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l 31, 2015

변방연극제 십오원오십전 중


살아있기 그리고 생각하기로서의 현대미술
유병서
보통 예술이라고 하면 일상생활에 영향을 주거나, 일상생활에서 영감을 받거나 하는 식으로 일상과는 약간 빗겨나 있는 것처럼 느껴지고, 따라서 일상 자체에서 발생하는 예술은 예술이 아니거나, 예술계 안에서의 발생하는 일상생활은 중요하지 않게 취급받거나 혹은 무시당하게 된다.
예를 들어 예술인 복지가 그러한데 현실과 동떨어진 예술과 이러한 배경에서 탄생한 예술가의 인상은 복지라는 일상적인 이슈와 만나 다소 초현실적이며 기이한 모습으로 다가 오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많은 예술가들이 정확히 노동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노동에 준하는 무언가를 행하고 있고, 때론 이런 행위를 통해 무언가를 바라기도 한다. 하지만 예술가의 창작은 그 가치를 매길 수 없는 어떤 미궁의 지점이 있고 바로 이러한 지점 때문에 예술가는 역설적으로 자신의 행위를 통해 피해를 받는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인, 역시도 기이한 모습으로 존재하게 된다.
과거 예술은 현실과 동떨어진 것으로 별개의 시공간에서 존재하는 독립적인 어떤 것으로 인지되었고 작가들도 으레 그러한 존재인 것으로 대접받거나 또는 희생되어 왔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지금/여기의 시간 속에서 예술, 특히 현대미술은 일상 속으로 훨씬 더 깊숙이 침투해 들어오게 된 듯 하다. 소위 ‘관계적미학’이라 불리는 수행적인 작업들 중 일부는 일상행위와의 변별점을 도저히 식별할 수 없는 것들도 있다. 갤러리에서 요리를 한다거나(티라바니자) , 거리에서 청소를 한다거나(하이레드 센터) , 쥐를 잡아 다시 풀어준다거나(침폼) 하는 일상적인 행위들은 현대미술의 역사에서 기념비적인,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는 것이다.
한편 현대미술의 맥락에서 일상적인 예술이 좋은 것이며, 예술적으로 훌륭한 작품은 일상적인 것은 분명하나, 모든 일상이 예술이되고, 모든 예술이 예술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현실적으로 의미있는 작품들이 있지만 이 작품들이 전시장을 떠나 일상으로 들어오는 순간 그러한 오브제/작품들은 대부분은 가장 중요한 기능을 잃는다. 또한 일상적인 행위, 예를들어 요리를 하거나 독서를 하거나 하는 행위들도 의미있는 일상행위이지만 이러한 일상이 모두 예술작업이나 작품이 되는 것은 아니다. 즉 일상과 예술은 전에 유례없이 가까워 졌지만 예술과 일상을 분별해 가치판단을 하는 일은 훨씬 더 어려워 졌다. 이른바 혼란은 더 가중된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현대미술이 가지는 특유히 어려움과 이해불가의 속성의 원인은 바로 예술-일상간의 거리가 유래없이 가까워져 마침내 그 간극을 잃어 버렸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결국 예술은 일상과 분리되어 있지 않은, 마치 색이 다른 두 개의 고무찰흙이 다소 엉성하고 기계적으로 한데 뭉쳐 있는 모습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데, 여기서 작가들, 특히 현대미술가들의 작가가 소임은 이 두 개의 색이 다른 찰흙을 어떻게 창의적으로 해결할 것인지에 관한 문제와 비슷하다. 예를 들어 예술인과 복지라는 프레임은 예술인을 수혜자로 또 현실이라는 가해자에 의해 엉망진창이 된 피해자라는 수동적인 입장보다, 좀 더 현실적 여건을 냉청하게 분석해 여기에 임하는, 적극적 의미의 집행자로 설정해야 한다는 것이 작가로서, 내 본인의 생각이다.
즉 현대미술가로서 좋은 작품을 만들고, 좋은 작업을 전개하는 등의, 내 작가로서의 관심과 소명은 결국, 어떻게 잘 놀고, 어떻게 잘 먹을 것인지에 대한 관심과 일맥상통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좋은 현대미술이란 즉, 잘 놀고 잘 먹는 것이다. 잘 놀고 잘 먹으면 그것은 좋은 현대미술이 된다.
물론 잘 놀고 잘 먹는 것을 현대미술화 하는데에는 어려움이 따른다. 하지만 여기에는 아주 위태로운 상태로, 의미의 우주, 예술계 와 이어진 가늘고 좁은 길이 존재한다. 이 길을 따라 위태롭지만 흥미로운 여정을, 당분간 전개해 볼 생각이다. (유병서)



