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p 28, 2014

가끔 욕심많은 내가 무섭다

아직까지 한국의 좋은 학교들을 나왔다고해서 이 짧은 이력으로 나 자신을 엄청난 사람인양 착각할까봐,
더 공부하고자하는 의지가 내 눈을 자꾸만 높은 곳으로만 관심갖게 할까봐
그 시야 바깥의 사람들을, 바로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까지조차도 그런 눈으로 재려 들까봐
낮은 곳 작은 일에서 마음이 점점 멀어질까봐



내 힘으로 억지스레 미래에 대한 조각들을 맞붙이고 또 떼어내는 중일까봐
아직일지도,
어쩌면 훨씬 큰 계획일지도 모르는데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너무 작은 단위로까지 알려고 할까봐, 그래야만 내가 만족할까봐
그냥 그 사람에겐 자연스러운 것인데
그 자연스러운 것들을 잘게 잘게 분쇄하고 왜 이것은 이렇고 저것은 저런것인가 따져 묻느라 쓸모없는 의문을 연출해낼 필요는 없는데






선한 일에 대한 욕심은 어느 순간 순전한 내 욕심으로 발각당하고, 그 때의 초라함은 감출 수 없다.

Sep 27, 2014

단순하게 가자

가족들 한명한명에게
너에게
친구들에게
동기들에게
아이들에게
선생님들께
이 세상의 낯선 사람들에게
그러니까 다시, 내 앞에 선 상대방에게

무엇을 주면 좋을지
무엇을 줄 수 있겠는지 만을
자꾸만 생각하고 실천해보자는 것이다.

Sep 14, 2014

글쓰기는 그리기 만들기와 함께할때 훨씬 더 재미있다.

어느날 한가지 선명한 깨달음이 들었다.
개인을 어느 영역에 위치시키느냐가 그사람의 역량을 발휘시키는 정도를 결정할 수 있겠다.

추후에 자세하게 쓰겠지만, 며칠 전에 친구와 전시를 하나 열었고 한두시간 동안 오프닝으로 찾아오는 관람객들을 즉석에서 드로잉하하여 벽에 거는 퍼포먼스를 했다. 그러다 절대 친하지도 그러나 학연때문에 아주모르는 사람이라고도 할수없는 Y오빠가 왔더랬다. Y는 고등학교 대학교를 같이 나오게된 선배인데, 예전부터 머리를 박박밀고 교복대신 힙합스타일의 패션을 구사하며 보드를 탔다. 최근의 근황을 가볍게 물으니 이번에 복학이전에 마음맞는 친구들과 대형쇼핑몰을 비꼬는 이미지로 아이템을 만들며 사업을 시작했다고 했다.
"미술을 그만두어야겠다고 생각했어."
아마도 교수님들과의 만남 속에서 이렇게 저렇게 부정당하는 경험들을 많이했었나보다 생각했다. Y는 그런데 지금은 비로소 자기가 하는 일들을 인정해주고 좋아해주는 사람들 사이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은 듯한 느낌이라고 말했다.

학교에서 5년째 생활해오는 동안 나는 내가 정말로 하고 싶은 일들을 충분히 이해받고 있다고 느껴본 적이 그리 많지 않았던 것 같다.무언가 쉬지않고 많이 해오기는 했지만 2학년때 별 흥미없이 신청했었던 유리캐스팅 수업때 만난 강사 선생님과의 대화를 빼면 늘 남의 등을 긁거나 허공에 떠있는 보이지않는 무언가를 어렴풋이 따라해보는 느낌을 지우기가 힘들었달까.

얼마 전 방을 정리하면서 책장에 쌓인 책들을 다시 바로 세우고 버릴 것들을 분류해내는 동안, 내 책꽂이에 꽂힌 책들의 절반 이상이 기독교 신앙 서적이며 그 외에는 약간의 미술서적과 사회적 이슈들에 대한 것이었다. 함께 발견되는 크고작은 여러권의 노트들또한 그날 들은 말씀과 그 말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혹은 그와 관련되어 상상한 작업이 될만한 꼭지들이나 이미지따위들의 메모로 가득채워져있었다.

