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c 28, 2014



나는 옹졸함, 치졸함, 끔찍함, 음란함, 생색냄, 몰인정이 가득한 사람이어서 자격이 없어요 어떻게 이런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게 뭔가를 할 수가 있겠어요 난 엉망이에요 라고 울다시피 토로했을때 들었던 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나를 불러내셨기때문에

그래서 은혜인 것 아니겠느냐고.

Dec 27, 2014

심정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를 메울 수 있는 것은 '그래 너는 나와 다르구나'였다.


Dec 26, 2014

이미 이루어진 일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12:16,20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너가 얼마나 고민을 했을지 생각하니
마음이 너무도 아팠다.
에베소서 4장 [개역개정]

17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

18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19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20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21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Dec 17, 2014

발길에 채이는 진심들


받는 사람에게 사랑은 너무 흔해서 한 번 읽히고 버려진다.

보내는 사람에게 사랑은 너무 어려워서 눈치를 보다가 바보가 된다.

친구들이 그만해 멍청아 라고 나무라는데

마음 귀퉁이 여린 부분이 설득당할 것만 같아서 조바심이 났다.

부서지기 쉬운 한 켠

아주 미세한 금이 가고 있다

한참 뒤 얇은 가루가 되어서 또 다시 사복 담겨 네게 보내질 때

부주의하게 열어본 덕분에 이제는 그 자리에 내가 없다.

순애보도 너무 빨리 읽으면 아무 의미 없는 글자들의 나열로 보일 뿐이다.

그냥 그렇게

응 그냥 그렇게

너는 나에게 충분한 위로여왔다

그에 목마른 나에게

나는 너를 어려워했어도

너는 나를 그렇게 대하지 않았지

Dec 15, 2014

붙들기와 버림 사이




처연한 새벽이다


이제는 정말로 욕심을 버려야지

놓아주자 놓아주자 놓아주자

불순물을 다 절단해서 내다버리자

가장 심플하게

가장 절제해서

내일을 잘 맞이하자

찾아온 이들을 안아주자

그것이 지금의 나의 몫

그것이 어제와 오늘 중간지대에서 맘먹을 수 있는 최고의 것


주님손꼭잡고

Dec 6, 2014

12월 블루

세상은 너무 시끄러워서 밖을 쏘다니다보면 하루의 끝에 나는 종일 아무말도 하지 않았음을 뒤늦게 알게 된다

세상은 너무 화려해서 밖을 돌아다니다보면 하루의 끝에 나는 벌거벗은 나의 몸을 더듬어 보게 된다

충분하다 못해 과잉인 세상이 나는 너무 버겁다

넘치다 못해 다시 배고파지는 세상이 이만 지겹다



더 조용한 곳

더 겸손한 곳

하나라도 제대로 들여다 볼 수 있는 곳

내킬만큼 눈치보지 않고 가만 머무를 수 있는 곳

가다듬어지지도 못한 목소리를 주저없이 내어볼 수 있는 곳

너가 없어도 외롭지 않을 곳



생각하다가 자꾸만 운다


오늘의 노동요






한국 여자 아이돌에게서나 볼 법한 눈빛을 연기하는 게 신기하다.

Dec 5, 2014

나도 놀줄 아는데 아는데 아는데






 워 우








는 꿈.









상실감이 크다. 하지만 티내고 찡찡대서 둘이 힘들어할바에 그냥 내 슬픔 내가 잘 감당하는게 낫지않겠나 생각한다. '잘'하질 못하는게 문제지만 신경쓰이지 않게만큼은 할 수 있지 않을까.
다음주 월요일에는 여행사에 취소 수수료를 문다.


마릐한, 김대중





"먼 옛날 어느 나라에선 말과 노래가 하나였지요. 거긴 시끄러울 것 같아도 사람들이 모이면 둥지에 애기 새들 마냥 작게 지저귈뿐이지요. 오래살수록, 귀를 밑바닥부터 하늘까지 기울일 수록 귀가 길게 자라나 나중가면 지나가는 모기 심장 소리도 들리게 되지요.
말을 하려면 노래를 해야하고, 아무리 맞고 그럴싸한 말도 소리가 못미더우면 그 마음이 닿지않으니, 사람들은 스스로 소리를 가꿔야 했지요. 곱고 맑게 카나리아처럼 소리내면 될 것 같아도, 화가 날때나 애들 벌을 줄때 날선 쇠줄이 천둥치듯 노래하지 않으면 두렵긴 커녕 우습게 보일 뿐이지요. ..."



말로 형용될 수 없는 것들은 말로 표현되지 않아도 된다.



(이 노래 듣다가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좋은 방법을 깨우쳤다!
있는 힘껏 얼굴을 누르니까 지긋한 통증과 함께 명상마저 되는 기분)











반면에 감정들 뒤에 숨는 말들을 정확하게 꺼내 놓을 때의 쾌감도 있다.

Dec 1, 2014

나는 사실 이 작은 블로그를 굉장히 좋아해





2014년 12월 1일과 나




- 우리아빠는 단순일용직 노무자다. 2007년인가 쯤에 하시던 회사가 부도난 이후 개인파산 신청을 하시게 되면서 한때 사내에서 '베스트 드레서'라고 불리우던 30년이 넘는 양복쟁이 회사원 생활을 마치셨다. 그 과정 중에 대다수의 친구들은 떠나갔다. 여러 헤드헌터들을 만나고 기업의 중직에 지원을 하셨었으나 모두 영어 회화 능력과 석사이상의 학력을 우대했고, 그 결과 대기업에서의 커리어와 온갖 보유 기술들도 모두 무용한것으로 치부되었다. 이후에는 오랫동안 일본으로 출장다니며 거주하며 익혔던 일본어 능력을 이용해 전문번역가 시험을 준비하셨었지만, 그또한 급격히 진행된 노안으로 인해서 좌절되었다. 언젠가 환경미화원도 경쟁률이 엄청나다는 얘기를 하셨던 것이 기억난다. 아, 한동안은 인구 센서스 작업을 맡으셔서 온갖 집을 방문하러 다니시기도 했었다.
 그래서 우리아빠는 단순일용직 노무자다. 고물상을 기점으로 아마 처리불가한 원재 뭉탱이들을 주우러 다니는 일을 하시다가 지금은 건물을 해체하거나 짓는일로 업무가 바뀌셨다. 실내 형광등 불빛, 모니터 불빛아래 반짝이던 피부는 이제 새카맣게 그을리셔서 언제 누구와 사진을 찍어도 가장 검다. 함께 일하는 동료들은 이제 컨테이너 사무실 안에서 같이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이다. 여름에 몸을 앞으로 숙이면 금방 안경을 타고 땀이 고여서 앞을 볼 수 없는 지경이 되고, 겨울엔 이 악물고 상하는 피부를 애써 무시하며 건물을 부순다. 책상 아래 얌전하게 놓여있던 발은 공중을 아슬아슬하게 걷고, 회식으로 통통했던 턱은 이제 날카롭기 까지 하다.
 7시 넘어서 집에 오시는 길에는 꼭 막걸리 두 병을 사오신다. 빈 부엌에서 라디오를 켜서 인기척을 만들어내고 렌지 위의 팬을 켠 채 서서 담배를 피우신다. 빨간 튤립이 그려진 유리컵에다 막걸리를 따르고, 저녁은 해먹기 귀찮으니 대충 치킨 시켜서 때우거나 막걸리 배로 퉁치는게 보통이다. 캄캄한 거실 바닥에 이불을 깔고 두 개들의 이름을 부르며 잠을 청하는 데 여전히 식구들은 집에 오지 않는다. 주무시면서 근육통에 시달리며 작은 신음을 내신다.
그리고 또 월요일이고 또 아침이온다.

