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g 4, 2016

예술가가 살기 어렵다고 하니 예술가와 대중을 잇겠다며 관 주도로 이러저러한 미술 장터가 열리고 있다. 벼룩시장 혹은 야시장 혹은 풍물시장의 이름으로 열리는 관 주도의 장터가 전국적으로 수백개에 이른다고 하고, 인디 밴드의 공연이나 퓨전 국악이나 라이브 페인팅, 모래 드로잉 같은 것이 추임새로 끼워져서 줄 맞춰 세워진 몽고텐트 사이의 무대에서 진행되는 형식과 별 다를 것 없는 미술 시장이다. 나는 예술을 그냥 감상만 하며 살지 않는 입장이라서 이런 행사에 대한 일반 대중의 호응이 어떤 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런 것을 통해 텐트 업자들부터 쭈욱 문화진흥기금 류의 세금을 번다는 것은 알고 있고, 나도 종종 심사 같은 것을 하면서 몇십만원 벌어서 내 봉급과 어울리지 않는 저녁 식사도 종종 하고 그런다. 돈을 얼마 썼더니 얼마가 팔렸고 몇 명이 모였다는 내용이 정산이라는 이름으로 위에 보고될테고, 좀 더 매출을 늘리라는 식의 모니터링이 또한 세금을 쪼개서 평가 업체에게 용역으로 주어진다. 일반 대중들의 반응은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전에 대중음악의 다양성 확보 같은 슬로건을 놓고 음악평론가, 클럽 주인, 인디 음악 레이블 사장 등등이 모여 토론회 하는 것을 구경한 적이 있다. 거기 참석한 사람 중 한 명은 마치 나라를 구하는 독립투사의 흉내를 내기라도 하는 듯 비장한 목소리로 아이돌 음악의 폐해로부터 우리의 문화를 지키자고 말했었다. (다이빙벨의 이상호 기자가 연상되는 사람이다.) 여튼 토론의 방향은 플랫폼을 만들자는 것으로 좁혀졌다. 좋은 밴드들이 음악을 만들고 있으니 그것을 지원하기 위한 플랫폼을 정부의 돈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내용. 얼마 전 창동에 컨테이너를 쌓아 만든 음악 관련 공간을 디렉팅하는 이동연 교수가 그 토론회에 있었다.
아무튼 뭔가 무용한 것, 실질적인 쓸모가 없는 것을 만들어 내는 소위 예술가에 대해 지원하려면, 실천의 단계에 다다른 자에게 실천할 수 있게끔 돈을 지원해주면 된다. 실천하게끔 해주면 유통은 알아서 된다. 작년의 굿즈 같은 게 굉장히 특이한 성공을 거둔 경우고 많은 공무원들이 그걸 주목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그 성공이 작가들에게 간절했던 유통의 플랫폼을 만들게끔 지원해 준 결과 (다소 시혜의 성격이 강한) 라고 믿는 것 같다. 하지만 그렇지가 않다. 그 성공은 신생 공간으로 자생하던 기획자들이 직접 작가를 선정하고 전체적인 아트페어의 동선을 세심하게 기획하면서 얻어진 결과, 즉 유통의 플랫폼이라기 보다는 창작 자체를 지원하며 얻은 결과다. 수많은 공모 요강에 써 있는 허울좋은 목적처럼 작가라면 누구나 전부 (평등하게) 참여할 수 있었기 때문에 얻은 결과가 아니며, 또한 (평소에는 전시를 보지도 않는 것으로 보이는) 일반 관객의 눈높이에 (그리고 지갑 사정에) 맞춰서 거둔 성공이 아니다.
물론, 예산을 실제로 집행하고 정책을 통해 큰 얼개를 그릴때 나라의 전반적인 문화의 방향을 고민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그러나 일선에서 만나는 실무자들이 스스로를 소비자 입장에 놓고 예술가나 기획자가 제안하는 예술이나 문화가 가야할 길을 방해하는 경우는 이제 너무 허다해서 얘기 조차 안되는 게 현실이다. 대중에게 예술이 너무 어렵다거나, 가격이 너무 비싸다거나 하는 다소 나이브한 (그래서 네이버 덧글에서 캬~ 사이다~ 라고 할 만한) 문제를 제기하면서 단순히 어떤 상징 자본의 문제로 치환하지만, 사실 그것은 보통 유령같은 대중에게 제 깜냥을 덧씌운 기준을 적용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몇백억을 출자해서 한국의 루이비통을 만들겠다는 정부가 할 말은 아닌 것이다.
작가를 지원하는 일은 작가를 지원하는 일이다. 작가에게 대중이 좋아하는 것을 해달라고 용역을 주는 일이 아니다. 다시 말해 세금 중에서 문화 부흥을 위해 책정된 금액은 대중이라는 소비자의 입맛에 맞춰서 실적을 올리는데 사용하라는 것이 아니어야 한다. 실적을 올리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별 탈없이 승진해서 연금을 받고자 하는 문화 관련 공무원에게 항상 개선을 요구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Aug 3, 2016

좋은 학벌이 아닌 지혜가 있는 사람이고 싶다. 좋은 작업work보다는 좋은 일deeds을 하고 싶다. 얼굴 모르는 여러 사람보다는 내 주변에 보이는 몇몇에게 기억되는 하루를 만들어주고싶다. 대중보다는 우리 아빠 엄마가 더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