http://mtfestival.org/2015/portfolio/program09/


REF--------------------------------------------------------------




티라바니자





하이레드센터, «수도권청소정리촉진운동(깨끗이!)»

http://chungwoo.egloos.com/m/4001854




일상의집, 일현미술관

인간에게 있어 집은 외부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고 지켜낼 수 있는 공간이자 삶의 안식처로, 집이 거주공간의 개념을 넘어 삶의 일부분으로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인지하고 있는 사실일 것이다. 집의 개념은 사회적 변화와 요구에 따라 그 구성원과 거주 형태가 변화되어갈 뿐 우리는 언제나 "집"에서 따뜻함, 안정감 그리고 꿈을 찾고자 한다. ● 오늘날 우리에게 집이란 어떤 의미일까? 최근 많은 사람들은 거주 장소인 집을 소유하고자 많은 노력과 돈을 투자하며 개인의 상당시간을 이에 소비하고 있다. 이러한 사회 현상에 따라 몇몇은 집의 근본적 의미와 존재가치가 퇴색되어가고 있다며 비판하고 있지만, 이 또한 인간이 꿈꾸는 집의 안정감을 소유하려는 욕망이 다른 방식으로 표출된 사례일 뿐 그들이 "집"에서 얻고자 하는 근본적인 것은 이전과 다름없다. 집의 의미가 부정적으로 변모했다고 단정 짓기보다는 집의 의미가 왜 이렇게 변했는지를 생각해보고, 이러한 현상 또한 집의 또 다른 이면이자 본질임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 일상과 집은 익숙하다는 단어조차 무색할 만큼 우리 주변에 언제나 존재해왔다. 이번 전시에서는 우리에게 자리 잡은 '의식적인 집의 이미지'와 일상생활 속에 마주했던 '무의식 속 집'의 이미지를 살펴보고, 미래에 우리 머릿속에 기억될 지금의 집과 이를 받아들이는 우리의 모습, 그리고 이를 통해 새로운 집의 의미를 유추해보고자 한다. ■ 일현미술관



곽이브_평면상태 연구_'배산임수-곧게'에 우드락_가변설치_2014
나는 사람들이 만든 건축, 환경에 반응하는 사람들, 건축 환경이 대변하는 것에 관심을 갖는다. 주로 내가 경험하고 속한 도시의 공간, 건물이 소재가 된다. 이들은 나를 둘러싼 일상적인-일상적이지 않은, 당연한-당연하지 않은 환경이다. ● 모든 것에는 양면성이 있듯이 빽빽한 건물의 강압적 규칙과 비자연적 물질에 지치곤 하지만, 시멘트벽으로 만들어진 텅 빈 공간에서 더할 나위 없는 고요의 기쁨을 느끼기도 한다. 주거를 위해 '사는 곳'이 경제적 금전 가치로 '사는 것'이 된 현상을 비판하다가, 풍족하게 살아내기 위한 그러한 갈망이 생을 위한 열망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기도 한다. 이렇게 양가성과 모순의 생리를, 그리고 희망에 대한 부지런한 갈망을 건축 환경에서 보게 된다. 이러한 현실의 모습을 형태와 무게 등 촉각 할 수 있는 물리적 요소들과 관련 지어 작업하는데, 여기에서 행해지는 건축적 조형방식은 삶의 방식을 은유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 곽이브