길지않은 인생동안 내가 확신하는 것 몇개가 있다면 그중 첫번째는 단연 예수에 대한 것이다. 그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내 인생은 조각되어왔으며 껑충뛰어 이야기하자면 그로 인해 내 삶의 전 영역들이 원동력을 가지고 숨을 쉰다는 것에 이의가 없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허락한 원래의 삶과 그 안의 질서들, 그 안에 녹아내리는 하나님의 성품들을 나는 즐거워한다. 또한 예수만이 답이라는 것을 외치며 이 세상을 섬겨야겠단 생각에 강력한 동기부여를 받고 있다.

헌데 여태까지의 학교생활을 돌아보면, 나는 그러한 목적과 대의로부터 멀어져 꽤 많은 시간을 '수고' 대신 '고생'을 해온 듯하다. 나는 이러한 나의 성향들을 숨기는 방향으로 작업을 해야한다고 생각했다. 미술 씬에 존재하기 위해서는 철저히 '종교'적인 색채를 숨겨야 하며 나의 신앙을 드러내는 작업을 하는 순간 동기들, 교수들, 그외의 많은 아트피플들의 논쟁의 장으로부터 밀려나게 된다고 믿었다. 거기엔 두가지 마음이 있었던 것같다. 하나는 실제로 정말 그렇기 때문에 성경적인 이야기를 하는데에 전략상 숨김의 방식을 채택하는게 더 지혜롭다고 여기는 것이고, 하나는 많은 사람 앞에서 작업이라는, 꽤나 철저히 기호화된 방식으로조차 예수를 증거하는 일에서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이다. 그 두가지 마음을 오가면서 작업을 해왔고, 한참은 방법과 물질을 다루는 데에, 또 한참은 저런 주제들을 피해가는 데에, 한참은 또 그냥 협업의 재미를 느끼는데에- 이리저리 시간을 써왔다.

 도망칠 땅덩이가 좁아들만큼 좁아지자 4학년 1학기에는 이 주제와 관련된 작은 시도를 펼쳤는데, 여전히 예수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서 성경적인, 인류에대한 이야기를 펼치자니 모든게 무척 어렵고 어색하게 느껴졌다. 더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기 위한 배려와 우습게 여겨질까봐 싶은 두려움은 구분되었어야 했다. 좀더 냉철하게 말하자면 당시에 세상의 흐름, 그 분위기, 그 양식들을 쫓아 모방의 방식으로 작업을 설명하고 구현했다는 것인데, 내 수준에서 이것은 당연 문제가 많은 방식이 될 수 밖에 없다. 더욱이, 당시의 내 심리적 상태와 신앙적 상태도 문제가 참 많았다.

그러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대체 나는 왜 그네들의 양식을 쫓아가야만 하는가? 왜 자꾸 어디서 본듯한-그럴싸한 비주얼 혹은 흐름을 보여주려고 하는 것인지?
왜 그들의 방식대로 따라하려고 이다지도 애쓰고 있는가?
왜 진짜 해야할 말은 숨기고 눈치만 벌벌벌 보고 있는거지?
남의 옷을 입고서 어색한 핏에 실망하는 기분에 언제까지 젖어있을 생각인가?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재능들을 이렇게 불행함을 느끼는 데에만 사용할 것인가?

하나님께서 예수를 통해 매일 수많은 문제와 고립 속에 살아가는 인류에게 펼쳐보인 좋은 소식(The Gospel)은 내가 알고 경험하는 바 그 자체로 완전하다! 그것은 실재하고, 지금도 움직이는 이야기이며, 외쳐지고 이야기되기에 마땅하다. 그것은 다른 것과 합쳐질 필요가 없고, 그것은 다른 것에 희석되거나 개조될 이유가 없다. 그것은 다른 것을 모방해서 포장될 필요가 없다.
복음이 내 삶으로 증거되길 바란다.
삶에는 다양한 층위가 있고
동시에 내 삶에는 나의 작업이 포함되는데,
나의 작업들이 이 좋은 소식이 회자되고 이야기되는 좋은 시스템으로서 작동하게 하고 싶다. 이것을 보고 접하고 경험하고 찾아온 사람은, 복음을 안들을 수 없는 그런 장으로 조성하고 싶은게 내 궁극적인 욕구이다.
보다 적극적으로 사람들에게 예수를 알리고 싶다. 그의 성품을 얘기해 주고 싶다. 그가 당신들을 얼마나, 대체 얼마나 사랑하는지에 대해 말하고 싶다.
지하철이나 명동 길거리에서 극단적인 기독교인들(물론 게중에는 기독교가 아닌 이단도 넘쳐난다)의 입에서 나오는 복음처럼 그 중심된 이야기를 들어보기도 전에 질령나게끔 하는 폭력적인 형식이 아니라
더 친절하고 더 섬세하고 더 감각적인 방식으로
이 눈에 보이는 세상이 다가 아님을, 대단히 커다랗고 감동적인 무언가가 너머에 있음을 이야기해주고 싶다.