- 안그래도 넓었던 이마 위의 머리카락들은 더 뒷쪽으로 후퇴해버렸다. 새카맣던 아빠의 숱많은 머리카락들은 신속히 새하얘졌고, 아주 부지런한 새치염색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도로묵으로 일관했다. 아빠는 이제 더이상 염색을 하지 않는다. 염색자리는 얼러둑 덜러둑 갈색으로 남아있다. 갈색도 누런색도 흰색도 검은색은 더더욱 아닌 낯선 색이다.
부엌 식탁의 가장 왼편 의자에는 아빠가 갈아입는 옷들이 자주 걸려있다. 다 헤진 작업복과 아주 예전부터 줄곧 입는 실내복들도 세월의 빛을 감추지는 못한다. 아주 낯선 색이다.


-12월 15일부터는 졸업전시를 한다. 3주째 촬영 소스에는 더이상 손을 못대고 다른 일들로 무척이나 바빴다. 나도 일을 하느라 바빴다. 졸업전시로 인해 내가 어떻게 세상에 비추어질 것인가에 대한 부담은 사실 크지 않다. 다만 이것이 제대로 완성되고 설치되어 그 공간을 적절히 운용하는 것으로 보이길 기대할 뿐이다.
 아빠가 주중 하루라도 시간을 내어서 졸업 전시에 올수있을까. 물론 내가 4년 내내 어떤 작업을 해왔었는지 아빠는 전혀 모르신다. 아빠는 그저 나에게 반드시 대학원에 가라고 하셨다. 아빠가 아직도 젊다고 생각하지 말라고 하셨다.

-나는 인터넷으로 옷을 구경하는 내 손의 마우스질을 우습게 여긴다.
혼자서 돈을 모아 유럽여행을 가려고 했었던 계획이 몹시도 향락적으로 느껴진다.
경제적으로 어려우니 나는 이런걸 할 자격이 없어라기보다 내가 바보같은 고민들과 시시한 관계들로 허투루 보내는 시간, 커피 사마시는 돈을 마련하려고
아빠가 본인을 얼마나 소모시켰는지를 나는 기억하고 싶은 것이다.

학교를 5년 다니는 동안, 해외를 네 번이나 드나드는 동안, 우리아빠는 계속 단순일용직 노무자셨기 때문이다.


함양아, 새의 시선




함양아Yang ah ham, <새의 시선(Bird's Eye View)>

0-
Bird’s Eye View(Excerpt), 2008, 10min. single channel or 3 channel video installation. High Speed HD, silent

Bird’s Eye View was created as a site-specific video installation for the Old Seoul station building.
It is composed of three sequences; the first and last show the pigeons both in and outside the site from
an outside perspective. The middle part is filmed with a micro camera attached to a pigeon’s body and
offers an exclusively bird’s eye view of the inside of the station. In this work, the pigeons represent
the trained and controlled beings in society. As such it could be a response to the individual egos whose
views have remained silent through humanity’s accounts of time (history).

1- <Bird's Eye View>(2008)는 비둘기의 시선으로 서울 구 역사를 촬영한 작업이다. 작품은 감상자의 시선
닿는 높이의 3면에 설치된다. 가득한 먼지 사이로 비둘기들이 날아다니는 어지러운 화면이 보여주는
것은, 함께 하지만 소통하지 않는 인간과 비둘기의 관계이자 인간과 인간 간의 관계이다. 한편 작가는
감상자와의 소통을 위하여 은유를 즐겨 사용한다 (http://cafe.naver.com/moca2009/2159)
2- <새의 시선-Bird’s Eye View>는 침묵해온 존재들의 시선으로 인간세계를 바라보는 작품이다. 작가는 인간에 의해 훈련되고 조정되는 사회구성원으로서의 동물인 비둘기를 선택하고, 그들의 시선으로 인간에 의해 쓰여진 시간을 바라본다. 






PS. 



<보이지 않는 옷(Invisible Clothes)>


Nov 21, 2014

사육 포기 동물들 리서치.


하필이면 홍보물 제작 아르바이트를 받는다는게, 유기 동물들에 대한 시민토론회에 관한 거였다. 그냥 처음엔 동물농장에서 예전에 숱하게 보았던 이미지들을 떠올리면서 아 뭐 그런거거니 하다가 구글링을 좀했는데, 봤던 이미지들에서 아직도 허우적거리고있다. 아아아아




작가가 누군지 잘 모르겠지만 대충 안락사 당하기 직전의 개들을 찍는다는 컨셉이었던것같다. 과연 저 눈물이 진짜인가 싶지만 연출에 대한 진위여부를 가리기 이전에 무엇이 이 개를 저토록 구슬프게 만들었는가 생각케한다.

저 개는 이제 어디에도 없겠지.






인간에게는 매일 여러가지 선택지들이 주어지지만
애완동물, 특히 개들에게는 자신의 의지와는 별 상관없이 임의로 만나게 된 주인이 이들의 유일한 선택지이다. 아니 선택이라는 단어도 어울리지 않지.
그런데도 매일 그를 반기고 따르는 것이다. 아주 평생을.

그날 밖에서 뭘 실패했건 뭘 못했건 누가 우릴 어떻게 판단했든
집에 오면 아무 상관없이 나를 향해 꼬리를 흔드는 개가 있다.




 어쩌면 개들에겐 자기를 꼭 안아주는 사람의 어깨하나면 평생이 충분한데-

그 충성심 그 헌신 그 무조건적 애정은 주인에 의하여 무시당하거나 짓밟히거나
아주 버려지는 것으로 연결되는 것이, 그래서 하루아침에 모든 안정감에서 벗어나서 어떻게 무엇을 어찌 해야할지 모르는 황망한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것이 수많은 개들의 현실이란다.그런 개들이 너무너무 많아서 (이 문제를 '후처리'하는 데에 대한 성격이 강한 것 같다..) 방안을 모색해야한단다.
개새끼 개새끼 하는데 과연 누가 '개새끼'인가.

예쁨과 귀여움이 다 사라지고,
아프고 비용을 발생시키고 귀찮다 여겨지고 못생겨지고 말도 안듣는다고 해서
과연 이렇게 버릴 수가 있는건가. 어제까지 집안에서 하하호호 하던 가족을? 이렇게?

아아아아 진짜 못됐어... 진짜 못됐다. 애정을 돌려주지 않는 모종의 배신에 대한거라면 내할일 하느라고 방안에 못들어오게 끙끙 앓게 하는 나부터도 사실 진짜 못됐다. 하지만 저렇게 정말 밖으로 내버리는 사람들의 생각은 절대 상상이 안되고 이해가 안간다. 끝내 설득당하지 않을 것이다.




