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v 21, 2014

사육 포기 동물들 리서치.


하필이면 홍보물 제작 아르바이트를 받는다는게, 유기 동물들에 대한 시민토론회에 관한 거였다. 그냥 처음엔 동물농장에서 예전에 숱하게 보았던 이미지들을 떠올리면서 아 뭐 그런거거니 하다가 구글링을 좀했는데, 봤던 이미지들에서 아직도 허우적거리고있다. 아아아아




작가가 누군지 잘 모르겠지만 대충 안락사 당하기 직전의 개들을 찍는다는 컨셉이었던것같다. 과연 저 눈물이 진짜인가 싶지만 연출에 대한 진위여부를 가리기 이전에 무엇이 이 개를 저토록 구슬프게 만들었는가 생각케한다.

저 개는 이제 어디에도 없겠지.






인간에게는 매일 여러가지 선택지들이 주어지지만
애완동물, 특히 개들에게는 자신의 의지와는 별 상관없이 임의로 만나게 된 주인이 이들의 유일한 선택지이다. 아니 선택이라는 단어도 어울리지 않지.
그런데도 매일 그를 반기고 따르는 것이다. 아주 평생을.

그날 밖에서 뭘 실패했건 뭘 못했건 누가 우릴 어떻게 판단했든
집에 오면 아무 상관없이 나를 향해 꼬리를 흔드는 개가 있다.




 어쩌면 개들에겐 자기를 꼭 안아주는 사람의 어깨하나면 평생이 충분한데-

그 충성심 그 헌신 그 무조건적 애정은 주인에 의하여 무시당하거나 짓밟히거나
아주 버려지는 것으로 연결되는 것이, 그래서 하루아침에 모든 안정감에서 벗어나서 어떻게 무엇을 어찌 해야할지 모르는 황망한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것이 수많은 개들의 현실이란다.그런 개들이 너무너무 많아서 (이 문제를 '후처리'하는 데에 대한 성격이 강한 것 같다..) 방안을 모색해야한단다.
개새끼 개새끼 하는데 과연 누가 '개새끼'인가.

예쁨과 귀여움이 다 사라지고,
아프고 비용을 발생시키고 귀찮다 여겨지고 못생겨지고 말도 안듣는다고 해서
과연 이렇게 버릴 수가 있는건가. 어제까지 집안에서 하하호호 하던 가족을? 이렇게?

아아아아 진짜 못됐어... 진짜 못됐다. 애정을 돌려주지 않는 모종의 배신에 대한거라면 내할일 하느라고 방안에 못들어오게 끙끙 앓게 하는 나부터도 사실 진짜 못됐다. 하지만 저렇게 정말 밖으로 내버리는 사람들의 생각은 절대 상상이 안되고 이해가 안간다. 끝내 설득당하지 않을 것이다.




안락사 시키는 의사선생님들도 너무너무 힘들고




저 기다리는 얼굴이 너무 미안해서 보기가 힘들 지경이다.



개들이 인간에게 주는 사랑의 온도를 생각한다면
이런식으로 그들이 눕는 바닥은 너무. 
차다.







http://slowalk.tistory.com/1934





http://bfbridge.tistory.com/46



10cm - 짝사랑, 스토커





그대의 표정이 너무 차가와서
나의 말은 닿기도 전에 얼어붙네


그대의 말투가 너무 건조해서
나의 맘은 열기도 전에 시들었지


혼자 나누는 사랑도 아름답지만
오늘 같은 새벽에 이런 뻔한 노랠 누가 듣는다고


그대여 먼저 잠들지 말고
오늘밤 나를 생각해주오


아직도 뒤척이는 나처럼
한번쯤은

그대의 마음이 너무 뾰족해서
내 맘대로 만지기엔 겁이 나네


그대의 대답은 너무 당연하고
나도 같이 끄덕이며 웃어버렸지


혼자 내뱉는 사랑도 의미는 있지만
오늘 같은 새벽에 이런 뻔한 노랠 누가 듣는다고


그대여 먼저 잠들지 말고
오늘밤 나를 생각해주오


아직도 뒤척이는 나처럼
그대여 나를 생각해주오


오늘밤 나를 걱정해주오
여전히 뒤척이는 나처럼


한번쯤은
한번쯤은











...

난 안경 쓴 샌님이니까
내가 이렇게 사랑하는데 이렇게 원하는데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바라만 보는데도
내가 그렇게 불편할까요 내가 나쁜 걸까요
아마도 내일도 그 애는

나는 왜 이런 사람 이런 모습이고 이런 사랑을 하고
나는 아무것도 될 수 없고 바라만 보는데도
내가 그렇게 불편하니까 내가 나쁜 거니까
아마도 내일도 그 애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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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재밌는 곡들도 많이 썼는데 (가령 드림스컴트루 라니) 
이런 곡들은 참말 지끈대고 아프다 아파 아야

Nov 19, 2014

이렇게는 안된다.