작업안으로 어떤 요소, 어떤 내러티브가 들어왔을 때 이것을 어떻게 다룰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당연히 치밀하게 해야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지금 나 자신으로부터 지적하고 싶은것은,
왜 내가 그 수많은 시간동안 묵상했고 즐겼고 감사했고 기뻐했고 고민했고 아파했고 알았고 닮고싶었고 가꾸고싶었고 말했던 많은 것들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지 않는지, 그러기로 선택하는지, 그렇게 포기하는지, 그래서 학교 내에서도 아무것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바보처럼 보이게끔 하는지이다.
 이 사회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이 통증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이 있다.

내가 생각하는 내가 할 수 있는 도움은 두가지인데, 하나는 다양한 봉사를 통해 직접적인 섬김을 제공하는 것이고 하나는 작업으로서 예수를 이야기하는 장을 만드는 것이 아닐까 한다. 물론 사람들은 이런것을 원하지 않거나 악의적으로 이용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원래 선이라는 것은, 은혜라는 것은, 늘 그런 위험을 수반한다는 것을 예수가 먼저 보여주셨다.

그래서 나는 지금부터 나의 삶을 좀더 단순하게 이끌어나가고 싶다고 기도하려 한다.
나를 좀더 적합한 영역으로 위치시키고, 더 많은 사람들을 돕고 싶다. 핑계와 사족을 그만달고 싶다.
내가 가진 창의성을 주신 분을 믿기에 이 능력을 더욱 넓고 크게 펼쳐 쓰고 싶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고 있기에 즐겁다. 환영받지 못하는 삶, 인정받지 못하는 삶, 바보같은 삶, 이용당하는 삶, 미움받는 삶, 외면당하는 삶, 높은 곳에 이르지못하는 삶에 도전하려고 한다.

차라리 아주 속시원하다.





만들어진 환경에 관심이 있다.

풀어서 말해보자면, 원래 그 목적 그대로 사용되는 인위적인 도구나 그래서 만들어진 환경에 대한 얘기가 아니라
원래 이 모습대로 나타내려고 의도를 가졌던것은 아니었는데, '되는대로' 주변의 대체물로 특정 요구를 충족시키다보니 만들어지는 풍경에 관심이 있다는 얘기다. 거기에는 인간이 자신의 필요를 얼마나 창의적으로 채워나가는지에 대한 다채로운 흔적들이 있다. 거창하게 문화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인간의 모든 활동들 중 가장 밑단에 있을 가장 기초적인 움직임일지도 모르겠다.
흥미로운것은 현대미술을 구성하는 많은 작품들의 비주얼('아주아주 의도된' 형태적/기능적인 어긋남의 측면을 얘기중이다)이 이런것들과 유사할때가 있다는 것이다.

Sep 8, 2014

















































why not the wide trousers?








Paris Fashion Week September 2011



street style seconds fashion style and go2

BEST!


wide-leg-trousers-streetstyle
내가 청소년이었던 1960년대는 활자를 조합해 신문을 찍어내는 '활판 인쇄'시대였다. 당시 인쇄소에는 도장처럼 새겨진 납 글자들이 가득했다. 세상의 모든 글자를 납 글자로 여러 벌 만들어 분류해 놓고, 기자가 써낸 원고를 보면서 전문가가 핀셋 같은 걸로 한 글자씩 찾아내 조합해서 찍어내는 방식이었다. 한글도 그 종류가 많지만, 한자까지 사용하던 시절이니 정말 원시적이었고 시간도 오래 걸렸다. 그래서 어느 신문에서는 '대통령大統領'을 '견통령犬統領'으로 잘못 조판해 정간을 당한 적도 있었다.