이민경_붉은집_아카이벌 잉크젯 프린트_72×100cm_2012
나의 장소들은 대부분이 비워져 있거나 혹은 불필요한 것들이 자리하지 않은 상태로 보여진다. 영어로 장소 place란 단어는 '장소, 공간'이라는 명사와 '위치하다'라는 동사의 의미 둘 다를 내포하고 있다. 장소라는 단어자체가 이미 움직이며 장소에 위치하기 위한 동작도 포함하는 것은 상황에 의해 장소가 정해지거나, 혹은 그 반대의 상황이 자주 연출되는 이 시대의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의 현실을 아이러니하게 반영하고 있다. 스쳐 지나갔음직한 낯익고도 현실적인 장소들은 작업 과정 가운데 재생되면서 낯설고도 비현실적인 장소로 전이된다. 장소는 그것이 담고 있는 현대인의 모습을 반영하며, 장소와 장소를 옮겨 다니면서 살고 있는 '그'는 이방인(alien, foreigner)이다. ● 공간이 미니어처로 재현되는 과정에서 인식을 거친 공간은 재창조를 통해 좀 더 단순하고 간단해진다. 공간의 소유주가 남긴 구체적인 삶의 흔적은 지워지고 공간이 가진 가장 본연의 단순한 형태, 그러나 구조적으로는 가장 가깝게 재현된다. 공간은 특정한 문화나 정치적인 메시지의 전달 없이 인간 삶을 담는 뼈대로서의 역할만 감당하게 되는 것이다. ■ 이민경

최성임_세계 앞의 집-예술가의 방_나무합판, 각설탕, 핫글루_가변설치_2015
내가 만든 집은 축적된 세월의 의미와 형태의 견고함을 걷어내고 위태로움과 연약함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내부와 외부의 경계에 서 있다. 삶과 죽음, 작품과 태도, 일상이라는 두꺼운 표피와 그 안에 숨은 예술이라는 경계에서 집으로 은유되는 연결고리를 만들고자 했다. 하얀 각설탕은 환희, 욕망, 에너지를 가진 삶의 내재된 덩어리로, 지금은 숨겨져 있지만 나중에 드러나며 또 남겨질 하얀 접착제는 삶의 다층적인 표면으로 비유하였다. 그 두 가지 재료는 삶과 죽음, 사라지는 것과 남아있는 것으로 서로 대비되면서 또 그 의미를 전환시키기도 한다. ● 작품 '집' 시리즈는 각설탕으로 만들어진 조형물이다. 에너지원 물질, 순백색의 달콤한 유혹의 감각적인 느낌, 흩어지고 바스러지기 쉬운 가루를 뭉쳐놓은 각설탕이라는 재료적 특성을 집 이미지와 연결시켰다. 그리고 작은 덩어리를 하나하나 쌓아 올리는 과정 자체에 의미가 있다. 무언가를 기원하며 쌓아 올린 작은 소원 탑 같기도 하다. 한편으로 바스러지기 쉬운 설탕의 느낌으로 인해 금방 사라질 것 같은 느낌이다. 우리의 삶과 같이 쌓으면서 채우지만 결국은 비워지는 것과 닿아 있다. ■ 최성임



 _https://neolook.com/archives/20150728c

Jul 29, 2015

5



1
험하게 헤어졌던 S를 몇년만에 만났다. 그동안 미안했던 마음 그래서 연락 먼저 해보고픈 마음이 있었는데 그러질 못했다. 두 다리 건너서 아주 미미한 소식만 듣곤 했다. 그런데 예상치못하게 밥먹던 식탁에서 만나고 말았다. 나는 우리가 좀더 준비된 상태에서 제대로 만나고 싶었는데, 내 경우 숟가락을 빨다가 재회한 것이다.
어쨌든 S는 눈빛이 그대로였다. 
아 지금 생각하니 그건 참 퍽 고마운 일이다.
많은 친구들이 변하고 있다.


