거의 어떤 경험과 미래에 대한 기대 떄문에 가지는 관심 이상이다. 즉, 장소는 자체의 특성과 그것이 당신괴 다른 사람들에게 주는 의미떄문에 장소에 대한 진정한 책임과 존경이 존재한다. 실제로 어떤 장소에 대한 전적인 관심, 사람이 할 수 있는 어느 것 못지 않은 심오한 관심이 거기에 있다. 소중히 한다는 것care-taing은 실제로 "인간이 세계와 맺는 관계의 기초"이기 떄문이다.
 그런 헌신과 책임에는 하이데거가 "아낌caring"이라고 부른 것도 포함된다. 즉, 아낌이란 사물 여기서는 장소를, 그것이 존재하는 방식그대로 두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장소의 본질 자체에 대한 관용이다. ...
 "사람이 자기 집을 샘 가까이, 바람을 막아주는 언덕 기슭에 남향으로 지을 때, 건축 방향을 가리켜 주는 것이 바로 땅이었다. 그리고 인간은 땅의 요구에 마음을 연 수용자였을 뿐이다. 지붕을 벽보다 훨씬 더 밖으로 내어서 매우 경사지게 얹은 것은, 눈보라 치는 겨울에 지붕위에 쌓일 눈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여기서도 기후라기보다는 하늘이 건축물의 구조를결정했다. 집 한구석을 차지한 기도처는 신에 대한 응답이며, 요람이나 관이 놓인 장소는 언젠가는 죽어야만 하는 인간의 운명을 나타냈다."
 '집'이 제대로 실현될 수 있는 것은 오직 이런 유형의 아낌과 배려를 통해서이며, 집을 갖는다는 것은 '거주한다'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이를 인간 실존의 본질이자 존재의 기본적인 특성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