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c 1, 2014

나는 사실 이 작은 블로그를 굉장히 좋아해





2014년 12월 1일과 나




- 우리아빠는 단순일용직 노무자다. 2007년인가 쯤에 하시던 회사가 부도난 이후 개인파산 신청을 하시게 되면서 한때 사내에서 '베스트 드레서'라고 불리우던 30년이 넘는 양복쟁이 회사원 생활을 마치셨다. 그 과정 중에 대다수의 친구들은 떠나갔다. 여러 헤드헌터들을 만나고 기업의 중직에 지원을 하셨었으나 모두 영어 회화 능력과 석사이상의 학력을 우대했고, 그 결과 대기업에서의 커리어와 온갖 보유 기술들도 모두 무용한것으로 치부되었다. 이후에는 오랫동안 일본으로 출장다니며 거주하며 익혔던 일본어 능력을 이용해 전문번역가 시험을 준비하셨었지만, 그또한 급격히 진행된 노안으로 인해서 좌절되었다. 언젠가 환경미화원도 경쟁률이 엄청나다는 얘기를 하셨던 것이 기억난다. 아, 한동안은 인구 센서스 작업을 맡으셔서 온갖 집을 방문하러 다니시기도 했었다.
 그래서 우리아빠는 단순일용직 노무자다. 고물상을 기점으로 아마 처리불가한 원재 뭉탱이들을 주우러 다니는 일을 하시다가 지금은 건물을 해체하거나 짓는일로 업무가 바뀌셨다. 실내 형광등 불빛, 모니터 불빛아래 반짝이던 피부는 이제 새카맣게 그을리셔서 언제 누구와 사진을 찍어도 가장 검다. 함께 일하는 동료들은 이제 컨테이너 사무실 안에서 같이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이다. 여름에 몸을 앞으로 숙이면 금방 안경을 타고 땀이 고여서 앞을 볼 수 없는 지경이 되고, 겨울엔 이 악물고 상하는 피부를 애써 무시하며 건물을 부순다. 책상 아래 얌전하게 놓여있던 발은 공중을 아슬아슬하게 걷고, 회식으로 통통했던 턱은 이제 날카롭기 까지 하다.
 7시 넘어서 집에 오시는 길에는 꼭 막걸리 두 병을 사오신다. 빈 부엌에서 라디오를 켜서 인기척을 만들어내고 렌지 위의 팬을 켠 채 서서 담배를 피우신다. 빨간 튤립이 그려진 유리컵에다 막걸리를 따르고, 저녁은 해먹기 귀찮으니 대충 치킨 시켜서 때우거나 막걸리 배로 퉁치는게 보통이다. 캄캄한 거실 바닥에 이불을 깔고 두 개들의 이름을 부르며 잠을 청하는 데 여전히 식구들은 집에 오지 않는다. 주무시면서 근육통에 시달리며 작은 신음을 내신다.
그리고 또 월요일이고 또 아침이온다.

- 안그래도 넓었던 이마 위의 머리카락들은 더 뒷쪽으로 후퇴해버렸다. 새카맣던 아빠의 숱많은 머리카락들은 신속히 새하얘졌고, 아주 부지런한 새치염색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도로묵으로 일관했다. 아빠는 이제 더이상 염색을 하지 않는다. 염색자리는 얼러둑 덜러둑 갈색으로 남아있다. 갈색도 누런색도 흰색도 검은색은 더더욱 아닌 낯선 색이다.
부엌 식탁의 가장 왼편 의자에는 아빠가 갈아입는 옷들이 자주 걸려있다. 다 헤진 작업복과 아주 예전부터 줄곧 입는 실내복들도 세월의 빛을 감추지는 못한다. 아주 낯선 색이다.


-12월 15일부터는 졸업전시를 한다. 3주째 촬영 소스에는 더이상 손을 못대고 다른 일들로 무척이나 바빴다. 나도 일을 하느라 바빴다. 졸업전시로 인해 내가 어떻게 세상에 비추어질 것인가에 대한 부담은 사실 크지 않다. 다만 이것이 제대로 완성되고 설치되어 그 공간을 적절히 운용하는 것으로 보이길 기대할 뿐이다.
 아빠가 주중 하루라도 시간을 내어서 졸업 전시에 올수있을까. 물론 내가 4년 내내 어떤 작업을 해왔었는지 아빠는 전혀 모르신다. 아빠는 그저 나에게 반드시 대학원에 가라고 하셨다. 아빠가 아직도 젊다고 생각하지 말라고 하셨다.

-나는 인터넷으로 옷을 구경하는 내 손의 마우스질을 우습게 여긴다.
혼자서 돈을 모아 유럽여행을 가려고 했었던 계획이 몹시도 향락적으로 느껴진다.
경제적으로 어려우니 나는 이런걸 할 자격이 없어라기보다 내가 바보같은 고민들과 시시한 관계들로 허투루 보내는 시간, 커피 사마시는 돈을 마련하려고
아빠가 본인을 얼마나 소모시켰는지를 나는 기억하고 싶은 것이다.

학교를 5년 다니는 동안, 해외를 네 번이나 드나드는 동안, 우리아빠는 계속 단순일용직 노무자셨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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