2
몰랐다. Y가 나에게 해주는 말들은 이정도로 누구에게나 들려주는 것들이 아니었다. Y의 가까운 친구 N은 내가 알고 있는 Y의 최근 이야기들을 모르고 있다고 Y가 작게 일러줬다.
Y는 특히 허공을 보며 운전할때, 그렇게 Y하고 나하고 두 목소리들만 공간에 있게 될 때 (뭐 그러지 않아도 Y는 항상 진솔하지만) 마음 끝자락에 모셔뒀던 쓸쓸한 말들을 꺼내는 것 같다:
외롭다
아직도 생각하며 혼자 운다
그 사람과 나를 비교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고 나는 자꾸만 작아진다
"네 맘 너무 알것같아"


3
내가 변하는 걸까
H가 하는 이야기들은 항상 재미있었는데 요즘은 영 듣기가 귀찮다. 의식하지 못한 새에 나는 이미 듣고 있다는 듯한 리액션을 헐렁하게 해보이고 아무것도 듣지 않게 된다. 미안하다.


4
K를 기다리는 듯한 기분을 자꾸 느낀다.
맘같아선 찾아가 만나고 싶다.
사실 만나도 K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아니 할 수 있는 건지 전혀 모른다. 모르겠다. 암만 생각해봐도 아무것도 생각이 안난다. 실은 안하고 싶은 걸지도 모른다.
오히려 가만히 끌어안아보고싶다.


5
아 참 Y가 아까 내가 고심하고 있는 부분에 대해서 그건 너의 성향인거 아니냐고, 그냥 인정하면 되는 부분이지 않느냐, 나는 너가 예리하게 헤쳐나가는 것 같아서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라고 말해줬다. 고마웠다. 힘이 났다.


6
그러고 보니 오늘은 W도 만났다. 군대 다녀와서 처음 본 거니 진짜 오랜만에 본 것이다. 머리를 또 엄청나게 길러서 완전히 올빽머리를 하고 묶고 있었다. 얇은 안경테를 쓰고 구부정하게 삐딱한 남자걸음으로 두툼한 샌들을 바닥에서 떼었다. 든든하게 악수를 했다. 몇시까지 여기 있을거냐고 묻고서 할일을 하러 가버렸다.

7
N이 쓰는 필름 카메라가 항상 궁금했는데 오늘 실물을 보았다. 노출계 부분이 엄청 복잡하게 생겼다. 어쩌다 한컷 찍어주기까지함.
N은 오늘 날 만난다고 고3때 나를 따라 샀었던 keep브랜드 신발을 신고 나왔다고 했다. 레드립이 귀여운 N





Jul 28, 2015

4

고린도전서 1장 [NIV]
20  Where is the wise man? Where is the scholar? Where is the philosopher of this age? Has not God made foolish the wisdom of the world? 

21  For since in the wisdom of God the world through its wisdom did not know him, God was pleased through the foolishness of what was preached to save those who believe. 

22  Jews demand miraculous signs and Greeks look for wisdom, 

23  but we preach Christ crucified: a stumbling block to Jews and foolishness to Gentiles, 

24  but to those whom God has called, both Jews and Greeks, Christ the power of God and the wisdom of God. 



27  But God chose the foolish things of the world to shame the wise; God chose the weak things of the world to shame the strong. 

