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c 21, 2016

퇴사일기2




D-10



피곤하다. 오늘은 그냥 열심히 일했다. 누가 뭐라고 하기 전에 행사 열려면 이런게 필요하겠네 저런게 필요하겠네 혼자 머릿속으로 그리면서 마구마구 일을 했더니 S가 먼저 준비해주어서 고마워했다. 사실 내가 원하지 않는 타이밍에 너무 커다랗게 떨어진 원하지 않는 일이었지만 그냥 성실하게 끝내고 싶고 결과가 재미있었으면 좋겠다.

입사 초기에 함께 일했던 Y가 O기업에 다니고 있다는 이야기를 다같이 저녁밥을 먹은 오늘에야 들었다. 우리가 함께 같은 테이블에서 수정을 거듭해 작성한 포스팅이 그 쪽 페이지에 실린 것을 돌려 보면서 서로 격려했던 것이 얼마전 같은데 그녀는 이제 O에 속해 있다. 같은 장면을 떠올리던 S가 "그러게요, 그런데 지금은 거기 계시네."라고 말한 것에서 씁쓸함이 읽혔다.

회사는 내가 들어온 시기에 그동안 이 곳의 뿌리와 기둥 역할을 하던 두 직원이 나가면서, 그리고 이후에 새로운 인원이 채워지면서 분위기가 아주 바뀌었다. 그때부터 SS는 줄곧 말했었다. "솔직히 배신감도 느끼고 서운하죠. 새로 (들어온 분) 인사하고 친해져야하는 상황도 솔직히 싫고".

회사를 나서는 순간은 사실, 나는 더이상 이 싸움을 여러분과 함께 하고 싶지 않아요 라는 고백과 마찬가지로 들리게 되는 것일까. 무엇을 얼마나 잘했든 떠나고 나면 원망의 대상이 되는 것일까.

지난 가을에 독일문화원인가 대사관에서 우리를 인터뷰했던 글이 오늘 저녁에 게재되었다. 해당 분야의 선두 주자로서 달리고 있는 이 회사에 몸담고 있는 동안, 나는 일처리 방식에 대해서, 이렇게 될 수 밖에 없는 구조에 대해서 속으로 참지 못해 했었다. 그런데 바깥에서 본 시각으로 쓰여진 글을 읽으니 새삼, 아 그래도 내가 애먼 곳에 있었던 게 아니구나 사회적인 필요를 채우는 어떤 지점에 함께 서있었고, 나에게 매일 주어지던 업무가 이 회사가 굴러가는 데에 계속 이바지 하고 있었다 싶었다.

저녁으로 시켜먹은 비싼 도시락은 영 맛이 없었지만 그걸 추천했던 B를 다같이 놀리던 순간은 즐거웠다.


한글: https://www.goethe.de/ins/kr/ko/kul/sup/fut/20891304.html
영어: http://www.koreaexpose.com/culture/sharehouse-woozoo-housing-solution-hell-joseon/
독어: http://www.goethe.de/ins/cz/prj/fup/de16083884.htm

Dec 20, 2016

퇴사일기1




D-11



지난주부터 어쩐지 S팀장님과 미묘한 갈등이 생겨서 주말 내내 마음 한 켠이 너무 답답하고 괴로웠다. 오늘 아침에는 일찍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한 시간을 침대 위에서 온 몸을 비틀어 대며 누워있다가 끝내 지각까지 했다. 그 갈등의 한 꼭지는 내 후임자 면접에 내가 참여하느냐 마느냐로 S와 무언의 실랑이를 한 것이었다. 당연히 내 뒤에 올 사람을 뽑는 데, 이 회사의 유일한 디자이너로 가장 업무를 잘 알고 있는 이로 면접관으로서 참여해야하지 않겠는가 생각했는데, S는 또 다시 내 모습을 하나의 월권행위처럼 받아들였던 것 같다. 왜 팀장급에서 하는 일에 니가 끼느냐?는 투로 말씀을 하신 것이다. 그런데 아침에 출근하니 공용 구글 캘린더를 보니 당장 오늘 월요일부터 잡혀있는 두 개의 면접에 나도 invite가 되어있었다. 저도 참여하는 건가요, 조심스럽게 물었더니 내가 그렇게 알고 있는 것 같아서 껴주는거다 느낌으로 또 말씀을 하셔서 헉 했다. 윗사람에게 숙이면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에둘러 질문 조로 전달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웠다. 아니 저는 당연히 제 후임을 뽑는 것이라 (당연히 다른 팀장님도 그리 말씀하셨었고) 저도 참여하는 줄 알았는데, 원래 그렇게 하는게 아닌가요, "제가 잘 몰라서 여쭙습니다".