많은 우물을 여러개 파는 것보다
하나의 우물... 아냐 두 개까진 괜찮을듯. 두 개의 우물을 잘 파놓고 관리하는 게 좋을 것같다.

누군가는 아마추어일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하는 게 좋다고 얘기했지만
어어어어 싫어 어어어어어 싫어. 공부를 제대로 하는게 좋겠다. 후짐을 포장할 수 음슴.



부디 내일부터는 숨을 천천히 쉬는 일 부터 집중해서 할 수 있게 하소소

작년 6월 어느 오후


Nov 17, 2014

네 개의 발자국




더욱이 완벽주의에 젖어 사는 내 눈에는
내 인생은 대학교 입학 이후로 이미 몇 가지 최악의 일들이 저질러진, 더러운 인생이 되었다고만 생각됐다. 회복불가능한, 이제는 누군가의 앞에 도저히 떳떳이 설 수 없는 삶을 살게 되었다고 말이다. 이제 나는 실패작이며 그 흔적은 주홍글씨마냥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성경을 바탕으로 했을 때도 틀린 판단이 아니다.
실제로 실수로든 고의로든 나는 하지말았어야 했을 일들을 숱하게 저질렀고, 한 번 지나간 시간이 거꾸로 흐르지 않는 한 그때의 일들은 번복되지 않는다. 또한 그 일들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에 대한 책임은 내 인생 전부로 갚아야 할만큼 막중하고 무겁다.

그런데 이 오랜 고민이 엄청난 교만임을 비틀거리는 걸음 속에서 깨닫는다.
이 모든것을 대신 책임지겠다 하신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약속을 잊었기 때문이다.

지금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 나를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덮고 있다.
당신의 가장 값진 것과 엉망진창 똥멍청이인 나를 바꾸셨다.

예나 지금이나. 최근에 내가 잘할때나 못할때나.
그 사랑은 애초부터 내가 무언가를 잘했기 때문에, 내가 먼저 무언가를 해냈기 때문에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이미 처음부터, 내가 죄인일때부터 하나님을 나를 그냥 사랑해오셨다.
절대적으로 자발적인 짝사랑이다.
그래서 받아 누리기만 하면 된다. 그냥 매일 하나님께 나아가기만 하면 된다.
그 사랑은 변하지도 멈추지도 이기적이지도 악하지도 않아서
나를 오래 기다려주고 참고 견디고 지겨워하지도 않고 그저 선하게 나와 함께 할 것이다.
영원히, 영원히

가장 강하신 이가 나를 판단하고 고소하는 모든 이들로부터 나를 보호하신다.
당신은 내 잘못을 더이상 기억하지 않는다 하신다.
나에게 새로운 자격, 새로운 지위, 새로운 생명, 새로운 열심, 새로운 힘, 새로운 목표지를 직접 나란히 동행하시며 부여하시고 이렇게 계속 함께 가자, 하신다.
끔찍한 일들을 다시는 하지 않을 수 있게 나를 바꾸겠다 하신다.
주변이들에게 도움을 끼치는, 아름다운 삶을 살도록 하겠다 하신다.
'이미' 그렇게 살아온 나날들이었다.

이제 그만 휘청대는 걸음을 바로 잡아 다시 똑바로 걷는 것을 선택하자.
지극히 세속적이고 계산적으로 변해가는 두 눈을 들어 영원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자.
말로만 비전을 주절대지 말고 이제 그만 삶으로 살아내기로 하자.
겸손하게, 겸손하게
더 겸손하게


우선되야 할 것은 성공이 아니라 경건이다.

Nov 13, 2014

이따금씩 찾아오는 비메오 과식.


BOTHER // LES SINS from PICTURE PICTURES on Vimeo.



다양한 거리, 재밌는 배치






Holy Soul // Salt Cathedral from Matthew Beck on Vimeo.




와인잔을 마시는 제스춰
피부질감






Chase and Status - Alive from Josh Cole on Vimeo.












Watchtower of Turkey from Leonardo Dalessandri on Vimeo.



편집 어떻게 하는거야? 배우고 싶다.






READY TO SURRENDER from Maceo Frost on Vimeo.




크레딧이 더 끝내줌






Mac Premo from Bas Berkhout on Vimeo.




좋은 PR







Daisy from Agathe Bray-B on Vimeo.