28  He chose the lowly things of this world and the despised things -- and the things that are not -- to nullify the things that are, 

29  so that no one may boast before him




불안의 꼭지점 위에 서있을 때에
나는 가장 우울한 것들을 생각한다
막연하게 그러나 동시에 내딴엔 현실적으로도
불가능할 것만 같다구 진짜

안될 것 같고 못할 것같은,
이미 늦었고 반쪽만 가능해보이는 데
그치만 정말 바라고 있는 일들에 대하여.
나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다르다
이거는 내가 틀렸다고 한다
하나님은 내가 알고 믿는것보다 대단히 풍성하시다고

하나님 저는 못해요 못하겠으니까
하나님이 알아서 책임져주세요

감사는 커녕 오늘도 문제 붙잡고 우는 소리만 낸다

Jul 27, 2015

3

그래 맞다

요즘의 난 힘내서 애쓰기가 싫어졌다.

내가 여기서 좀만 더 참으면 
상대방에게 ~ 도움될거야
상대방이 편안해질거야

라는 내 판단들이 부담스러워졌다.



내가 할 수 없는 일들을 생각해서라기보다
(그래서 포기 내지는 "안해" 라기보다)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들이 무엇인가
사실 내게 편안한 일들은 무엇인가 싶은거다.

똑같이 두 눈 두 팔 두 다리 한 입을 가졌다.

나도 나의 역사가 있다.


Jul 25, 2015

2

축축한 하루

작업 얘기를 하다가

지속성과 헌신도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다.

-왜 나는 지속성을 갖지 못하는가?
헌신도가 너무 낮은 게 문제이다-

친구와 헤어지기 직전에는 거의 풀 죽은 강아지 같은 기분이 되었다

버스정류장 떨어지는 빗방울들을 보면서 잠깐

기도를 했다

해야했다



사실 고민과 질문안에는 이미 답이 있다

지속성을 가지면 되고 헌신도를 높이면 된다.

예술가로서의 나를 증명하려고 무언가를 한다기보다

제대로 플레이어 좌석에 앉는게 필요하다

놀이 놀이

Jul 24, 2015

1

에어컨 앞에 선풍기 소리를 듣고 있다

피곤해서 눈은 침침해져있다

정리하기로한 자료는 아직도 중복되어 넘치고 스테이트먼트는 들여다보고싶지않아서

그런 내모습에 약간 실망중


배워야했을 그리고 써먹고 있어야 했을 언어를 나이가 들어서도 혼자 깨우치지 못한 것같은 기분 조금

고집 센 할아버지가 되어 너무 후대까지 살아남아 있는 기분도 조금

아니 어쩌면 실은 이제 막 태어나서 발가벗겨진 채로 바닥에 누워있는 건가 좀 오래 누워있는듯한데


그렇지만 이 일을 이 곳을 사랑하고 있다

암만 생각해도 다른 길 별로 생각지도 않는 이윤 여기를 사랑하기 때문인 것 같다

이만큼 막연할수도 명쾌할수도 없다


그렇담 있잖아

내 작은 옹알이 이 어물거리는 발화  몹쓸 소리말이야

누군가들에게는 귀기울이게되는 무언가가 될 수 있을까?

잠깐 서서 들어봐야겠다 하는 선택을 하게끔 만드는 뭔가가 될 수 있을까?

그게 뭔진 다 모르겠었는데 그래도 오래토록 마음에 남는 뭔가가 될 수 있을까?

말로 뭐라 해야할진 모르겠는데 먼저 꿍 가닿는 그런

어차피 모든 것 디테일하게 전달하고픈 욕심도 없고 그럴 수도 없다고 생각한다

코어만 틀리지 않는다면 그정도로만이라도 보여줄 수 있다면

생각이 참으로 한결같다.