안락사 시키는 의사선생님들도 너무너무 힘들고




저 기다리는 얼굴이 너무 미안해서 보기가 힘들 지경이다.



개들이 인간에게 주는 사랑의 온도를 생각한다면
이런식으로 그들이 눕는 바닥은 너무. 
차다.







http://slowalk.tistory.com/1934





http://bfbridge.tistory.com/46



10cm - 짝사랑, 스토커





그대의 표정이 너무 차가와서
나의 말은 닿기도 전에 얼어붙네


그대의 말투가 너무 건조해서
나의 맘은 열기도 전에 시들었지


혼자 나누는 사랑도 아름답지만
오늘 같은 새벽에 이런 뻔한 노랠 누가 듣는다고


그대여 먼저 잠들지 말고
오늘밤 나를 생각해주오


아직도 뒤척이는 나처럼
한번쯤은

그대의 마음이 너무 뾰족해서
내 맘대로 만지기엔 겁이 나네


그대의 대답은 너무 당연하고
나도 같이 끄덕이며 웃어버렸지


혼자 내뱉는 사랑도 의미는 있지만
오늘 같은 새벽에 이런 뻔한 노랠 누가 듣는다고


그대여 먼저 잠들지 말고
오늘밤 나를 생각해주오


아직도 뒤척이는 나처럼
그대여 나를 생각해주오


오늘밤 나를 걱정해주오
여전히 뒤척이는 나처럼


한번쯤은
한번쯤은











...

난 안경 쓴 샌님이니까
내가 이렇게 사랑하는데 이렇게 원하는데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바라만 보는데도
내가 그렇게 불편할까요 내가 나쁜 걸까요
아마도 내일도 그 애는

나는 왜 이런 사람 이런 모습이고 이런 사랑을 하고
나는 아무것도 될 수 없고 바라만 보는데도
내가 그렇게 불편하니까 내가 나쁜 거니까
아마도 내일도 그 애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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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재밌는 곡들도 많이 썼는데 (가령 드림스컴트루 라니) 
이런 곡들은 참말 지끈대고 아프다 아파 아야

Nov 19, 2014

이렇게는 안된다.




많은 우물을 여러개 파는 것보다
하나의 우물... 아냐 두 개까진 괜찮을듯. 두 개의 우물을 잘 파놓고 관리하는 게 좋을 것같다.

누군가는 아마추어일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하는 게 좋다고 얘기했지만
어어어어 싫어 어어어어어 싫어. 공부를 제대로 하는게 좋겠다. 후짐을 포장할 수 음슴.



부디 내일부터는 숨을 천천히 쉬는 일 부터 집중해서 할 수 있게 하소소

작년 6월 어느 오후


Nov 17, 2014

네 개의 발자국




더욱이 완벽주의에 젖어 사는 내 눈에는
내 인생은 대학교 입학 이후로 이미 몇 가지 최악의 일들이 저질러진, 더러운 인생이 되었다고만 생각됐다. 회복불가능한, 이제는 누군가의 앞에 도저히 떳떳이 설 수 없는 삶을 살게 되었다고 말이다. 이제 나는 실패작이며 그 흔적은 주홍글씨마냥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성경을 바탕으로 했을 때도 틀린 판단이 아니다.
실제로 실수로든 고의로든 나는 하지말았어야 했을 일들을 숱하게 저질렀고, 한 번 지나간 시간이 거꾸로 흐르지 않는 한 그때의 일들은 번복되지 않는다. 또한 그 일들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에 대한 책임은 내 인생 전부로 갚아야 할만큼 막중하고 무겁다.

그런데 이 오랜 고민이 엄청난 교만임을 비틀거리는 걸음 속에서 깨닫는다.
이 모든것을 대신 책임지겠다 하신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약속을 잊었기 때문이다.

지금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 나를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덮고 있다.
당신의 가장 값진 것과 엉망진창 똥멍청이인 나를 바꾸셨다.

예나 지금이나. 최근에 내가 잘할때나 못할때나.
그 사랑은 애초부터 내가 무언가를 잘했기 때문에, 내가 먼저 무언가를 해냈기 때문에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이미 처음부터, 내가 죄인일때부터 하나님을 나를 그냥 사랑해오셨다.
절대적으로 자발적인 짝사랑이다.
그래서 받아 누리기만 하면 된다. 그냥 매일 하나님께 나아가기만 하면 된다.
그 사랑은 변하지도 멈추지도 이기적이지도 악하지도 않아서
나를 오래 기다려주고 참고 견디고 지겨워하지도 않고 그저 선하게 나와 함께 할 것이다.
영원히, 영원히

가장 강하신 이가 나를 판단하고 고소하는 모든 이들로부터 나를 보호하신다.
당신은 내 잘못을 더이상 기억하지 않는다 하신다.
나에게 새로운 자격, 새로운 지위, 새로운 생명, 새로운 열심, 새로운 힘, 새로운 목표지를 직접 나란히 동행하시며 부여하시고 이렇게 계속 함께 가자, 하신다.
끔찍한 일들을 다시는 하지 않을 수 있게 나를 바꾸겠다 하신다.
주변이들에게 도움을 끼치는, 아름다운 삶을 살도록 하겠다 하신다.
'이미' 그렇게 살아온 나날들이었다.

이제 그만 휘청대는 걸음을 바로 잡아 다시 똑바로 걷는 것을 선택하자.
지극히 세속적이고 계산적으로 변해가는 두 눈을 들어 영원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자.
말로만 비전을 주절대지 말고 이제 그만 삶으로 살아내기로 하자.
겸손하게, 겸손하게
더 겸손하게


우선되야 할 것은 성공이 아니라 경건이다.

Nov 13, 2014

이따금씩 찾아오는 비메오 과식.


BOTHER // LES SINS from PICTURE PICTURES on Vimeo.



다양한 거리, 재밌는 배치






Holy Soul // Salt Cathedral from Matthew Beck on Vimeo.




와인잔을 마시는 제스춰
피부질감






Chase and Status - Alive from Josh Cole on Vimeo.












Watchtower of Turkey from Leonardo Dalessandri on Vimeo.



편집 어떻게 하는거야? 배우고 싶다.






READY TO SURRENDER from Maceo Frost on Vimeo.




크레딧이 더 끝내줌






Mac Premo from Bas Berkhout on Vimeo.




좋은 PR







Daisy from Agathe Bray-B on Vimeo.


청순한 썸네일로 속이다니. 어쩄든 쿨.
데이지에 붙은 파리가 혼자 너무 다르게 그려진것같아서 신경쓰인다.

Nov 11, 2014

메모

-필요한건 밸런스. 너무 헌신적일 수 있어 조심해야한다.



-이 곳의 가능성을 포기하지말자고
방황하지 말고/ 여기에서/ 계속 놀자


-뱉었으면 책임을

놀란 감독이 4학년 미대생들에게 해준 이야기


















Nov 7, 2014




너의 상실 너의 실패 너의 공허 너의 무력함 너의 어지러움 너의 통증

그 얼굴 표면으로 드러나지 않는 아픔이 자꾸만 보여서 슬프다. 