from 추억의 기독교문화 칼럼, <Disciple> JAN 2014, 이의용 소장 교회문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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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바울은 신앙인들에게 '우리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릴 것'을 강력하게 권면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영적 예배'이기 때문이다(롬 12:1). 사도 바울의 이런 권면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깨닫게 해 준다.
 첫째, 하나님은 죽은 제사가 아닌 '산제사'를 받기를 기뻐하신다는 사실이다. 둘째, '산제사'란 곧 몸으로 드려지는 것, 즉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앞세우고 실현해 나가는 우리의 삶을 뜻한다는 것이다. 셋째,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산 제사, 몸으로 드려지는 제사는 나만의 몸이 아닌 '우리의 몸'으로 함께 드려지는 삶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21세기에 우리가 드릴 '영적 예배'는 어떤 삶을 의미하는가? 우리가 이런 질문에 적절한 답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지금이 어떤 시대인지를 정확히 알아야 하며, 이 시대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산제사'가 어떤 삶인지를 분명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몸으로 예배함'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구체적 실천을 뜻한다. 우리가 본받지 말아야 할 이 시대의 풍조는 자기 자신만을 사랑함으로써 자신의 유익만을 앞세우며, 자기 과시와 이기적인 욕망을 충족을 위한 소비문화 속에 매몰된 삶이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이 위기의 시대를 극복해야 한다.
 성경은 비록 우리가 일해서 얻은 결과물이라도, 그것을 소비할 권리가 우리에게만 있지 않음을 증거한다. 생산을 가능케 한 자원과 재능은 원칙적으로 하나님께서 제공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청지기로 부름 받은 사람들은 자신의 청지기직에 대해 먼저 하나님께 결산해야 할 의무가 있음을 잊지 말자. 달란트 비유(눅19:11~27)가 증명하듯이, 모든 청지기는 자신이 일한 과정과 결과에 대해 평가받게 될 것이다. 청지기직을 충실히 수행한 자들에게는 더욱 큰 책임과 축복을 주님께서 부여하신다.
 종교개혁자 캘빈은 '선한 청지기는 오로지 '사랑의 법칙'에 의해 평가된다"고 주장했다. '사랑의 법칙'에 따르면 많은 생산 결과물을 맡은 청지기들, 즉 '가진 사람들'은 모든 하나님의 식구들의 생존과 존엄성을 보장하기 위해 '가지지 못한 사람들'을 도울 책임과 의무를 가진다는 것이다.
 또한 성경은 많은 성과물을 가진 사람들이 적게 갖고 있는 사람들을 부양해야 할 의무가 있음을 증거로 제시하고 있다 (레25장, 신24:14~15, 마25:31~46, 눅16:19~31, 19:8, 딤전6:17~18, 요일3:17~18).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안에 네 현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신15:11)
 가난한 자들로 상징되는 '경쟁력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을 위한 배려를 게을리하는 것은 궁극적인 소유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부정하는 행위임을 성경은 경고한다. 성경은 하나님과 이웃보다 물질을 중요시한다는 의미에서 물질주의를 우상숭배로 경계하고 있다(겔18:1~5, 눅6:24~25, 12:34, 16:13, 18:24~25, 딤전6:10).
 이렇듯 예수님은 우리에게 재물의 소유가 가지는 영적 위험을 깨우쳐 주시며, 가난한 자와의 풍성한 나눔을 일꺠워 주신다. 성경의 초대 교회와 캘빈의 제네바 교회, 한국의 초대 교회는 공동체적 삶의 강화를 통해 이런 성경의 경제 사상을 실제의 삶 속에서 실천하고자 모진 노력을 다했던 교회들이었다.
 자신이 처한 상황 안에서 최선을 다해 신앙을 생활화하려 노력했던 이런 신앙선배들의 분투는 빈부격차의 심화가 중요한 사회문제로 대두하고 있는 요즘, 한국 교회와 신앙인들에게 '작은 자와 함께하는 삶'의 실천을 강력히 도전한다.


From magazine<Disciple> January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