작은 호흡을 여러번 무리없이 쉬고 싶은데

나는 자꾸만 숨을 굶긴다 굶기게 된다 숨쉬기를 어떻게 배운것일까 누구한테 왜


그러고보니

이제는 옛날이라고 말하는 얼마전까지만해도

내 글쓰기에는 온통 너라고 부르는 대상이 존재했었으나

이제는 그렇지 않다는 걸 새삼 느낀다

두 발을 한줄로 모아서 앞으로 걷는 걸음만큼이나 생소하면서도

떼는 것 붙이는 것 모두 내 발이라는 거 아니까 그건 여전하니까

이렇게도 걸을 줄 아는 사람이었구나 나는 하며

뭐 그렇게 살고 있다


그리고 얼마 뒤 나는 아주 멋진 사람에게서 모양이 없는 고백을 받았다

집 동네를 오가는 광역버스를 탈때마다 진심이 짓는다 라는 그럴싸한 카피라이트를 보곤 하는데

눈물을 흘린다



집전화기가 아주 얇은 바람에 흔들려서 그 접촉단자가 떼었다 붙었다 한다

그에 따라 삐룩 삐룩 소리를 내고

옆에 잠든 오빠의 콧숨 소리가 함께 들린다

늙은 개가 잠꼬대 속에 꾸룩 꾸룩 낑낑댄다


내일은 머리를 바짝 질끈 높이 묶고 서울로 나갈 것이다.

Jul 23, 2015

2013년 1월 캄보디아에 다녀와서 썼던 짧은 글.


Love Cambodia! _채아람

우선 이 캄보디아 단기선교의 모든 것을 주관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수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벽화봉사에 초점을 맞추어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사실 저는 중고등부가 단기선교를 떠난다는 이야기를 들은지 한참 되었을 때에도 그래 너희는 가는구나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작년 선교한국대회를 다녀와 선교에 대한 마음이 막연하게나마 커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저는 중고등부 교사도 아니었고 딱히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곧 장로님을 통해 벽화봉사 총괄자로서 이 일에 함께 하자라는 제안을 받게 되었고 그에 순종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아무것도 준비된 것이 없었습니다. 아버지 허락, 재정, 벽화팀 리더로서의 경험, 현지 정보, 벽화 봉사 참여인원, 할당시간 등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 출국 전날까지 제대로 알거나 확정된 것이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매주 토요일 아이들과 기도회를 가지면서도 내가 정말 갈 수 있기는 한 것인가 의문이 들었고, 특히 마지막 한 주 동안은 ‘하나님 일인데 이런 식으로 대충 준비해서야 되겠느냐’는 생각에서 불거진 막중한 책임감과 걱정으로 며칠 밤 뜬 눈으로 지새우기도 했습니다.

 떠나기 전에 벽화 도안을 완성해놓아야 했지만 마지막 주까지도 아무것도 그릴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극심한 스트레스 속에서 포기하다시피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았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깨달음을 주셨습니다. ‘아람아, 선교를 떠나는 건 너지만 선교를 하는 것은 나란다. 이것은 나의 일들이야. 내가 다 알고 있어. 내가 다 할 거란다!’
 하나님께 회개하고 위로와 지혜를 구하자 비로소 도안을 그릴 수 있었습니다. 복음을 내용으로 하는 도안이 완성되자,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임을 강하게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수없이 조정되던 계획 끝에 결국 함께 떠난 선교팀 중에 벽화팀으로 할당된 인원은 저와 선교사 집사님 둘 뿐이었습니다. 사역을 하는 3일 동안 전원교회 선교팀과 완전히 분리되어 다른 지역에서 숙소까지 옮겨 현지 사람들과 종일 작업을 하게 되었기에 여러 불안과 떨림을 느끼기도 했지만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믿음 하나로 나아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놀랍게도 하나님은 이미 모든 것을 준비해두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약함을 하나님의 전능하심으로 채우시는 것을 크고 작은 순간 속에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팀에서 소외된 느낌을 받으며, 이렇게 된 거 노동자처럼 열심히 일이나 하고 와야겠다 생각하고 있던 저를 현지 사역자, 주민들은 한 명의 예술가로 너무나 귀하게 여겨주셨습니다. 그곳에는 기존에 미술 분야에서 일하셨던 단기선교사분도 계셔서 큰 힘이 되어주셨습니다. 재료비 역시 예산의 절반도 안되는 가격 내에서 해결할 수 있었고, 제 생각과 다른 상황들이 많이 있긴 했지만 시행착오 없이 일을 순탄히 진행시킬 수 있었습니다. 대낮에 햇빛을 피해야만 하는 시간적 제약이 있어 제 때 완성할 수 있을까 싶었지만 정확히 필요한 때에 구름이 드리워지는 등 신기한 자연현상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벽화 작업의 영향력은 제 생각보다 어마어마했습니다. 그저 시골동네에 그려진 벽화로 그칠 줄 알았던 이 그림으로 인하여 사역에 다소 지쳐계셨던 선교사님들은 감격하며 새 힘을 얻으셨고, 동네 현지인들에게는 이 일에 자연스럽고 기쁘게 참여함으로써 교회에 대한 막연한 거부감을 허물고 복음에 대해 쉽게 접할 수 있는 계기가 제공되었습니다. 벽화 작업을 보던 현지 교회 사람들 사이에는 우리도 함께 교회를 단장시키자는 분위기가 조성되어 온통 칠이 벗겨져있던 모든 내벽들을 새로 칠하고 경사로를 만드는 등의 왕성한 활동이 일어났습니다. 사역 마지막 날에는 함께 일해주신 단기선교사 언니가 이 그림에 참여하면서 경험한 하나님과의 긴밀한 교제를 편지에 담아 건네주기도 하였습니다.