너가 슬퍼하는게 전해져서 나도 슬프다.





아------------------------아

Nov 6, 2014

결여의 발견으로서의 응답


문제는 이것이다. 두 사람이 동시에 서로를 사랑하게 되는 일은 드물다는 것. 대개는 먼저 사랑을 시작하는 한 사람이 있고, 그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밝히기를 요구받는 다른 한 사람이 있다. 그러므로 사랑(넓은 의미에서 관계의 논리학)을 탐구하려면 두개의 물음을 따로 물어야 한다. 도대체 어떤 구조 속에서 A는 B에게 “나는 너를 사랑해”라고 말하게 되는가. 그리고 어떤 조건이 갖춰질 때 B는 A에게 “나도 너를 사랑해”라고 말하게 되는가. 이 두 물음 중에서 더 흥미로운 것은 후자다. 왜냐하면 내가 어쩌다 너를 사랑하게 된 것일까라는 물음은, 내가 너와 ‘이미’ 사랑에 빠진 이후에 던져지는 한에서는, 물음으로서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물음에 대한 답은 근본적으로 동어반복에 가까워지고 말 것이다. ‘내가 너를 사랑하게 된 것은 네가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정 놀라운 것은,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는 일이 아니라, 그 누군가가 나의 사랑에 응답하게 되는 일이다. ‘우리는 어떤 특정한 상황 혹은 조건 속에서만 타인의 사랑에 기꺼이 응답하는가?’

신선한 인용은 못되겠지만 역시 스피노자가 유용할 것이다. <에티카> 3부의 ‘정리 41’과 ‘주석’을 (편의상) 합쳐 정리하면 이렇다. “그가 누군가의 사랑을 받고 있다고 상상하고, 또 그가 자신이 그 누군가의 사랑을 받을 만한 타당한 원인을 제공했다고 믿는다면, 그는 자부심을 느끼며 기뻐할 것이다. 그런데 그가 누군가의 사랑을 받고 있다고 상상하되, 그가 그 사랑에 어떤 원인도 제공한 바가 없다고 믿는 경우, 그는 그 사랑에 대한 응답으로 그 누군가를 사랑할 것이다.”(Ethics, Penguin, 1996, p.92) 스피노자는 ‘나는 너를 사랑해’가 상대방에게서 끌어낼 수 있을 두 가지 결과를 말한다. 사랑을 받기 시작한 사람이 자신은 확실히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는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하게 된다. “네가 나를 사랑한다고? 응, 나도 나를 사랑해.” 과연 그럴 것이다. 그런데 반대의 경우에 대한 스피노자의 설명 역시 옳은가? 타인의 과분한 호의에는 나 역시 호의로 응답하게 된다는 정도의 얘기라면 동의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사랑’에 대해 말하고 있지 않은가. 사랑을 받기 시작한 사람이 자신은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느낀다면 그가 필연적으로 ‘나도 너를 사랑해’라고 말하게 될 거라 기대해도 좋은 것일까?

스피노자의 두 번째 설명은 언뜻 논리의 비약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가 지금 결과를 확언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조건을 한정하고 있는 것이라고 이해해본다면 받아들일 여지가 생긴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일이 너의 “자부심”만을 북돋우는 방향으로 진행되지 않는 ‘조건’하에서만 응답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 그러나 ‘조건’에서 ‘결과’로 이어지는 과정은 복잡할 것이고 이에 대한 보충 설명은 우리의 몫이다. 나는 <러스트 앤 본>이 스피노자의 문장에 적절한 주석을 달아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남자주인공 알리(마티아스 쇼에나에츠)의 “사랑해”는 사실상 스테파니(마리온 코티아르)의 사랑에 대한 그의 응답이었다. 도무지 응답할 것 같지 않던 그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그는 영화의 끝에 이르러 우리의 예상을 뒤엎고 (어쩌면 알리 자신의 예상마저 뒤엎고) 스테파니에게 응답할 수 있었던 것일까. 이 물음에 답할 수 있게 된다면 우리는 스피노자의 설명에 빠져 있는 고리 하나를 찾아낼 수 있게 된다. 당겨 말하면, 그 고리는 ‘나’라는 존재 내부의 ‘결여’와 관련돼 있다.

사랑을 받기 시작하면 우리는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새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타인의 사랑은 질문이다.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요?” 이 질문과 더불어 내 안을 들여다보기 시작하면, 서서히, 어떤 일이 벌어진다. 그 일은 스피노자가 말한 두 가지 방향을 따를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커지거나 작아진다. 내 안에 비어 있다 생각한 부분이 채워지면서 커지거나, 채워져 있다 생각한 부분이 사실은 비어 있음을 깨달으면서 작아지거나. 후자의 변화, 즉 타인의 사랑이 내가 나를 더 사랑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결여를 인지하도록 이끄는 것, 바로 이것이 나로 하여금 타인의 사랑에 응답하게 만드는 하나의 조건이 된다. 그러나 이게 다가 아니다. 아래에서 <러스트 앤 본>을 통해 알게 되겠지만, 내가 내부의 결여를 인지하는 데에는 나를 둘러싼 외적 조건들도 일정한 영향을 미치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 외적 조건들의 퍼즐이 때마침 어떤 조합을 이루는가 하는 문제는 거의 우연에 속한다. 그러므로 어떤 사랑의 논리학도 결과를 확언할 수 있는 정도로까지 정교해질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가 세상의 모든 우연을 다 통제할 수는 없으므로.



.....

말하자면 이 영화는 스테파니의 다리가 잘리면서 시작되고 알리의 주먹이 박살나면서 끝나는 영화다. 츠네오에게는 일어나지 않았으나 알리에게는 일어난 이 극적인 사건 때문에, 츠네오가 흘린 눈물과는 다른 종류의 눈물을 흘리면서, 알리는 비로소 스테파니에게 말할 수 있게 된다. “사랑해.” 그는 그저 “사랑해”라고 말했을 뿐이지만 우리가 알다시피 그 말은 “나도 너를 사랑해”를 줄인 말이다. 츠네오가 실패한 지점에서 알리는 성공했다. 츠네오가 끝내 발견하지 못한 자신의 결여를 알리는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 발견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게 될 것이다. 영화가 알려주듯이 인간의 손가락뼈는 몸의 다른 뼈와는 달리 절대 회복되지 않는다. 그의 손은 앞으로도 계속 그에게 통증을 느끼게 할 것이고, 더 거대한 결여의 가능성을 상기하게 할 것이고, 스테파니에게 매번 다시 응답하게 할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자신의 결여를 깨달을 때의 그 절박함으로 누군가를 부른다. 이 세상에서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향해 할 수 있는 가장 간절한 말, ‘나도 너를 사랑해’라는 말의 속뜻은 바로 이것이다. ‘나는 결여다.’