이미 수 번 보았지만 두 명의 이력서와 포트폴리오를 열심히 보고 해야할 질문을 떠올려 보았다. 한 명은 나보다 어리고 한 명은 나보다 언니다. 한 명은 공간디자인을 한 명은 경영학과를 백그라운드로 가졌다. 수시간을 들여 만들고 조였을 포트폴리오. 디자이너의 포트폴리오를 보는 게 낯설다고 생각이 들었다. 이미 9개월을 디자이너로 일했으면서. 나도 똑같이 면접을 보았던 때를 생각했다. 나는 H갤러리의 전시장 지킴이로 난로 앞에서 추위를 이겨내고 있었는데 갑자기 H가 연락이 와서 이 회사에 관심없냐고 물었다. 삼일차의 전시장 지킴이로서 이런 갤러리에서의 삶에 급 호감을 느끼던 나는 그래도 일단 뭐 지원해보기로 하고 아무렇게나 포트폴리오 비슷한 걸 만들어서 보냈다. 하얀 슬라이드에 올려진 너무 다양한 분야의 디자인. 사실 디자인이라고 하기에는, 외주로 받아서 근근이 해왔던 레이아웃 작업의 일들이었고 내 스타일이라는 걸 보여줄만한 일도 아니었다. 얼떨결에 면접보러 오라는 (J팀장님의) 전화를 받았던 날, 사실 나는 일러스트레이터를 못다루는 나 자신을 걱정하느라 잠을 못이루었다. J와 C는 제법 날카로운 질문과 당부를 쏟아내었었다. "옳다는 생각이 들면, 아람님 의견을 피력할 수 있어야 한다." "아람님도 여기 와서 얻어가는 게 분명해야 하잖아요."

한 사람은 생각보다 훨씬 작은 체구셔서 놀랐고 한 사람은 더 건장해서 놀랐다. 이미 수차례 채용을 진행해본 팀장님들 옆에 껴서 지원자를 바라보고 있는데, 이상하게 내 마음이 더 떨렸다. 또박또박 꼬박꼬박 질문에 응하는 지원자. 더 잘나 보이게 더 괜찮아 보이게. 말을 못하는 사람은 사실 별로 없을 것같다. 수수하게 입고 온 옷 매무새를 바라보았다. 일부러 더 힘주어 눈을 맞추는 상대방의 눈을 들여다 보았다. 종이 위에서 글로 경쟁하더니 이제 첫인상과 순발력으로 경쟁하는 구나. 이사람은 어디서 뭘 듣고 이렇게 잘 안다는 느낌을 주면서 말을 하는 것일까. 이사람은 다 좋은데 자기가 무얼 할 수 있을지 어필을 못하는 구나. 처음 만난 사람에게 나를 전달하고, 처음 만난 사람이 우리쪽 필요와 맞을 것이다를 확신하는 과정은 굉장히 이상했다. 포트폴리오를 직접 가져온 사람과 아닌 사람은 다르게 느껴진다. 말 끝을 올리는 사람과 조곤조곤 차분히 말하는 사람은 또 달라보인다. 앞머리를 어떻게 갈랐냐도 심지어 인상을 좌우한다. 한편, 면접을 진행해보니 이는 깨달음 중 하나는. 면접에 떨어진다고 해서 내 능력을 의심할 필요는 없는 거구나 하는 거였다. 정확히 회사는 필요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에 맞는 사람을 찾을 뿐이다.

누군가가 들어오면, 그리고 내가 떠나면, 내 작업물에 대해서 어떻게 평할까. 아니, 그 전에 내가 이사람에게 인수인계 하는 단계에서 "헐 이런식으로 작업을 하셨어요?" 라는 반응이 나올까봐 두려운 마음도 있다. 비전공자가 전공자를 가르치는 건 떨리는 일일 수 밖에. 아무도 뭐라고 안하는데 정식으로 공부하지 않았다는 까닭에 내가 먼저 자격지심을 자꾸만 느낀다. 회사에서 일하는 동안에는 완전히 잊었던 이 느낌. 이 회사를 나서면, 나는 다시 그저 인증 안 된 아마추어 디자이너가 되는 것일까.

면접 테이블. 9개월 전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가 한 자리에서 마주 앉아 있는 것 같았다. 아람님은 무엇을 잘 한다고 깨달으셨나요. 아람님의 강점은 뭐죠? 어떤 작업을 할 때 가장 재미를 느끼시나요? 그래서 이제 어디로 갈거에요?
면접을 마치고 나는 지원자를 위해 회의실 문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나도 나와서 열심히 일했다. 그새 S와의 긴장도 많이 누그러졌다. 여의도에서 일하면서 혼자 저녁으로 먹던 육개장, 카레우동, 김치볶음밥도, 여의도역으로 향하면서 보았던- 피로한 눈때문에 더 커진 가로등불도 이제 볼 날이 별로 남지가 않았다.