 저는 이번 캄보디아 단기선교가 온전히 하나님 자신의 뜻을 위하여 지으신 아름다운 계획이었지만 동시에 저를 위한 매우 특별한 계획이었음을 분명하게 느끼고, 그렇게 믿습니다.

 제 꿈은 세계에서 활동하는 전문예술인인 동시에 선교사적 마인드를 가지고 이러한 활동에도 열심인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꿈인지 확신하기 힘든 부분들이 있었고, 실제적인 전공공부와 하나님 사이에 벌어진 간격을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서도 고민하고 있었죠. 그런 저를 하나님은 강권하여 이번 선교에 참여하게 하셨고, 선교기간동안 팀에서 떨어져서 소수로 활동하게 하게 하심으로 더욱 현지에 밀착된 다양한 체험을 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제가 저의 어떠함을 주장하고자 하는 마음, 제 삶을 직접 경영하고 싶어하는 욕심들을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착하고 선한 마음을 가질 때에, 제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이 주신 재능이 얼마나 귀하고 아름답게 쓰일 수 있는가 보여주셨습니다. 그렇게, 제가 꾸는 꿈에 대해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것을 실제적으로 응답해 주셨다고 믿습니다.

 준비 기간 동안, 선교 기간 동안, 그리고 다녀온 이후에도 하나님은 당신의 완전하심을 경험케 하시고 계속해서 꿈을 주십니다. 제 평생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하신 것, 청년의 때에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을 꿈꾸게 하시는 것, 실생활에서 정말로 당신의 능력을 보이시는 것-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제가 자랑할 것은 오직 복음밖에 없음을 알게 하신 주님!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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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와 선교사. 그 교집합의 정체성으로 살겠다는 마음이 변하지 않았다는 것과
두 개*의 다른 영역을 이렇게도 저렇게도 경험하며 2015년까지 살아오고 있다는 것

계절옷 호주머니에서 구겨진 천원을 발견하는 것 마냥
잊혀진 기억을 들췄을때 깨닫게 되는 감사가 있다.

곧 떠나는 태국에서는 어떤 것을 경험하게 될까.
두려움은 어떻게 감격으로 채워지게 될까. 준비할게 너무 많아서 벅차다는 생각도 들지만
사실 너무 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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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분법적인 사고를 견제하면서도 결국 '두 개'라고 이야기하게 되는 것은 그만큼 너무 다른,
그만큼 서로가 양립하기 힘든 태도를 요구하는 게 현재 사정인것같다.