없음은 없어질 수 없으므로


사랑에 대한 글은 이제는 읽기도 쓰기도 싫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것이 실은 본능, 충동, 욕망 등의 변장일 뿐이라고 단정하며 짐짓 냉소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자신이 성숙하다고 믿는 미성숙한 소년들을 뿌듯하게 만들기는 하겠으나, 그것은 사랑에 대한 온갖 미신과 기만을 재생산하는 담론들 속에서 달콤하게 허우적거리는 것보다 더 생산적인 태도라고 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믿기 때문에 나는, 이 지면에서 이미 “사랑은 전칭명제로 규정할 수 없다. 그것은 언제나 개별적인 사례로(만) 존재한다”(‘죽일 만큼 사랑해’, <씨네21> 887호)라고 말한 처지에, 다시 사랑에 대해 말해버렸다. 이제 욕망과 사랑의 구조적 차이를 이렇게 요약해보려고 한다. 우리가 무엇을 갖고 있는지가 중요한 것은 욕망의 세계다. 거기에서 우리는 너의 ‘있음’으로 나의 ‘없음’을 채울 수 있을 거라 믿고 격렬해지지만, 너의 ‘있음’이 마침내 없어지면 나는 이제는 다른 곳을 향해 떠나야 한다고 느낄 것이다. 반면, 우리가 무엇을 갖고 있지 않은지가 중요한 것이 사랑의 세계다. 나의 ‘없음’과 너의 ‘없음’이 서로를 알아볼 때, 우리 사이에는 격렬하지 않지만 무언가 고요하고 단호한 일이 일어난다. 함께 있을 때만 견뎌지는 결여가 있는데, 없음은 더이상 없어질 수 없으므로, 나는 너를 떠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신형철의 스토리-텔링] 나의 없음을 당신에게 줄게요,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73779

Nov 4, 2014

Oct 31, 2014

5분짜리 편지



자기 가녀린 등뼈를 보여주기 싫어서 모든것을 앞면으로만 대하는 너에게

유난히 깊은 눈 머리에 눈물을 가득 담고도 더이상 상황을 말하지 않는 너에게

하고 싶은 말들이 앞니의 뒷면까지 바짝 와있는 데 잘근 혀와 함께 속으로 씹는 너에게

나는 불편함을 느끼면서도 자꾸만 이 쪽 그늘로 와서 쉬라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어진다.

까치발을 더해서라도 너에게 숨을 수 있는 그늘을 한 뼘 더 만들어주고싶어진다.

Oct 26, 2014

2014 광주비엔날레에서 만났던 보물들





O LevanteThe Uprising, 2012-2013
happening + video + documentation 


웹상에 올려져있는 영상이 없어서 너무 안타깝다.
벌인 해프닝 영상과 함께 나오는 글이 죽여준다(물론 나는 번역된 한글자막으로 읽었지만.)
http://cargocollective.com/jonathasdeandrade-eng








김성환 Sung Hwan Kim, 게이조의 여름

낯선 형식이 무척 즐겁고 반갑게 다가온다. 여러가지를 함께 엮은 힘이 역시 또 죽임.


보다 자세한 리뷰는 나중에. 내 영상편집부터 일단 잘하자


언젠가 어느날






















































그 날에 대비해 지금을 아무리 사려깊고 빠르게 움직인다해도
나는 절대 아빠의 마음을 따라잡을 수 없을 것이다.

내 인생보다 더 긴 기다림과 내 계획보다 더 깊은 절절함을 한 톨이라도 알 마음이 있다면
함부로 행동하지 말자 나를 쉽게 괴롭히지 말자

Oct 23, 2014

오늘의 마지막 딴짓 : 최근 근황


그러고보면 전 블로그에서는 이런식으로 나의 요즘을 기록하곤 했었구나





거대한 설치 작업을 하려고 장소물색하느라 바빴다.
나는 공사장 주변에 있는 물건들을 되게 좋아한다.
그리고 아저씨들의 타이포 그래피






매일 보고싶다.







광주 비엔날레에서 제일 좋았던 영상 작업 중 하나의 일부인데
응? 블로그스팟엔 안올라가지는건가 흥칫핏
내 마음속에만 간직하는 것으로..



















평생 이사하는 게 인간의 삶이겠지
근데 이건 이름이 너무 세서 슬프다





11월 초에 작업실을 빼야한다.
여름에 땀뻘뻘 흘리며 친구들 고생시키며 이만원이나 주고 사왔는데
작업에 쓰지도 못하고 저렇게 모셔두고 있다






졸전회의 집중 안한대요








9월부터 계속 되고 있는 이 작업은 옮기는게 제일 문제였다.
너무너무 무겁고 이동이 절대 간편하지 않다.
집이라는 게 그런거겠지..








그런 의미에서 긴장되고 초라하고 지칠대로 지친 셀피
(왜?)





안녕










한 작업 하는 동안 다른 퍼포먼스 영상도 촬영할 요량이었는데
한꺼번에 두개는 역시 못하겠더라. 마침 장례식 갈일도 생겨서 다 해논 밥에 재를 확 뿌려버렸다. 하지만 사실 준비가 안되어있어서 못 찍은게 크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하면서 여러밤을 잠도 잘 못자면서 끙끙대기만 했다. 새벽에 깨서 고물상에 일찍 가기도 했었다.
사람들 여럿 쓰는 일만큼은 당연한 소리지만 준비는 적어도 전전날에는 다 되어있어야겠다..고 직접 살로 교훈을 얻는 시간이었다.











대학원을 준비하는 두 남매
빨리 졸업했음 좋겠다 싶다가도 그 말 쉬이 뱉지 않는다.
당췌 몇살인지 여자인지 애매한 존재로 변모해가는 나










분명 그리워질것같다고.
그리워하는 것은 단순 장소는 아니구 이때의 시간과 사람들이다.
더더욱이 다시 반복되지 못할 조합이겠지













새콤달콤이 작게씩 나누어져 있는 이유는 다 따로 있는거다.
절대 한통을 혼자 다 먹어서는 안된다.
(엄청 늬끼해)

유투브에서 피아노 학원에서 날 법한 소리들 음원 찾다가 발견한 것들







뭐지 이 재기발랄함은.






뭐지 이 귀여움은..







이 친구는 뇌성마비라고 한다. 손가락 운동이 잘 안되는데 삼 년째 치고 있다며 격려차원에서 저기 저 선생님 본인이 찍어 올리셨나보다.
장애를 뛰어넘은 사례이면서 신동이니 천재니 불리는 피아노 연주자들의 이름을 숱하게 듣는다. 물론 그들이 대단한것 맞다. 그런데 장애의 범주로 묶이는 비슷한 처지에서 뛰어나지는 않지만 일종의 재활목적으로, 혹은 삶의 어떤.. 포기치 않을 의지, 혹은 삶을 연장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가느다란 실오라기 행위로서 그것을 지속하는 사람들도 있다. 아무의 시선도 닿지 않는 곳에서.
연주가 되게 우아하면서 구슬프다.