청순한 썸네일로 속이다니. 어쩄든 쿨.
데이지에 붙은 파리가 혼자 너무 다르게 그려진것같아서 신경쓰인다.

Nov 11, 2014

메모

-필요한건 밸런스. 너무 헌신적일 수 있어 조심해야한다.



-이 곳의 가능성을 포기하지말자고
방황하지 말고/ 여기에서/ 계속 놀자


-뱉었으면 책임을

놀란 감독이 4학년 미대생들에게 해준 이야기


















Nov 7, 2014




너의 상실 너의 실패 너의 공허 너의 무력함 너의 어지러움 너의 통증

그 얼굴 표면으로 드러나지 않는 아픔이 자꾸만 보여서 슬프다. 

너가 슬퍼하는게 전해져서 나도 슬프다.





아------------------------아

Nov 6, 2014

결여의 발견으로서의 응답


문제는 이것이다. 두 사람이 동시에 서로를 사랑하게 되는 일은 드물다는 것. 대개는 먼저 사랑을 시작하는 한 사람이 있고, 그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밝히기를 요구받는 다른 한 사람이 있다. 그러므로 사랑(넓은 의미에서 관계의 논리학)을 탐구하려면 두개의 물음을 따로 물어야 한다. 도대체 어떤 구조 속에서 A는 B에게 “나는 너를 사랑해”라고 말하게 되는가. 그리고 어떤 조건이 갖춰질 때 B는 A에게 “나도 너를 사랑해”라고 말하게 되는가. 이 두 물음 중에서 더 흥미로운 것은 후자다. 왜냐하면 내가 어쩌다 너를 사랑하게 된 것일까라는 물음은, 내가 너와 ‘이미’ 사랑에 빠진 이후에 던져지는 한에서는, 물음으로서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물음에 대한 답은 근본적으로 동어반복에 가까워지고 말 것이다. ‘내가 너를 사랑하게 된 것은 네가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정 놀라운 것은,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는 일이 아니라, 그 누군가가 나의 사랑에 응답하게 되는 일이다. ‘우리는 어떤 특정한 상황 혹은 조건 속에서만 타인의 사랑에 기꺼이 응답하는가?’

신선한 인용은 못되겠지만 역시 스피노자가 유용할 것이다. <에티카> 3부의 ‘정리 41’과 ‘주석’을 (편의상) 합쳐 정리하면 이렇다. “그가 누군가의 사랑을 받고 있다고 상상하고, 또 그가 자신이 그 누군가의 사랑을 받을 만한 타당한 원인을 제공했다고 믿는다면, 그는 자부심을 느끼며 기뻐할 것이다. 그런데 그가 누군가의 사랑을 받고 있다고 상상하되, 그가 그 사랑에 어떤 원인도 제공한 바가 없다고 믿는 경우, 그는 그 사랑에 대한 응답으로 그 누군가를 사랑할 것이다.”(Ethics, Penguin, 1996, p.92) 스피노자는 ‘나는 너를 사랑해’가 상대방에게서 끌어낼 수 있을 두 가지 결과를 말한다. 사랑을 받기 시작한 사람이 자신은 확실히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는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하게 된다. “네가 나를 사랑한다고? 응, 나도 나를 사랑해.” 과연 그럴 것이다. 그런데 반대의 경우에 대한 스피노자의 설명 역시 옳은가? 타인의 과분한 호의에는 나 역시 호의로 응답하게 된다는 정도의 얘기라면 동의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사랑’에 대해 말하고 있지 않은가. 사랑을 받기 시작한 사람이 자신은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느낀다면 그가 필연적으로 ‘나도 너를 사랑해’라고 말하게 될 거라 기대해도 좋은 것일까?

스피노자의 두 번째 설명은 언뜻 논리의 비약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가 지금 결과를 확언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조건을 한정하고 있는 것이라고 이해해본다면 받아들일 여지가 생긴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일이 너의 “자부심”만을 북돋우는 방향으로 진행되지 않는 ‘조건’하에서만 응답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 그러나 ‘조건’에서 ‘결과’로 이어지는 과정은 복잡할 것이고 이에 대한 보충 설명은 우리의 몫이다. 나는 <러스트 앤 본>이 스피노자의 문장에 적절한 주석을 달아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남자주인공 알리(마티아스 쇼에나에츠)의 “사랑해”는 사실상 스테파니(마리온 코티아르)의 사랑에 대한 그의 응답이었다. 도무지 응답할 것 같지 않던 그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그는 영화의 끝에 이르러 우리의 예상을 뒤엎고 (어쩌면 알리 자신의 예상마저 뒤엎고) 스테파니에게 응답할 수 있었던 것일까. 이 물음에 답할 수 있게 된다면 우리는 스피노자의 설명에 빠져 있는 고리 하나를 찾아낼 수 있게 된다. 당겨 말하면, 그 고리는 ‘나’라는 존재 내부의 ‘결여’와 관련돼 있다.