Jul 22, 2015

7월 밤

강정석

















의미 없는 일, 정말 아무 쓸모 없는 일
처연함 비슷한 것과 웃겨서 웃는 웃음 사이에서
딱히 뭐라고 하기 애매한 감정들이
행위로서 선언 되었다가 그냥 그렇게 나타났다가..무너졌다가 한다.
보는데 어딘가 아프기도 하고
여전히 거창한 생각들을 두르고 살았구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Jul 20, 2015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Peace I leave with you;
my peace I give you.
I do not give to you as the world gives.
do not let your heart be troubled
and do not be afraid.

요한복음 John 14:27

Jul 3, 2015



They said to you,
"In the last times, there will be scoffers who will follow their own ungodly desires."
These are the people who divide you, who follow mere natural instincts and do not have the Spirit.
But you, dear friends, by building yourselves up in the most holy faith and praying in the Holy Spirit, keep yourselves in God's love as you wait for the mercy of our Lord Jesus Christ to bring you to eternal life.
Be merciful to those who doubt;

save others by snatching them from fire;

to others show mercy, mixed with fear
- hating even the clothing stained by corrupted flesh.

Jude 1: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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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라인을 휘감은 무지개색 영상과 이미지들을 보면서
어쩐지 슬픔 비슷한 걸 느끼다 몇자 적는다.

요며칠 사이 수많은 페이스북 친구들이 무지개색으로 얼굴을 물들였다.
그 중엔 이성연애자들도 있고 동성연애자들도 있으며 
위 두가지 분류에 들지 않는 여러 성향의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모두 나와 소중한 시간을 보냈던 귀한 친구들이다.

동성애에 대하여 아무런 의견이 없는 것은 무지 혹은 비난을 피한 도망 중에 하나같다.
예전부터 누군가 나에게 이런거 어떻게 생각해?라고 물을때마다 떠올리는 생각은 늘 이런거였다.
요컨대 '하나님께서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 하셨어.'

성경이 동성애를 죄라고 말하고 있는 이상 현실에서 벌어지는 동성애 자체를 내가 옹호해줄 마음은 없다.
성경에서 가장 처음 한 남자와 한 여자 사이의 관계(더 나아가 결혼이라는 것까지)를 성사시킨 분이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서로 지극히, 정말 지극히 다른 존재들로 한 몸을 이루게 하길 기뻐하신 데에는 
우리가 쉽게 간과하는 이유와 질서들이 분명히 있다.


문제는 어쨌든 그것으로 현실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인 것인데.
비난과 냉대, 혐오하는 시선이 아닌
그 사람들을 / 편견 없이 / 진심으로 끌어안아주는 게 그리스도인의 할 일이라 생각한다.
얼싸안고 그냥 같이 울어주어야한다.

예수를 정말 믿고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꼭 동성애가 아니더라도

나 또한 얼마나 극한 죄인인지

'죄로 인해 고통받는 것'이

 얼마나 아프고

더럽게 힘든것인지를

더 잘 아는 사람들일테니까.


동성애를 인권의 문제로서 받아들이고 
그것이 사회 안에서 비난없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하는 데에 일조할 마음은 없는데
 사람들을 '끌어안겠다'라고 이야기하는 게 어쩌면 모순과 위선처럼 들릴 수 있을 것이다. 
삶으로 고통받는 이들에게는 정말 미안한 얘기다.

죄인들의 친구였지만 거룩하신 하나님을 따라 또한 거룩하게 살았던 예수의 삶을 생각해 볼때
하나님을 맘과 뜻과 목숨을 다해 사랑하라는 것,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 이 두가지는
분명히 양립가능한 것이고 삶의 다양한 층위 안에서 실천될 수 있다.

누군가의 언급을 통해 예수님이 이 때에 이 땅에 계셨다면 
퀴어 페스티벌에서 함께 사람들과 춤을 추며 시간을 보내셨을까를 생각해봤다.
하지만 아무래도 아닌것같다. 결코 아니다.
예수님은 즐거움이 떠나고 깊은 그림자가 드리워진 마음들과 함께 하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