하안낫! 두울 세엣 네엣




 피아노 학원이라는 키워드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어린시절에 접속할 수 있다는게 너무나도 신기하다.
 제법 많은 사람들이 피아노를 배우는 경험에 대한 나름의 향수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어렸을 때 나도 피아노를 배웠었는데. 상계동에 살던 시절에는 오빠랑 나를 가르치러 방문렛슨 선생님이 오셨었다. 바이엘을 다 떼갈 무렵 하루는 갑자기 악보를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 날이 있었다. 여전히 영문모를 일이나 이 실선들과 검정색 점같은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도레미파솔라시도가 무엇인지, 열 손가락이 어떤 음계를 누르게 되는지 갑자기 한순간에 모두다 까먹은 것이다. 선생님은 이미 시이작!을 외치셨고 나는 하는 수 없이 뚫어져라 악보를 보며 가만히 앉아있었다. 뭔지 아무것도 모르겠다고 말하자 선생님이 까마귀고기를 먹었냐며 엄청나게 화를 내셨다.
 또 하루는 렛슨을 기다리면서 집에서 탱자탱자 놀고 있는데 선생님이 도착하시기 십분 전에 그제서야 그 날 간단한 쪽지 시험을 보기로한게 생각이 난거였다! 악상기호들이 무슨 뜻인지 맞추는 테스트였는데 아무것도 외우지를 못했던 것이다! 당시 어린 나에게 이 쪽지시험이라는 것은 인생중에 아직까지 경험해보지못한것이었고 그래서 몹시 당황했다. 아무도 알려주지도 않았는데 작달만한 꼬마는 알아서 컨닝페이퍼를 만들었고 책상아래에 갖가지 보물을 넣어두던 녹색 상자에다가 얼른 집어넣었다. 선생님은 도착하셨고 나를 보시자마자 그래 아람아 쪽지시험보자 하셨다. 자그마한 종이였나 문제가 써있는 것을 주셨고, 나는 엄마가 선생님을 뵈러 들어오신 틈을 타 어 선생님 잠시만요 하고 그 상자로 달려가 쭈그린채 얼른 보고 다시 와서 앉아 문제를 풀려고 했다. 안타깝지만 제키보다 높은 피아노 의자에 앉자마자 자꾸 악상기호는 헷갈렸고-엎어진 모자와 뒤집어진 모자는 대체 무슨 뜻이란말인가-어 선생님 잠시만요, 상자로 쪼르르 가기를 나는 계속 반복하며 어설프게 컨닝을 했다. 결국 또 혼났다.

 그래도 세번째 경험은 제법 귀엽다. 하루는 왠지 모르게 오늘은 정말로 열심히 할거야!!!라며 굉장히 기운차게 피아노학원에 갔다. 학원이라지만 옆동에 렛슨하시는 선생님 댁에가서 피아노 수업을 듣고 오는 식이었는데, 그날은 정말이지 콧구멍으로 바람을 쇡쇡거리며 열심히 쳤다. 뭔가 해냈다는 마음에 집에가려고 건물 현관을 나서는데 경비아저씨가 날 붙잡으시며 얘 꼬마야 괜찮니 하셨다. 나는 양 콧구멍으로 코피를 흘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날

어느 누구와 만나도 어떤 이야기를 나누어도 혼자가 되는 날,
그냥 일만 하나 더 떠맡게 되는 날
너의 애정을 과식하고 싶었다만 한 번 더 굶주림을 느끼는 날
해도 밉고 달도 밉고 그냥 베개가 내 머리를 싹둑 삼켜주었으면 싶은 날
지구가 폭발하고 그냥 공기 중 분자가 어서 되었으면 싶은 날

아버지가 보고싶다
아버지가
보고싶다

아버지 이름을 모를리가 없으나 불러도 소용이 없을까봐
내가 그렇게 멀리와있는가봐 부르기를 주저하는데
그래도 아버지가 보고싶다
아버지가
보고싶다


Oct 21, 2014

어제 오늘 내일의 실제 이야기

1.
나는 닉네임 ‘안함’으로 불리는 흔한 미대 졸업생이다. 20대 대부분을 예술학도의 신분으로 살면서 고귀한 예술제도 안전망에서 아름답게 헤엄치며 노닌 장본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안함’을 닉네임으로 정한건 내가 학부 졸업반이었을 때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학점 미달의 이유로 예술학도 신분을 연장하고 있을 때다. 당시는 예술 학도라는 신분이 슬슬 끝나 감에 따라 여느 수천 명의 학도들과 마찬가지로 불안했던 시기였고, 그에 따라 다음 내가 갖게 될 신분이 무엇일지 알아보려고 여기저기 두리번거리고 있던 시기였다. 바로 그때 내 앞에서 명동의 네온사인처럼 현란하게 불빛을 뿜어내고 있었던 것들은 문화예술 지원금, 예술가 레지던시, 청년작가지원금, 예술창작지원금, 문예진흥기금, 차세대 예술인력육성사업, 유망예술지원사업, 시각예술창작 및 전시공간지원 등등 몇 개 안 되는 단어의 조합으로 무한히 뽑아낼 수 있는 마법의 이름들이었다.

예술가 지원금(앞에서 말한 수많은 마법의 이름들을 감히 통칭해서 부르겠다.)은 어느덧 소위 부잣집 자식이 아니라면 어떻게 해서든 받아야 이 땅에서 그나마 굶어 죽지 않고 예술을 할 수 있는, 그리고 더불어서 예술가라는 직위를 수여받을 수 있는 하나의 필수조건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모두가 알다시피 한정된 자원이 있으면 그 다음은 불 보듯 뻔한 스토리가 이어진다. 설상가상으로 그마저 제 역할을 다 하는 자원도 아니지만, 무한 경쟁에 내몰린 이들은 그것을 가릴 때가 아니었다. 금싸라기 땅이 되어버린 예술가 지원금은 학부시절 ‘순수한 예술’만 공부해오던 나에겐 그 시작 절차부터 진입 장벽이 높았다. 처음 담배를 잡았던 학창시절 그 떨리는 마음으로 인터넷에서 지원서를 다운로드 받고 파일을 열던 그 순간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대문짝만 하게 쓰여 있던 ‘사업 계획서’. 사업 계획서라니?! 난 고귀한 예술을 하는 사람이오! 사업 계획서라니?! 하지만 이런 해프닝 아닌 해프닝도 시간이 지나면 무뎌지기 마련. 반복 학습의 결과로 나는 얼추 복잡한 서류들을 읽어내는 능력이 생겼고, 어떤 단어들을 써야 하는지 감을 잡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전히 내 마음 한편에는 여러 가지 질문들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질문들은 다시금 내게 물었다. ‘왜 지원을 받아야 하는 거지?’ 물론 당시에 나는 혁명가가 아닌 이상 큰 틀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지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스스로 내고 싶어 했고, 그 답을 찾는 과정이 결코 쉽지 않으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려면 스스로 결단이 필요했다. 그래서 나 자신에게 붙인 이름이 바로 ‘안함’이었다.