사랑을 받기 시작하면 우리는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새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타인의 사랑은 질문이다.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요?” 이 질문과 더불어 내 안을 들여다보기 시작하면, 서서히, 어떤 일이 벌어진다. 그 일은 스피노자가 말한 두 가지 방향을 따를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커지거나 작아진다. 내 안에 비어 있다 생각한 부분이 채워지면서 커지거나, 채워져 있다 생각한 부분이 사실은 비어 있음을 깨달으면서 작아지거나. 후자의 변화, 즉 타인의 사랑이 내가 나를 더 사랑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결여를 인지하도록 이끄는 것, 바로 이것이 나로 하여금 타인의 사랑에 응답하게 만드는 하나의 조건이 된다. 그러나 이게 다가 아니다. 아래에서 <러스트 앤 본>을 통해 알게 되겠지만, 내가 내부의 결여를 인지하는 데에는 나를 둘러싼 외적 조건들도 일정한 영향을 미치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 외적 조건들의 퍼즐이 때마침 어떤 조합을 이루는가 하는 문제는 거의 우연에 속한다. 그러므로 어떤 사랑의 논리학도 결과를 확언할 수 있는 정도로까지 정교해질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가 세상의 모든 우연을 다 통제할 수는 없으므로.



.....

말하자면 이 영화는 스테파니의 다리가 잘리면서 시작되고 알리의 주먹이 박살나면서 끝나는 영화다. 츠네오에게는 일어나지 않았으나 알리에게는 일어난 이 극적인 사건 때문에, 츠네오가 흘린 눈물과는 다른 종류의 눈물을 흘리면서, 알리는 비로소 스테파니에게 말할 수 있게 된다. “사랑해.” 그는 그저 “사랑해”라고 말했을 뿐이지만 우리가 알다시피 그 말은 “나도 너를 사랑해”를 줄인 말이다. 츠네오가 실패한 지점에서 알리는 성공했다. 츠네오가 끝내 발견하지 못한 자신의 결여를 알리는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 발견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게 될 것이다. 영화가 알려주듯이 인간의 손가락뼈는 몸의 다른 뼈와는 달리 절대 회복되지 않는다. 그의 손은 앞으로도 계속 그에게 통증을 느끼게 할 것이고, 더 거대한 결여의 가능성을 상기하게 할 것이고, 스테파니에게 매번 다시 응답하게 할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자신의 결여를 깨달을 때의 그 절박함으로 누군가를 부른다. 이 세상에서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향해 할 수 있는 가장 간절한 말, ‘나도 너를 사랑해’라는 말의 속뜻은 바로 이것이다. ‘나는 결여다.’



없음은 없어질 수 없으므로


사랑에 대한 글은 이제는 읽기도 쓰기도 싫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것이 실은 본능, 충동, 욕망 등의 변장일 뿐이라고 단정하며 짐짓 냉소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자신이 성숙하다고 믿는 미성숙한 소년들을 뿌듯하게 만들기는 하겠으나, 그것은 사랑에 대한 온갖 미신과 기만을 재생산하는 담론들 속에서 달콤하게 허우적거리는 것보다 더 생산적인 태도라고 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믿기 때문에 나는, 이 지면에서 이미 “사랑은 전칭명제로 규정할 수 없다. 그것은 언제나 개별적인 사례로(만) 존재한다”(‘죽일 만큼 사랑해’, <씨네21> 887호)라고 말한 처지에, 다시 사랑에 대해 말해버렸다. 이제 욕망과 사랑의 구조적 차이를 이렇게 요약해보려고 한다. 우리가 무엇을 갖고 있는지가 중요한 것은 욕망의 세계다. 거기에서 우리는 너의 ‘있음’으로 나의 ‘없음’을 채울 수 있을 거라 믿고 격렬해지지만, 너의 ‘있음’이 마침내 없어지면 나는 이제는 다른 곳을 향해 떠나야 한다고 느낄 것이다. 반면, 우리가 무엇을 갖고 있지 않은지가 중요한 것이 사랑의 세계다. 나의 ‘없음’과 너의 ‘없음’이 서로를 알아볼 때, 우리 사이에는 격렬하지 않지만 무언가 고요하고 단호한 일이 일어난다. 함께 있을 때만 견뎌지는 결여가 있는데, 없음은 더이상 없어질 수 없으므로, 나는 너를 떠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신형철의 스토리-텔링] 나의 없음을 당신에게 줄게요,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73779

Nov 4,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