처음에 섣불리 선언된 나의 거부들은 역설적으로 거부된 대상을 좀 더 가까이 들여다보게끔 만들었다. 예술가 지원금은 내 생각보다 훨씬 더 큰 맥락을 갖고 있었다. 단순히 돈의 문제를 떠나 인식의 문제, 그리고 더 나아가 사회적 존재에 대한 문제로 다가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하지만 내가 여기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심사 기준, 사전/사후 지원 방식, 공공기금의 공공화, 국가 주도의 예술 지원 사업, 무한 경쟁의 논리 등과 같은 예술가 지원금으로 파생된 단편적인 현상들이 아니다. 조폭 영화에서 가장 멋있는 배우는 말한다. ‘난 한 놈만 패.’ 그 한 놈을 설령 잘못 잡았더라도 일단 잡았으면 되돌릴 수 없다. 그래서 내가 지금 잡은 그 운도 지지리도 없는 한 놈은, 바로 ‘예술가 지원이 결과로 도출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다.


2.
예술가 지원이 결과로 도출될 수 있을까. 이 질문 속에는 중요한 단서가 하나 숨어 있다. 예술이 어떠한 결과를 만들어내는지 혹은 만들어내지 못할지는 차후의 문제이다. 여기서 찾을 수 있는 것은 ‘결과가 도출되는 예술을 지원하겠다.’라는 예술가 지원금의 주체 의도이다. 이때 결과는 미학적 의미에서 말하는 과정-결과의 의미가 아니라, 사회-문화적인 결과의 의미로써 제도화된다. 그 결과가 어떻게 의미화되며 제도화되는지를 한 번 파헤쳐보자.

예술 지원금의 가장 첫 번째 기준은 지원받는 대상이 예술가인가를 증명하는 것이다. 아니 적어도 대상자가 예술로써 사회-문화적인 기여를 할 수 있는지를 증명하는 것이다. 그리고 연이어 파생되는 두 번째 기준, 바로 지원받는 대상의 예술행위에 대한 예측 가능한 미래를 담보한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기준으로 예술가 지원금의 주체는 예술가를 규정하는 프레임과 예술행위의 범위를 예측하는 가이드라인을 갖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지원받는 혹은 받으려는 자칭 예술가들을 포함한 여타 사회 전반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술가를 규정하는 데에 각기 다른 대답을 하고 있다. 이는 곧 우리 사회가 아직 예술에 대한 규정을 합의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술가 지원금의 주체들은 배타적인 입장을 고수하고 있고 또 그럴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흔히 생각할 수 있는 관료적인 실무 때문이라는 이유를 넘어서 오랫동안 우리가 가져온 커다란 인식이 이러한 괴리를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을 ‘생산의 환영’이라고 생각한다.

‘생산의 환영’은 예술행위뿐만 아니라 인간이 행동하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지배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체제에선 모든 행위는 잠재적으로 생산 가능한 그리고 동시에 소비 가능한 경제적 활동으로 규정된다. 반대로 말하면 어떤 행위가 경제적 활동으로 귀결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비전문적인 행위, 잉여 활동, 아마추어리즘, 취미, 혹은 더 나아가 실패한 행위 내지는 비생산적인 행위가 되어버린다. 그리고 이렇게 수면 아래로 침식한 행위들은 보호받지 못할뿐더러 존재 자체에 위협을 받는다. 위에서 언급한 예술가 지원금의 주체로부터 나오는 예술가와 예술행위에 대한 규정은 바로 여기서 ‘생산의 환영’과 맞물리게 되는 것이다. 다만 경제적 생산에서 문화적 생산으로 이름만 바뀌었을 뿐, 이 두 개념 사이에는 어떠한 차이도 있지 않다. 예술가를 규정하는 것에서부터 예술행위의 결과를 담보하는 것까지, 이 모든 것이 예술을 단순히 사회-문화적인 기여 역할을 하는 생산-소비 형태의 개념으로만 이해하기 때문이다.

예술가 지원은 단어의 뜻과는 다르게 결국 예술가를 제도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오늘날의 예술가는 생산의 환영을 꿈꾸며 무한 경쟁에 내몰려 끊임없이 스스로 증명하고 자신의 행위가 가져올 경제(문화)적 효과를 홍보해야 한다. 나는 묻고 싶다. 이것이 정말 나와 그대가 그토록 원하고 꿈꿔왔던 것이었던가.


3.
예술행위의 결과란 무엇일까. 그것은 작품도 아니고, 전시(상영, 공연, 출판 등)도 아니고, 예술가의 직업의식 표출도 아니고, 노동의 성취도 아니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그 시작이 어디인가를 생각해봐야 한다. 예술행위는 그 행위를 만드는 동기나 목적의식, 다시 말해 의도가 선행된다. 그러나 의도가 곧 예술행위의 시작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의도는 어느 불특정한 순간에 나올 수 있으며 자신의 삶 외부에서도, 심지어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의 외부에서도 나올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대정신을 만드는 것은 지배계급의 권력 유지용 서류들이 아니다. 반대로 서류에 기재할 수 없는 것들, 존재를 규정 받지 못한 것들, 경제적 생산을 하지 못하는 것들, 예측 가능한 미래를 담보하지 못하는 것들이다. 이렇게 수면 아래에 침식된 생각과 행동들이 불현듯 불특정한 이의 몸 안에서 터져 나오는 것이 바로 의도이다. 그리고 예술가는 그 불특정한 이들 중에서 예술이라는 표현 방법을 가진 이에 불과할 것이다. 예술행위는 결코 한 예술가 개인의 의지나 역량으로 시작되지 않는다. 그것의 시작은 ‘공동체적 공명현상’이다.

그렇다면 예술행위의 과정은 어떠한가. 한 미술작가의 전시가 열렸다고 생각해보자. 한 작가가 미술 작업을 어떠한 의도를 갖고 했고 그 결과로 여러 기관 및 개인들이 관계되고 전시가 열렸으며 또 여러 사람들이 그 전시장에 모였다. 간단한 하나의 문장으로 열거한 이 일련의 과정들은 보기와는 다르게 결코 단순하지도, 필연적이지도 않을뿐더러 어느 과정 하나가 그다음 과정을 보장하지도 않는다. 바로 여기에 예술행위가 갖는 또 다른 특성, ‘임기응변의 상태 참조’가 있다. 행위가 일어나는 그 시간과 공간 그리고 그것들에 매개된 관계 주체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임기응변의 상태 참조’는 행위로 하여금 어떠한 목적에도 얽매이지 않게 만든다. 매 순간 환경과 끊임없이 호흡하기 위해 주체를 해방시켜야 한다. 상품화된 주체성, 즉 스스로 규정하고 스스로 독점하는 배타적인 자기인식은 공동체적 공간인 여기서 이제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그래서 예술 행위자의 의도와 예술행위가 만들어지는 과정 그리고 예술행위가 일어나는 현장은 서류에서부터의 일탈을 꿈 꿀 수밖에 없다.


4.
예술가 지원금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술과 일상이 분리되면서 우리는 전자가 후자를 보완해줄 것이라는 착각 속에 갇혀 버렸다. 그것이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공공예술이고 공동체 예술이며 지역 예술이다. 하지만 그것은 보완이 아니라 오히려 예술과 일상의 분리를 촉진하는 ‘상호 착취-참여’의 관계이다. 예술과 일상 사이에는 예술가 지원금의 주체와 같은 매개자가 존재한다. 그리고 매개자는 필연적으로 권력자일 수밖에 없다. 결국 예술과 일상이 서로를 착취하고 그 착취에 서로 참여하면서 매개자를 강화시키는 꼴을 만드는 것이다.

예술 활동을 공동체적 활동으로 본다면 상황이 많이 달라진다. 예술의 영역이 예술을 쫓는 이들로 하여금 그곳에 들어가야 할 조건으로 만들었다면, 공동체의 영역은 그 획득해야만 했던 예술을 예술의 영역에서 일상의 영역으로 재배치시킨다. 고유한 예술의 영역에서 예술이 개인(혹은 사회-문화적으로 상품화된 개인)의 성취와 경제(문화)의 기여를 위한 활동이라면, 공동체의 영역에서는 그것이 생활의 일환으로 탈바꿈된다. 전자가 생존을 위한 노동이자 매개된 삶이라면, 후자는 공존을 위한 해방이자 직접적인 삶이다. 요컨대 공동체의 영역에서 예술은 매개된 삶으로부터 지배당하지 않는 방식을 끊임없이 도모하게 만들고, 고립된 주체를 해방시키는 역할을 하고, 낡은 가치관을 바꾸려는 시도이며, 그 형식에 있어서 상품화됨을 거부하는, 보다 더 현실적이고 일상적인 활동이다.

공동체라는 것을 일단 통상적인 편견을 버리고 볼 필요가 있다. 공동체를 다른 두 사람 이상이 모여서 생활이나 행동 또는 목적을 같이 하는 집단이라고 쉽게 생각할 수 있는데, 공동체를 인간의 소유물에 한정 지어서 보기보다는 그 의미를 확장시켜야 한다. 나를 담고 있는 공간, 그 공간에서 공존하고 있는 모든 생명, 시간을 뛰어넘어 의식을 공유하고 있는 모든 개체들, 심지어 이 모든 것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조차도 공동체라고 말할 수 있다. 나는 혼자서 존재할 수 없으며, 모든 것과의 관계 속에서 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나는 일상생활 속에서 수많은 공동체를 발견하지만 그것들이 파괴되는 것도 수없이 본다. 혹자는 진정한 공동체는 지속 가능한 조건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그 의견에 전적으로 반대한다. 공동체는 우리의 삶 속에서 그 누구도 모르는 사이에 생성되며 끊임없이 해체되는 것을 스스로 반복한다. 다시 말해 공동체는 생성의 단계, 즉 관계가 이루어지는 그 순간이 곧 절정이며 쇠퇴이다. 그 짧은 찰나가 모든 것을 지배하며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된다. 예측 가능한 미래를 보장하지 못함은 역으로 새로운 가능성의 길을 만들어낸다. 이 만남의 기쁨과 이별의 슬픔이 공존하는 공동체는 교환가치를 뛰어넘으며 자본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난다. 모든 것이 교환가치를 갖게 된 지금 여기서, 공동체를 꿈꾼다는 것은 어떤 이상향으로의 진보가 아니다. 그것은 본래 우리가 갖고 있었던, 잊고 있었던, 그리고 묵살되었던 본능을 되찾는 것인 동시에 공존하는 주체들의 직접적인 삶을 위한 투쟁이다.


5.
예술가 지원금은 아이러니하게도 나로 하여금 다른 방식의 삶을 찾도록 유도한 여러 가지 지표들 중의 하나이다. 미답의 지대를 찾아가는 활동에서 올바른 길을 걷는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지점에서 다른 삶의 방식, 다른 삶의 공간 그리고 다른 삶의 관계들을 만들어내는 과정이야말로 예술 활동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생존을 기관에 맡기는 방법보다는 공존을 위해 스스로 조직화하는 일 또한 예술 활동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생활의 기점으로부터 무엇을 먹고사는지, 누구와 먹고사는지, 무엇을 하며 먹고사는지를 직접적인 삶의 에너지로 바꾸는 일 또한 예술 활동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누군가는 이렇게 질문할 수도 있겠다. 사실 예술가 지원금을 받을 능력이 안 돼서 그렇게 하는 거냐고. 이에 대한 대답으로 나는 마지막으로 이 말을 하고 싶다.

“예술가 지원금, 저도 참 좋아하는데요, 제가 한 번…”


 안함


얼룩진 5호 , [예술과 제도] 예술가 지원금, 저도 참 좋아하는데요. 제가 한 번…, http://alllookzine.net/index.php/archives/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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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졸업심사와 졸업전시 준비로 혼이 나갈정도로 바쁜 와중에 나는 돈을 벌 필요를 강렬히 느끼게 되었다. 최근까지 신사동 모 미술학원에서 S대를 지망하는 친구들을 실컷 가르치는 동안엔 아무 걱정이 없었는데, 수시 철이 지나고 수많은 아이들이 떨어져 나가자 학원에서는 '새끼선생님'들은 필요치 않게 되었던 것이다. 웃긴 건 아직도 내가 가르치던 친구들 중에 누가 1차에 합격했는지 알지 못한다는 것과, 더이상 나오실 필요 없어요 라는 통보 없이도 나는 아주 자연스럽게, 잘렸다는 것이다.
 네오룩을 몇주간 들락날락했다. 위시캣을 잠시 들여다보다가 알바몬을 뒤지기 시작한다. 결국 그 사이 어딘가이다.
 학원강사일을 하다보니 절대적인 수로는 사실 그것조차 많은 양은 아닐지 몰라도, 도저히 최저시급을 조금 웃도는 수준의 일을 하기로 다시금 마음먹는 일이 참 쉽지가 않고 서럽다. 그러니 네오룩에 다시 매달린다. 전문 미술 인력을 원하는 일들. 이것도 가난하기는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날짜나 기간때문에 또 마구마구 부딪친다. 다시 알바몬을 향한다. 다시 네오룩을 향한다. 다시 알바몬. 다시 네오룩. 절망스럽게 노트북을 접고 밖에 나와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거리를 걷는데, 오늘 요망한 꽃무늬가 박힌 긴 치마를 입고 백팩을 맨 나를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상상해보았다.

 경제적인 가치로 환산된 나는 이 세상에서 몹시도 싸구려일 수 있다. 그럴때가 훨씬 많겠지.
내가 이런 교육을 받으려고 그간 얼마나 돈을 들이고 수고해왔는데 ! 라며 하소연 섞인 투정을 부리고 싶은 게 아니다. 예술의 영역에서 우리가 하는 일들, 그 관련된 모든 시간들이, 실제적인 삶 속에서, 정말로 우리가 숨쉬고 밥먹고 걸어다니는 우리의 삶 속에서, 이렇게 무력하게 차단당하고 거세당하는 걸- 그냥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제로의 가치로 받아들여지는걸 더이상 당연히 받아들여서는 안되겠다는 거다. 그럴 수 없다는 거다. 그냥 이렇게, 숙이고 들어가고 싶지 않다는 거다.
우물은 목마른 사람이 파낸다지. 동료들을 찾고, 맨손으로 돌파구를 직접 파내야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